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81화 (181/276)

181화

제4장. 르베이나 (1)

“…르베나.”

격랑이 몰아치는 짙고 어두운 밤하늘이 고요히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 밤하늘 안에는 어느 봄밤의 기분 좋은 포근함이 있었고 조용한 겨울밤 차갑게 빛나는 별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광폭하리만치 어두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뜨거움이 열기를 내뿜으며 들끓었다.

르베나는 자신의 오른뺨을 조심스레 감싸는 눈앞의 밤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전해진 열기 탓일까. 밤하늘과 마주한 온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두근두근.

조용한 달빛이 환하게 들이치는 넓고 단정한 방. 누구의 것일지 모를 심장 소리가 요란스레 박동했지만 그것은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서로의 눈빛을 조용히 응시하는 시선은 뜨거웠고 코에 어지러이 얽혀오는 서로의 향은 이 밤 더없이 강렬했다.

“르베나.”

깊고 부드러운 말소리와 함께 르베나의 뺨에 닿은 그의 손이 더없이 뜨거웠다. 곧 르베나가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마주보자 그의 숨결이 한 층 더 진하게 전해졌다.

“내 모든 걸 주고 또 주고 싶을 만큼.”

조금 더,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제발 내 모든 걸 남김없이 가져가 달라 애원할 만큼.”

이제는 조금 애절해진 그의 낮은 음성이 뜨거운 숨결과 함께 얼굴 위로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대가.”

어느새 그에게서 나는 향이 짙어졌고 그의 얼굴로 인해 르베나의 얼굴에는 작은 그림자가 졌다. 마치 깊은 산 속에 있는 것 같이 상쾌한 나무와 초록 잎들의 우드향.

거기에 더해진 약간의 부드러운 향기. 곧 그에게서만 나던 향은 점점 더 짙어졌고 밤하늘을 수놓은 긴 속눈썹은 르베나에게 닿을 듯 가까워졌다.

“…미치게 좋아.”

아주 뜨겁고 질척한 무엇인가가 드디어 그의 음성과 함께 터져버렸다. 동시에 그의 향이, 얼굴이 그리고 입술이 르베나에게로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이 아주 조금 뜨거웠다.

얼마 전, 디오니스.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를.”

제 옆에서 굳게 입을 닫고 평소보다 좀 더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아를을 보며 르베나가 말했다. 그러자 아를은 제 옆의 르베나를 보지도 않고 답했다.

“말했잖아, 갈 거라고.”

고집스러움과 함께 찬바람이 뚝뚝 묻어나는 그의 대답에 르베나가 아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는 작게 한숨을 내어 쉬었다.

“무조건 가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잖아.”

조금은 달래듯, 그리고 조금은 단념하듯 전해진 르베나의 대답에 아를이 제 옆에 선 그녀를 향해 제 얼굴을 돌렸다. 순간 대화 내내 참 보기가 힘들던 금안이 드디어 빛을 내며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럼 네가 루드바하인지 뭔지 하는 황제의 생일 축하 파티에! 그것도 그놈 파트너로 간다는데 호위인 내가 어떻게 안 가. 응?”

잔뜩 화가 났음에도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발음하는 아를의 얼굴에는 낯선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화난 얼굴보다 더 두렵다는 생소한 느낌이 르베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동시에 르베나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벌써 몇 명일지 모를 사람들의 반응에 르베나는 슬슬 자신의 결정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죽여 버릴 거야.”

순간 아를의 상관으로써 도저히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그의 서늘한 중얼거림을 들은 르베나의 얼굴에 절로 한숨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루드바하의 스물여섯 살 생일.

디오니스에서 일어난 큰 전투 이후 모든 왕국과 젠 제국은 ‘보토니에’와의 전쟁을 대대적으로 선포하며 나라마다 경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다만 마를한과 켄느, 디오니스와는 달리 상황이 좋지 않은 자칸은 젠에서 보낸 대규모의 성기사들과 세츠들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와중에 루드바하의 26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성대한 파티가 젠에서 개최되는 것이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자중하자는 목소리도 나왔으나 의문의 단체에 의해 제국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다는 의견이 절대적이라 제국은 결국 성대한 파티를 열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 루드바하의 파트너 초청장이 바로 며칠 전 르베나에게 도착했다.

“도대체 왜 가겠다고 하는 거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정말 몰라서 그래?”

생각해보니 또 열 받아 죽겠다는 듯한 얼굴의 아를이 재차 르베나를 만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르베나의 옆에 서 있던 사나가 아를을 살살 달라듯 말했다.

“한번 파트너가 됐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죠, 아를 경. 게다가 르베나 님께서 황제 폐하께 그 페어링인가 뭔가 하는 마법에 대한 철회를 요구하신 다잖아요. 그리고 르베나 님이 거절하시면 파트너도 없이 혼자 들어가시겠다는데… 휴우.”

아를을 달래기 위한 꺼낸 말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은 억지스러운 황제의 초청장.

그걸 떠올린 사나의 입에서도 작은 한숨을 흘러나왔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왕녀 전하께,

르베나 왕녀 전하를 저의 26번째 생일파티의 파트너로 정중히 초대하는 바입니다.

...중략...

르베나 왕녀 전하께서 거절하실 경우 혼자 입장하면 되니 부담은 갖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조심스레 전하는 바입니다.

...중략...]

아니, 제국의 황제가 파트너도 없이 본인 생일파티에 간다니. 물론 들어보니 이때까지도 그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르베나에게 초청장을 보낸 사실이 전 대륙에 퍼진 지금, 그가 혼자 입장을 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사나는 순간 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그냥 르베나 님을 마음 편히 보내 주세요, 아를 경.”

