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80화 (180/276)

180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외전 : 칸 이야기 (3)

하지만 그날, 칸의 발자국은 끝내 디오니스로 향하지 못했다.

거의 모든 힘을 루드바하에게 주고 나온 그 길의 끝, 보토니에에서 나온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그를 둘러쌌기 때문에.

털썩.

이미 루드바하에게 준 상당량의 힘으로 마법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칸은 그들의 마법에 너무도 쉽게 당했다. 그리고 쓰러진 칸의 몸을 어느 폐가에 던져둔 보토니에 마법사 한 명이 쓰러진 그의 모습을 보고 히죽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진작 우리한테 협조했으면 네 여자도 너도, 크크크… 이렇게는 안 됐을 거 아냐… 아, 네 딸도 마력이 상당하던데… 곧… 보겠네. 크크크크크.”

쓰러져 붙잡힌 채 강제로 수면 마법에 걸리게 된 칸의 눈에서 힘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원래의 그라면 걸리지도 않았을, 설령 걸렸을지라도 바로 깨어날 수 있는 간단한 마법이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후두둑.

‘루아나… 이대로 널 보고 싶다…….’

순간 말갛게 웃는 루아나가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 보지 못한 그들의 아이, 르베나의 형상이 그려졌다.

후두둑.

누워 있는 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르베나… 우리 아가… 아빠가 미안해… 이번에도 아빠가… 조금… 늦을 것 같아.’

곧 칸에게서 쉴 새 없는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약 없는 잠의 시작이었다.

5년 후, 그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트랩 마법에서 빠져나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고, 고작 5년이란 시간 안에 그 마법을 파훼한 건 마법사들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당사자는 마법에서 깨어나자마자 지체 없이 디오니스의 왕궁으로 향했다.

초췌한 몰골과 말라비틀어진 몸,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마력으로는 당장 1년의 생존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트랩 마법을 파훼했다.

그리고 오로지 그의 딸을 만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내 디오니스의 왕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왕궁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사랑스러운 딸은 감당하지 못할 마력 때문에 제노스 왕의 마법으로 당시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제노스 왕이 아주 비밀리에 큰 마력을 가진 베이라를 찾는다고 했을 때 짐작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 곤히 잠들어 있는 딸을 보자 그의 목이 꽉 막혀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1년의 삶도 보장할 수 없는 지금.

그는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며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동시에 그에게 남은 모든 마력을 다해 아이의 마력을 봉인하기로 했다.

이전의 그였다면 크게 좋아할 만한 아이의 큰 마력이 지금 이 순간은 그저 미안하고 미안했다. 찬란한 재능이 그가 없는 아이에게 짐이 될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 곁에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기에.

그나마 다행인 건 르베나에게 물려준 마력의 대부분이 그의 것에서 비롯되었기에 그는 효율적으로 르베나의 마력을 가둬 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르베나의 마력은 굉장한 잠재력이 있어 어린 르베나의 감정에 쉽게 휩쓸릴 수 있었다.

아직 감정 조절이 어려운 어린 르베나가 거센 감정에 휘둘려 마력의 봉인을 깨기라도 한다면, 르베나는 그 반동으로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그의 생명과 르베나의 마력을 이어놓기로.

아주 만약에 르베나가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마법이 개화될 경우의 리스크를 모두 그가 가져가기로 말이다.

물론 그때까지 그가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는 제노스에게 혹시 모를 당부를 한 후, 그렇게 처음 본 그들의 아이, 르베나를 떠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벨모른 공작가의 모든 재산을 조용히 처분하고 어디론가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렇게 꼬박 10여 년.

그는 조용히 르베나의 리스크를 제 생명으로 대신할 준비를 하며 살았다.

어린 르베나가 언제 폭주할지 모르기에 그는 집도 사지 않았고 먹을 것도 충분히 사 놓지 않았다. 그저 언제고 르베나를 대신해 죽을 수 있다면, 그래서 루아나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갔다.

원래대로라면 루아나의 복수를 해야 하겠지만 칸은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전부를 르베나에게 걸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과 르베나에게 연결해 놓은 마법이 끊어진 것을 느꼈다.

후둑, 후두둑. 그의 눈에서 쉴 새 없는 눈물이 흘렀다.

르베나의 나이 열다섯. 르베나는 폭주 없이 마력을 컨트롤함으로서 그들의 오랜 마법을 저도 모르게 끊어 낸 것이다.

그리고 칸은 그날, 그녀의 딸에게서 그의 두 번째 삶을 허락받았다.

