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외전 : 칸 이야기 (2)
퍽.
“하아. 진짜 적당히들 해! 벌써 며칠 째야!!”
자꾸만 자기들과 함께 이상한 힘을 만들어내자는 놈들을 벌써 며칠째 수도 없이 쓰러트린 칸이 지쳐 짜증스럽게 외쳤다. 하지만 도대체 몇 명이나 더 있는 건지 벌써 몇 번째 따돌리고 싸우기를 반복해도 저놈들은 계속 나타나 그를 회유하려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 건지 그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저 조직의 뿌리를 찾아내 완전히 없애야 하는 게 맞지만, 칸에겐 지금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곧 태어날 그들의 아이, 르베나의 탄생을 함께하는 일. 그리고 지키는 일 말이다.
루아나의 배 속에서도 얼마나 넘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지 딸인지 아들인지를 구분하는데만 꽤 오랜 시일이 걸렸다. 그 말인즉 아이가 태어나 그 마력을 적당히 눌러 줄 힘 있는 마법사가 곁에 있어야 아이가 단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아이의 탄생을 앞두고 누군가를 죽이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가 않아, 칸은 달려드는 놈들을 적당히 손만 봐준 채 서둘러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럴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카네스터 님. 하지만 저희는 카네스터 님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저희와 함께해 주시길 다시 한번 요청드립니다.”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또다시 그의 앞길을 막았다.
어린 아기의 탄생을 앞두고 살상을 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상대한 게 문제였을까?
오랜 시간 끈질기게 그를 쫓는 자들을 보며 순간 칸은 속으로 루아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고는 제 손안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빨리 갈게, 루아나. 르베나, 제발 내가 갈 때까지 엄마 배 속에 있으렴.’
그뭄 달이 어두운 하늘에 그림처럼 걸린 날.
칸의 손에서 나간 검붉은 마력이 어둡고 인적이 드문 숲의 모든 것을 감싸 안았다.
검붉은 마력의 폭사.
그리고 밤하늘에 얇게 걸린 그믐달.
르베나가 세상에 태어나던 어느 날의 밤이었다.
* * *
“휴우, 진짜 끈질기네!!!”
따라붙는 놈들을 모두 해치우고 어느새 숲을 벗어난 칸이 한숨을 내쉬었다.
르베나의 탄생을 앞두고 사람을 죽일 순 없고 그대로 놔두자니 자꾸만 따라붙어 칸은 그들을 오랜 수면에 빠지게 해 줬다.
능력이 좋으면 몇십 년이 지난 후에 살아나겠지만, 아니면 그대로 육체가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수면에만 빠져 있는 마법이었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나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자기 위안을 하며 칸은 급히 텔레포트를 통해 디오니스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디오니스의 궁으로 가 스르르 안으로 스며들었다.
흠칫.
궁 안으로 들어간 칸이 순간 느껴지는 불쾌하고 낯선 공기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됐어.”
언제나 궁 안 가득 넘쳐흐르던 루아나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루아나와 함께 있던 르베나의 강한 생명력도 어째서인지 불안하게 흔들리며 루아나와 떨어져 있었다. 불안함을 느낀 칸이 재빨리 율린의 기척을 찾아갔다.
그리고 들어선 방 안.
그곳엔 흰 실크에 덥힌 누군가의 시신과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율린이 있었다.
“율린… 루아나는… 루아나는 어딨어?”
갑자기 나타나 루아나의 행방을 묻는 칸의 모습에 율린이 놀란 얼굴로 그를 봤다가는 곧 사나운 얼굴을 하며 주먹으로 그의 얼굴이며 머리, 손에 닿는 모든 곳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 나쁜 놈! 이 천하의 몹쓸 놈!! 으흑… 으아악!! 살려내!!! 살려내 우리… 공주님… 흑!! 너만… 너만 기다리다… 아흑…….”
털썩.
이내 자리에 주저 앉아 통곡하는 율린을 보며 칸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앞으로 걸어갔다.
티하나 없이 곧게 펴진 흰색의 실크, 그리고 그 아래 조금 빠져나온 밀 빛 머리카락.
“아니야… 아니… 야.”
천천히 걸어가 조심스레 그것을 거둬낸 칸의 눈에서 순식간에 생기가 빠져나갔다.
창백한 얼굴, 뜨지 않는 눈, 보여 주지 않는 미소.