미소를 지으며 다시 달래듯 말을 잇는 사나에게 아를이 냉담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아를을 보고 한번 웃어 보인 사나의 눈이 문득 여기저기 가득 널려있는 상자들을 담아냈다. 그와 동시에 상자들과 함께 아침마다 들려오는 시녀들의 소리가 사나의 머릿속에 자동재생되기 시작했다.

“이건 마담 샤네르 님의 신상 구두예요!”

“어머! 이건 구챠 브랜드의 한정판 가방과 액세서리!”

“아니, 이건 디오르 마담의 수제 레이스 드레스!!

아를을 비롯한 후벤, 제노스, 아한 등의 분노가 무색하게 르베나는 고민 끝에 결국 승낙의 뜻을 전했고 동시에 루드바하가 기쁜 마음으로 엄청난 양의 드레스와 구두, 보석 등을 텔레포트를 통해 수도 없이 전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아침 시녀들은 밀려드는 상자에 비명 같은 환호를 질러댔고 그가 보낸 선물들은 이제 르베나의 드레스 룸을 넘어 방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 눈앞의 그것들을 보던 사나의 눈이 문득 또다른 생각으로 곱게 휘어졌다.

“저는 다른 것보다 우리 르베나 님과 함께 젠에 가는 게… 그게 정말 꿈만 같아요!”

젠에서 온 선물들을 보자 얼마 전 르베나의 제안이 생각난 탓이었다. 왕궁 시녀인지라 타국에는 가지 못하는 사나의 처지를 배려한 르베나의 제안. 그것을 가슴에 담으며 사나는 다시금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사나의 설렘과 달리 여기엔 여전히 불만이 많은 동행이 있었다.

“꿈만 같긴. 차라리 우리끼리 다른 곳에 여행을 갈까?”

다른 제안을 건네는 아를의 금안이 처음으로 반짝거렸다.

“아를,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몸이 좋지 않으면……!”

하지만 르베나의 만류에 아를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차갑게 굳어졌다. 덩달아 방에 놓인 선물상자들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아를이 그답지 않게 소리쳤다.

“싫어, 갈 거야. 르베나 너의 호위는 나만 할 거라고!”

디오니스의 전투 이후 아벨디온에서 가장 큰 부상을 입은 아를. 그의 동행은 이렇게 많은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강한 의지로 결정되고 말았다.

그렇게 저마다의 감정을 가진 계절은 이제 어느덧 파릇파릇한 봄을 지나 여름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르베나의 별궁, 크고 깨끗한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은 여느 때보다 더 청량하고 시원했다.

* * *

끝도 없이 펼쳐진 크고 작은 크기의 수많은 정원에는 잘 관리된 관목들과 가지각색의 꽃들이 제 모습을 당당히 뽐내고 있었다. 그 모든 정원 가득 화려하게 수놓인 조명의 불빛은 분명 어두운 밤 이곳의 아름다움을 여과 없이 담아낼 것이다. 곳곳에 들어선 건물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상징인 흰색과 금색으로 다양한 음각을 드러내었고 중앙의 큰 분수대에서는 큰 월계관 사이 엑스자로 놓인 두 자루의 검 끝을 통해 맑고 시원한 물을 시원하게 쏟아냈다.

그 옆으로 나 있는 길을 통해 도달한 큰 유리온실의 뒤편, 그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중앙에 위치한 건물로 들어간 디오니스 일행은 잠시 제 앞에 펼쳐진 모습에 호흡을 멈추었다.

“와… 장난 없다.”

누군가의 얼빠진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그들의 주위로 펼쳐졌다.

투명한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화려한 조명들이 넓은 복도를 따라 줄지어 매달린 채 내부를 가득 장식하는 빛의 모습. 흰색 일색의 내부에 금과 푸른색 보석을 이용한 값비싼 장식품들로 알려주는 현 그들의 황제.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붉은 융단이 깔린 긴 복도를 가득 채운 역대 유파시드의 초상화들. 그 끝에 그들을 초대한 이곳의 주인, 루드바하가 있었다.

“르베나. 오시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의 뒤에 위치한 큰 통유리의 열린 창을 통해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 그 바람에 작게 흔들리는 그의 은발과 화사한 미소가 참 잘 어울렸다.

그리고 루드바하의 음성이 닿은 순간 르베나의 심장은 이유도 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대를 좋아합니다, 르베나.”

언젠가 들었던 자칸에서의 고백이 지금 생각나는 건 왜일까. 게다가 디오니스에서의 전투가 있고 벌써 몇 개월, 르베나와 루드바하는 각각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서로 보지도 못한 채 바쁘게 지냈다. 그래서 르베나는 그 고백 역시 거의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세차게 뛰는 제 심장 소리가 낯설고도 당황스러워 르베나의 대답은 평소보다 한 박자 늦어지고 말았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가 세츠들의 중심에 계신 폐하의 영광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황제 폐하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하며 보내주신 아네벨 상회의 텔레포트 카드 덕분에 모두가 편안히 올 수 있었음에 한 번 더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딱딱하고 뒤끝 없는 기사의 말투가 아닌 완벽한 궁중 예법 속 왕녀의 말투로 전하는 르베나의 인사는 조금 낯설지만 듣기 좋았다. 동시에 붉은색 시스 스타일의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은 르베나의 모습에 이번엔 루드바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향하는 조금은 머뭇거리는 시선과 드레스만큼 붉은 입술. 그것에 괜히 달아오른 제 얼굴이 민망해진 순간, 루드바하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중앙의 큰 창을 통해 여름의 끝을 알려오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파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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