“루아나… 조금만 더 우리 아이의 곁에 있다 갈게… 루아나… 루아나…….”

칸은 10여 년 만에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딸이 내어 준 두 번째 삶이 너무 버거워서.

그리고 그 삶이 버거운 딱 그만큼 그의 딸이, 그리고 루아나가 사무치게 그립고 그리워서.

* * *

“칸 님,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평범한 갈색 눈에 갈색 머리카락.

마를한으로 향하는 어느 길목에서 누군가 칸을 불렀다.

칸이 멀리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어느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안, 내 모습 괜찮나? 그 아이가 보기에 너무 허름하진 않겠지?”

조금은 긴장한 듯한 칸의 말에 루안이 성의 없이 든 검을 흔들며 말했다.

“여행길에 너무 좋은 옷은 이상해 보인다고 하셨잖아요.”

루안의 말에 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나를 닮아 의심이 많은, 아니 신중한 아이이니 이 정도가 딱 좋아. 근데 루안! 갈색 머리카락이랑 갈색 눈은 너무 평범하지 않아?”

칸의 질문에 루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튀면 인물이 너무 사시잖아요!

혹시라도 다른 여자들이 관심 갖는 모습 보여주기 싫다면서요!”

벌써 몇 번째 되풀이되는 물음에 루안이 조금은 짜증스레 답하지 칸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내 삶에 여자는 루아나 뿐이야.

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모습 따위는 우리 딸한테 절대 안 보여줄꺼야!!”

근데 루안…….”

“칸 님! 가까이 옵니다!!”

또다시 무언가를 물어보려는 칸의 말에 루안이 칸의 앞에 서 검을 들며 상당히 긴박감 넘치는 표정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위험해 보이겠지?”

작은 칸의 질문에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이 정도면 평범한 사람들이 딱 죽기 좋은 상황이죠.”

태평한 대화와는 다르게 그들의 주위엔 이미 가젤 떼가 모여 있었고 다그락, 다그락 많은 일행이 이쪽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꿀꺽.

그답지 않게 칸이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휘, 휘익-!! 챙, 챙.

여기저기 날쌔게 날아올라 검을 휘두르는 르베나의 모습에 루안이 칸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무 건강… 큼… 잘 자라셨는데요.”

하지만 루안의 말에도 칸의 눈은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 그녀의 풍성한 웨이브를 닮은 헤어스타일.

루아나가 사랑했던, 그래서 우리 아이도 꼭 닮았으면 좋겠다 노래를 부르던 그의 붉은 눈동자.

그리고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따뜻함만을 쏟아내던 그녀를 꼭 닮은 입까지.

칸은 그와 루아나의 딸, 르베나의 빛나는 모습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잠시 얼굴만 보기로 하고 온 그곳에서, 언제나 일에 치여 정해진 일과만을 따라 살던 그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나온 것은.

‘매일 매 순간 보고 싶었단다, 르베나.’

‘너와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다, 르베나.’

‘그녀를 닮았을 너의 미소를… 한 번만 보고 싶구나, 르베나.’

‘그냥 다 괜찮으니 조금만 네 옆에… 있고 싶구나, 르베나.’

칸은 눈앞의 아이에게 건네고 싶은 수백 개의 말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희가 기사분들과 동행을 해도 될까요?”

칸과 르베나의 인연이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 * *

하늘로 치솟은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 주위를 끊임없이 배회하는 제 마력을 보며 르베나와 쏙 닮은 칸의 붉은 눈에서 오랜만의 눈물이 맺혀버렸다.

어린 시절의 학대, 드록 왕자와 세나르 왕비의 괴롭힘. 그 모든 시절 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비로서 르베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공작가의 재산을 자신이 죽는 동시에 르베나에게 전달되게 조치만 해놓고 본인은 하루하루 연명하며 르베나의 폭주 리스크를 대신 맞을 준비만 했다.

또 제노스 왕이 르베나를 아끼는 모습만 보고 그가 르베나를 지킬 수 있으리라 섣불리 생각했다. 게다가 르베나의 폭주와 함께 생을 다하는 자신의 모습을 절대 딸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아 가까이에 있을 수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르베나만 한 힘을 가진 아이들의 폭주는 예견된 사고였다. 그랬기에 그는 르베나를 대신해 죽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마음조차 힘들고 처참했을 르베나에게는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그는 또한 잘 알았다.

그리고 르베나의 나이 열다섯.