“루… 아나… 나 왔어… 루아나… 나… 왔어… 늦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러니까 눈 좀 떠 봐. 놀리지… 마… 하아… 하… 이러… 지… 크흑… 마아…….”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내뱉는 칸의 말에도 그녀, 루아나는 잠들어 있었다.
그런 루아나를 보던 칸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저벅저벅 율린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오는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고, 언제나 반짝이던 붉은 눈은 모든 빛을 잃은 채 형형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루아나는 건강했어. 아무 문제도… 하…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왜……!!!”
칸의 질문에 율린이 너무 울어 퉁퉁 불어 버린 얼굴을 하고는 꽉 막힌 소리로 말했다.
“모든… 게 모든 게 다 괜찮았는데… 흑… 근데… 르베나 님이 나오시자마자… 갑자기… 피가… 피가… 멈추질 않아… 서… 흑… 끝까지… 끝까지 얼마나… 당신을 찾았는데… 차마…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당신을… 흐아악……!!”
울며 겨우 말을 전하는 율린을 본 칸이 서둘러 루아나에게 다가갔다.
분명 모든 게 괜찮았다.
루아나가 제발 그만하라고 했을 만큼 칸은 매일 소량의 마력을 흘려 루아나의 몸속에 막히거나 약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때마다 루아나는 언제나 건강하고 생기가 넘쳤다. 칸은 그게 너무 좋아 일부로 더 루아나의 몸을 살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과다출혈로 죽다니.
이건 무엇인가가 잘못됐다고 누군가 칸의 머릿속에 강한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제노스 왕의 충격으로 아직 시신 수습도 채 하지 못한 채 외진 방에 오직 율린과 함께였던 루아나.
그 차가운 몸을 칸이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리고 제 마력을 속절없이 루아나에게 불어넣기 시작했다.
“눈 떠봐. 루아나… 내가 왔어. 나 왔어… 루아나. 제발… 눈 좀 떠봐. 응? 르베나 봐야지… 기대했잖아… 눈 색은 누굴 닮았을지… 머리색은 누굴… 닮았을지… 루아나 제발… 제발 날 두고… 가지마… 안돼… 안돼… 너 없이는… 제발…….”
칸의 몸에서 더 환하고 강한 마력이 루아나에게 쏟아 부어졌다.
하지만 마력들은 이내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하고 루아나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다시 그에게로 돌아올 뿐이었다.
“으… 으… 루아나… 루아나… 제발… 제발!!”
속절없이 빠져나오는 마력을 느끼며 루아나의 몸을 끌어안고 절규하던 그때 루아나가 누워있던 곳에서 톡. 하고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왔다.
작은 유리병.
하지만 별생각 없이 그걸 주워든 칸의 눈에 이내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운 어조로 묻는 칸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놀란 율린이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다시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뭐냐뇨!! 당신이 보내 주셨잖아요!! 언제나 만나는 광장 그 장소에 쪽지와 함께… 출산에… 좋다고… 조금 늦을 테니 잊지말고 이걸 마시라고… 반… 드시… 출산이 시작될 때 마시라고. 두 분의 증표 표시와 함께… 근데……!”
휙. 눈 깜짝할 새 율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칸이 악귀 같은 얼굴로 율린에게 물었다.
“누가 뭘 보내?”
그제야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율린이 창백해진 얼굴로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칸 또한 풀썩. 제 자리에 주저앉으며 말았다.
“멀… 레이 꽃이다… 저건…….”
순간 모든 생기를 잃은 듯 흘러나온 칸의 말에 놀란 율린이 벌벌 떨리는 온 몸으로 절규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아아악!!!”
율린의 목소리가 외진 방을 가득 메웠다.
차마 인간의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율린은 짐승처럼 절규하며 제 온몸을 긁고 때리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율린의 절규와 언제나처럼 고운 모습으로 누워있는 루아나.
그림같이 그뭄달이 눈에띄게 예뻤던 그날.
칸의 인생이 180도로 뒤바뀌었다.
* * *
탁.
흰색의 바탕에 금색의 장식들도 멋스러움과 고급스러움을 한껏 끌어올린 저택.
그 저택으로 누군가 가볍고 날래게 들어섰다.
탓.
그리고 그의 모습이 아기자기 귀여운 한 아이의 놀이방에 나타났다.
“안녕?”
