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82화 (182/276)

182화

제4장. 르베이나 (2)

“신경을 쓰긴 했지만 언제든지 불편하거나 부족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그리고 사나 양은 손님으로 오셨으니 황궁의 시녀들을 붙여드리겠습니다.”

시녀인 저를 사나 양이라고 불러주며 따로 시녀까지 붙여주는 루드바하의 마음이, 또 바쁜 정사에도 직접 르베나의 방을 안내해주는 그의 걸음이. 루드바하가 얼마나 르베나를 아끼고 존중하는지를 반영하는 듯해 사나의 마음이 여름을 앞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살랑거렸다.

사나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그대로 젠의 시녀를 따라 르베나의 옆에 마련했다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사나의 뒷모습을 쫓던 르베나 또한 그의 배려가 고마운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고 답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루드.”

르베나의 인사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띠운 루드바하가 그녀와 눈을 맞추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아닙니다. 더 잘 준비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미안하다는 루드바하의 말에 열린 문 앞에 선 르베나의 시선이 제게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디오니스 내부에 첩자가 있나 싶을 정도로 방의 크기부터 분위기, 가구의 위치까지 외궁 안 르베나의 방과 똑같이 꾸몄지만 모든 것들이 더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죄송하다는 그의 말이 정말 진심인 것 같아 르베나는 그의 아쉬움이 조금 궁금해졌다.

“솔직히… 조금 많이 놀라울 정도로 제 방과 흡사합니다. 그런데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르베나의 말에 순간 어깨를 한차례 부르르 떤 루드바하가 민망한지 시선을 옮기며 답했다.

“아, 젠은 처음이시라 불편하실 것 같아 사나 양에게 미리 르베나 방에 대해 물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며 울상이 된 모습에 르베나가 왜인지 웃음이 나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나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살포시 미소가 어린 르베나의 얼굴을 한 차례 확인하고 어린아이처럼 눈을 굴린 루드바하가 조금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사실 들어오실 때 드레스 룸 하나를 선물로 드리고 싶었는데 사나 양이 르베나 그대가 아주 싫어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잘하셨습니다, 루드바하 님. 아주 싫어합니다, 그런 건.”

단칼에 끊어내는 르베나의 말에 하던 말을 멈춘 루드바하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아, 그렇군요! 아, 내 정신 좀 보십시오. 르베나 그대도 많이 피곤할 텐데 계속 방문 앞에 붙잡아두다니. 어, 르베나! 부디 편히 쉬십시오, 연회가 시작되기 전 모시러 오겠습니다.”

심하게 당황스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이 조금 이상했지만 더 이상 바쁜 그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은 르베나가 깔끔하게 답했다.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어색한 미소로 답을 한 루드바하의 손이 아주 조금 서둘러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아주 빠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하는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똑똑. 그리고 누군가가 르베나의 방문을 두드린 것은 그가 사라지고 5분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 * *

“유안!! 유안!!!”

“귀가 떨어져 나가겠습니다, 폐하.”

방문을 열자마자 루드바하답지 않게 내는 큰 소리에 유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다가간 루드바하가 숨 들이킬 시간도 없이 말했다.

“당장 그거 멈추라고 전달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알아듣겠습니까?”

루드바하의 생일 연회를 앞두고 일거리가 잔뜩 쌓인 유안이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루드바하는 그것을 알아챌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드레스 룸!! 르베나에게 선물하기로 한 드레스 룸 말이야!! 그거 당장 멈추라고 전달하라고! 엄청 싫다고 하더군! 아니, 진짜 싫어하는 눈치였어!! 그러니 당장 취소해, 얼른!”

젠에 전쟁이 나도 침착하게 다른 나라로 향하시던 황제의 급박한 모습에 유안이 피곤한 듯 외알 안경을 벗어 책상에 놓인 낡은 목함에 넣으며 말했다.

“르베나 님께서 드레스 룸 선물을 받으면 정말 싫어하실 것 같습니까?”

유안의 물음에 루드바하가 고개를 붕붕 소리가 날 만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정말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그거 그냥 멈추라고 해!”

루드바하의 말에 씨익 웃어 보인 유안이 여유롭게 바뀐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잘 됐군요, 폐하.”

순간 등줄기에 싸한 오한이 올라왔지만 이를 애써 무시한 루드바하가 되물었다.

“뭐가 말이지?”

곧 무엇인가를 예감한 듯 하얗게 질린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며 유안이 여유롭게 말했다.

“이미 르베나 왕녀님의 방 앞에 도착했을 겁니다. 어마어마한 드레스와 보석, 장신구로 가득 찬 그 드레스 룸을 보여줄 폐하의 시녀가 말입니다.”

씨익. 분명 소리 없이 웃었지만 씨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루드바하는 제 발밑이 푹 꺼져 버리는 절망의 소리를 함께 들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흡족하게 미소 지은 유안의 시선이 다시 제 외알 안경을 놓아 둔 낡은 목함에 잠시 머물렀다.

“아니 이게……!”