르베나가 정상적으로 마력을 콘트롤 하게 되었을 때부터 그는 딸에게 허락받은 두 번째 삶에 공작가의 재산으로 상회를 세우고 정식으로 단체를 꾸려 보토니에를 쫓음과 동시에 남모르게 르베나를 지원해 왔다.

르베나를 지지하는 후벤과 가스트 가문에 의심이 가지 않을 만한 도움을 주며 재산을 늘려주었고 르베나의 생일이 되면 들어봤을 법한 누군가의 이름을 빌려 큰 선물들을 보냈다.

제노스 왕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알게 모르게 디오니스의 귀족들을 포섭해 그에게 힘을 실어주게끔 했고 르베나의 외궁에 먼 이국 왕가의 이름으로 끊임없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세나르가 유폐된 궁의 감시를 제 부하들에게 맡겼다.

뒤늦게 르베나의 어린 시절을 알게 되어 드록 왕자와 세나르를 죽일까 오래 고민했지만, 바른길을 걷는 르베나의 뜻을 존중하여 실행하지는 않았다. 물론 르베나를 처음 만난 날 감히 제 앞에서 르베나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는 드록을 보며 진정으로 살기가 솟긴 했었지만. 그렇게 상인으로서 성공하며 그는 본격적으로 제 마력의 회생을 돕는데 많은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워낙 타고난 마력이 크고 강한 덕에 매일 생성되는 마력이 적지 않아 5~6년의 시간으로도 그는 꽤 많은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오직 그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르베나의 곁에서 1년.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그는 삶의 두 번째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르베나는 시련이 와도 굴하지 않았고, 자신의 길을 흔들림없이 개척해 갔으며, 주변의 사람들을 챙기고 아낄 줄 아는 정말 멋진 사람으로 성장했다.

루아나와 칸이 곁에 없었음에도 르베나는 누구보다 훌륭한 빛이 되었다.

칸은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언제나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 어두운 허공을 수놓는 르베나와 자신의 마력을 보며 칸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르베나를 보고 싶다고.

그래서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혼자 있을 루아나에게 미안해서.

그럼에도 르베나의 곁에, 이제는 아버지로써 있고 싶어지는 스스로가 양심도 없다 싶어서.

20년.

그가 르베나의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될까, 루아나. 나 너한테 너무 미안한데… 혼자 있을 네 생각에 너무너무 미안한데… 그래도 나 조금은… 욕심을 내 봐도 될까, 루아나…….”

펑, 퍼엉!!!!!

칸의 위로 휘황찬란한 마력들이 마치 디오니스를 지킨 위세를 과시하듯 폭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칸의 눈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계속 혼자서 폭사해나가던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이 제 마력의 주위를 감싸는 칸의 마력에 서서히 감겨드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후두둑, 후두두둑.

그와 동시에 칸의 얼굴에서는 르베나의 것과 똑 닮은 화사한 미소와 함께 주체할 수 없는 눈물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오래전 흘려들어 잊어버린 어느 말이 불빛처럼 번쩍이며 흘러들어 왔다.

“칸 약속해. 만약… 아주 만약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죽는다면. 아… 귀 막지 마!! 들으란 말이야!!”

“아주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러면… 칸!! 이불 쓰지 말고!! 응? 아무튼 그러면!! 남은 사람은 최선을 다해 우리 르베나를 두 배로 더 사랑하고 지켜주는 거야. 알았지?”

“우리 르베나도, 르베나의 사람들도, 그리고 언젠가 르베나가 낳을 아이들도, 모두. 알았지? 칸!! 먼저 간 사람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말이야.”

“하… 왜 울어, 칸!!! 나 안 죽어!! 안 죽는다니까!! 울지마~~ 칸!!! 아휴 정말 내가 못 살아…….”

하늘에서 뒤섞인 두 개의 검붉은 마력에 녹색과 회색의 빛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찬찬히 눈에 담은 칸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훗날 ‘돌아온 디오니스의 공작’, ‘전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위’, ‘베이라 마법의 시초’ 등에 뽑히는 ‘카네스터 드 벨모린’은 본인의 어느 자서전에 이러한 말을 적어 넣었다.

[얼굴만 보고 돌아오려던 어느 길목에서 르베나에게 충동적으로 동행을 구하는 말을 한 그날의 나를.

나는 죽는 순간까지, 칭찬하고 또 칭찬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젠가 만나게 될 나의 그녀 루아나가… 아마도 가장 기뻐했을 순간이기에.]

<검을 든 왕녀, 르베나> 제3장 아벨디온 下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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