그가 인사를 건네자 방에 있던 작은 인영이 그를 돌아보았다.
“우와…….”
그러고는 앙증맞은 작은 입이 커다란 감탄을 쏟아냈다.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의 입에서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쿡쿡…….”
하지만 어딘지 그의 미소는 너무도 메마르고 그보다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좀 더 크게 헤-입을 벌린 아이에게 그, 칸이 다가갔다.
저벅저벅.
“이름이 뭐야, 몇 살?”
목이 쉬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많이 잠겨 있긴 했지만 그것조차 듣기 좋은 그의 질문에 어린아이, 루드바하가 홀린 사람처럼 답했다.
“루, 루드바하요! 다섯 살이에요.”
칸의 시선이 한참 동안 어린 루드바하를 향해 있었다. 그러다가는 그가 루드바하에게 물었다.
“그래, 루드바하… 음… 아저씨가 너에게 선물을 하나 줄까 하는데 괜찮을까?”
그의 물음에 루드바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선물이요? 음… 부모님이 이유 없이 선물 같은 거 받지 말라 그랬는데…….”
선물이란 말 앞에서도 부모님의 말씀을 한 번 더 생각하는 아이가 귀여웠다.
그래서 칸은 아이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덧붙였다.
“음… 이건 아마 너희 부모님이 꽤 좋아하실 거야. 왜냐하면 이 선물이… 널 지켜 줄 거거든.”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루드바하가 말했다.
“저보다 더 강한 힘만이 절 지킬 수 있다고 했어요.”
갑자기 나온 루드바하의 말에 이번엔 칸이 진심으로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하하, 맞아. 아주 잘 알고 있네, 하하하. 너무 귀엽구나, 너.
우리 아기도… 분명 너처럼 사랑스럽겠지?”
조금은 쓸쓸한 그의 뒷말에 어린 루드바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아저씨도 애기 있어요? 몇 살이에요? 그 애기, 저랑 친구해도 돼요?”
루드바하의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 칸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제 막 태어나서 아기야… 하지만 분명 아주 예쁘고… 사랑스럽겠지…….”
그럴 꺼다.
루아나를 닮았을 그 아이는.
율린의 말에 의하면 아이는 그의 머리칼과 눈 색을 닮았다 했다.
하지만 분명 르베나는 루아나의 미소를 닮았을 거다. 그만큼 사랑스럽고 예쁠 거다.
더이상 르베나를 안지 못할 루아나에게 미안해서 차마 아기의 얼굴을 보고 오지도 못 했지만 칸은 르베나의 생각에 금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아저씨… 슬퍼요? 엄마가 슬퍼 보이는 사람은 이렇게 해 주는 거랬는데…….”
제 목을 감싸는 부드럽고 따뜻한 작은 온기에 칸의 얼굴에 이내 슬픈 미소가 번져갔다.
작고 따뜻한 온기.
원래라면 루아나와 함께 느꼈어야 할 그 온기가 지금 그의 곁에는 없다.
하지만 그 순간 전해진 작은 온기는 그에게 또 다른 확신으로 전달되었다.
“그래,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는 너라면 내 선택이 틀리지는 않겠구나, 루드바하. 이제 아저씨가 너한테 선물을 줄 거야. 이 선물은 네가 건강한 성인이 될 수 있게 도와줄 거란다. 그러니 이 선물을 받고 하나만… 약속해 줄래?”
칸의 말에 루드바하가 말했다.
“선물을 받으면 반드시 답례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음… 루드바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요!! 무슨 부탁을 들어드릴까요?”
화아아악-----. 엄청나게 뜨겁고도 따뜻한 느낌.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모든 것을 가차 없이 처단할 듯한 감각.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슬픈 감정.
어린 나이에는 얼핏 깨닫기 힘든 복잡한 마음을 담은 힘이 루드바하의 몸속으로 속절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
슈와아아아악----!
“부디 이 힘으로 내 딸을… 지켜 주렴, 루드바하.”
‘나는… 나는 그녀의 복수를 하러 가야 할 것 같거든. 그러니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때까지만 우리 아이를 부탁해.’
끝내 나오지 못한 말이 칸의 눈에서 눈물이 되어 흘렀다.
그리고 세상은 루아나가 그렇게도 바라던 평화를 맞이하였다.
신마전쟁의 종식이 전례 없는 다섯 살의 세츠, 루드바하의 손에서 비롯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