눈 앞에 펼쳐진 드레스 룸의 자태에 언제나 차분한 사나마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의 한정판 디자인으로 구현된 드레스와 구두. 세상의 모든 빛을 담은 듯한 보석들로 만든 장신구의 향현. 그 외에도 모자, 장갑, 할 것 없이 여기서 몇 해를 보내도 다 못 입을 옷과 장신구가 드레스 룸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드레스 룸도 특별히 황제 폐하께서 맞추신 거랍니다.”

감동한 사나를 보며 말을 잇는 시녀의 눈에는 또렷한 자부심이 엿보였다.

왜 그렇지 않을까! 보통 황후들의 드레스 룸보다 족히 두 배는 크게 제작된 이곳을 가득 채우느라 몇 날 며칠 야근에 시달렸는데!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지 너무 잘 알겠다… 너무 멋진 분이잖아!’

곧 시녀의 시선은 감탄하며 드레스 룸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나가 아니라 그 옆에서 무심한 눈으로 공간을 훑는 르베나에게 향했다.

제국 제일 미녀라는 루안 공녀를 하루가 멀다 하고 본 시녀는 웬만한 영애들을 봐도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루안 공녀는 독보적인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지녔으니.

하지만 루안 공녀가 아련한 수채화라면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강렬한 유화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선물을 눈앞에 두고도 장식으로 걸린 작은 단검을 보며,

“제법 쓸 만하군.”

따위의 말을 하는 디오니스의 왕녀, 르베나. 그녀의 그 도도함과 여유, 그리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와 외모. 이 모든 걸 제 눈에 담은 시녀는 오늘부터 제 방을 르베나의 그림들로 가득 채우리라 다짐했다.

최근 르베나 왕녀 앓이를 하는 시녀들이 대륙 곳곳에 있다던데 이제야 그들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나, 나는 먼저 가 있을 테니 오늘 입을 드레스와 어울리는 장신구와 구두를 찾아 줘.”

순간 무심한 말투로 사나에게 뜻을 전하며 미련 없이 방을 떠나는 르베나의 뒷모습을 본 시녀는 황제가 황급히 이 방을 향해 오는 것도 모른 채 중얼거렸다.

“그 쿨함 진짜 멋있다, 하아… 진짜 멋진 분이야, 르베나 님…….”

“정말 이걸 입으시겠다고요?”

르베나의 얼굴에 어린 결심이 꽤 굳어 보여 사나가 다시 한번 힘을 내 르베나를 만류했다.

“디오니스에서는 그냥 하시는 말인 줄 알고 가져온 거예요. 애초에 오늘은 황제 폐하와 첫 춤을 추는 중요한 날이잖아요. 그러니 다시 생각하세요, 전하! 유파시드께서 보내주신 예쁜 드레스가 저렇게나 많은데……!”

드레스 룸에서 몇 개 추려 온 그의 선물들을 보며 사나가 울상을 짓자 르베나가 사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하 말고 르베나.”

타국이라 좀 예의를 차려 불렀더니 바로 정정을 요구했다. 그 짧은 말속에 담긴 르베나의 애정에 사나가 조금 전의 만류도 잊고 말갛게 웃어버렸다. 자연스레 울상을 짓던 얼굴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네. 르베나 님!”

애정이 가득한 사나의 부름을 들었지만 르베나는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

“사나가 만들어준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 그리고 오늘이 중요한 날이니 그걸 입겠다는 거야.

결정에 번복은 없어, 사나.”

사나는 순간 설렘과 고마움 그리고 약간의 걱정스러움을 뒤로하며 자신이 20여 일 간 밤낮으로 만든 드레스를 조금은 망설이는 손길로 꺼내들었다. 최고급 새틴으로 만든 흰색의 드레스.

“이렇게 수수한 건데…….”

일부로 르베나가 들리도록 혼잣말을 한 사나의 눈시울이 순간 괜시리 붉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들어온 시녀들에 둘러싸여 화장을 하고 사나의 손에 들린 드레스를 가져가 입는 르베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때로부터 15년. 어느새 측근들에게 부드러운 말투를 쓰려 노력하고, 가끔은 루아나 공주를 꼭 닮은 미소도 보여 준다.

아주 조금씩은 제 감정을 말하기도 하며, 오늘은 끝내 사나의 드레스를 고집하고야 마는 르베나.

평상복이라는 핑계로 만들었지만, 딸의 데뷔탕트에는 엄마가 직접 지은 드레스를 입힌다는 디오니스의 전통을 사나는 아무도 몰래 이 드레스에 담았다.

‘데뷔탕트가 즉위식과 겹쳐 그때는 못 해 드렸기 때문에 이번에 한 건데 그걸… 아신 거겠지.’

순간 점점 변해 가는 르베나의 모습을 느끼며 사나는 왜인지 코끝이 찡해졌다. 말하지 않아도 제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 주고 배려해 주는 르베나가 너무 예쁘고 고마워서.

하지만 사나의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치장을 끝내고 제 앞에 선 르베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르베나 님…….”

사나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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