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78화 (178/276)

178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외전 : 칸 이야기 (1)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와 어느 보석보다 깊고 붉은 눈동자.

카네스터 드 벨모란. 그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란 고대어의 제 이름을 참 좋아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생 어느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은 제게 공기마저 소중하다는 걸 알려준 한 여인을 지독하게 사랑하게 되었다.

타다다닷.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는 카네스터를 본 모든 여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가 멈추었다. 하지만 그는 익숙하다는 듯 또는 관심 없다는 듯 그녀들을 무심히 지나쳐가며 광장에 서 있는 한 여인에게만 제 시선을 고정했다.

“루아나!”

남자의 부름에 시녀를 데리고 서 있던 여자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돌아섰다.

그리고 순간 그녀를 부른 카네스터의 심장도 잠시 멈추어 버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길고 풍성한 머리는 밀 빛을 띠며 부드럽게 허리까지 굴곡져 있었다.

또 세상의 모든 생그러움과 생명력을 간직한 녹안과 보는 순간 카네스터의 심장을 꽈악 조이게 만드는 그녀만의 미소.

카네스터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가는 곧 활짝 웃으며 다가가 번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

“칸!!”

놀란 여자의 비명 같은 외침에 그, 칸이 활짝 웃으며 옅은 풀꽃 내음이 가득한 그녀를 제 품 가득 안았다. 그러자 그녀 곁의 시녀가 말했다. 말을 뱉는 시녀의 얼굴은 온통 찌푸려져 있었다.

“사람들이 이리 많은데 감히 공주님께 뭣 하는 짓입니까!!”

그에게만 들릴 듯 작게 얘기하는 시녀를 슬쩍 본 카네스터가 씨익 웃으며 받아쳤다.

“그럼, 사람 없는 데에선 가능한 거야?”

그의 말에 시녀가 무엇인가를 떠올렸는지 얼굴이 창백해지는 찰나, 역시나.

카네스터는 마력의 잔상만 남긴 채 그녀, 루아나를 데리고 눈 깜짝할 새 사라져 버렸다.

“칸!! 율린을 놀라게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저번에 내가 없어졌다고 율린이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광장의 풍경은 오간 데 없이, 온통 푸른 초원만이 넓게 펼쳐진 곳에서 루아나가 칸을 꾸짖듯 말했다. 그러자 칸이 조금은 민망한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가 아니면 너와 둘만 있을 수가 없잖아.”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기가 죽어 말하는 칸을 보며 루아나의 얼굴에는 어느새 작은 미소가 번져갔다.

툭.

루아나의 작고 고운 손이 칸의 얼굴에 닿았다. 이에 흠칫 놀라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가를 씰룩이는 칸을 보며 루아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율린은 내게 엄마 같은 사람이야. 그녀를 존중해 줘, 칸.”

제멋대로에 자기중심적으로만 산 칸에게 이미 루아나를 존중하고 아낀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었지만 칸은 사랑하는 그녀의 부탁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위해 그가 하지 못하는 일은 오직 하나.

그녀를 떠나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칸은 루아나를 위해 정말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율린은 존중하는 것은 그에 비하면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후 모습을 감췄다 다시 나타난 칸이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루아나에게 말했다.

“율린에게 저녁 식사 전까지 광장에 루아나를 고이 모셔 놓겠다고 했어. 나 잘했어?”

어린아이 같은 칸의 모습에 루아나의 얼굴에도 금방 환한 미소와 웃음이 터져 버렸다.

루아나는 환한 얼굴 그대로 발끝을 들고 칸의 결 좋은 검은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하하, 칸!! 이럴 때 보면 정말 아이같아!! 누가 널 최강의 베이라라고 하겠어?”

환하게 웃는 미소.

싱그러운 향기.

생명력 넘치는 녹안.

언제나 평균보다 조금 높은 체온.

루아나.

칸은 제 앞에서 환히 웃는 그녀를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사랑했다.

그래서,

“칸… 나 아이를 가진 것 같아.”

그의 집, 그의 침대에 누워 조금은 부끄러운 듯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기뻐하며 말하는 루아나를 보며 그는 태어나 처음 기뻐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아나…….”

칸의 큰 손이 루아나의 한 쪽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고는 아직도 닦지 못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조용히 미소짓는 그녀를 제 품 가득 안았다.

아이.

그녀와 그의 아이.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질 듯 기쁘고 감격스러운 존재. 칸의 손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진동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는 그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루아나 역시 칸과 눈을 맞추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렇게 그들의 행복한 시간은 행복과 기쁨, 충만함으로 흘렀다.

루아나는 가끔 신마전쟁이 치열해지는 곳으로 가 부상병들에게 물질적 지원을 하며 그들의 보조적 치유를 도맡고는 했는데, 그 일은 아이를 가진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다.

칸은 자신이 언제나 그녀를 지킬 수 있으니 뜻을 존중했지만, 루아나의 행동을 아주 많이 불안하해는 이는 따로 있었다.

“공주, 아니 아가씨!! 지금은 무리하시면 안 돼요!!

아기님이 계시잖아요.”

루아나에게만 들릴 듯 작게 말하는 시녀, 율린의 말에 루아나가 살며시 웃으며 제 배를 어루만졌다.

“괜찮아. 칸과 나의 아이잖아. 분명 강하고 건강한 아이일 거야…….”

아직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어루만지며 사랑이 가득 담긴 녹안을 빛내는 루아나를 보며 율린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디오니스의 공주이자 일찍 왕비를 잃은 제노스 왕의 유일한 여식. 그런데 그런 루아나 공주님이 결혼도 전에 임신이라니. 제노스 왕께서 아시면 뒤로 넘어갈 일이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현재 제노스 왕의 옆을 지키는 세나르 왕비였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떠올린 율린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때,

“걱정마, 율린. 폐하도 칸이라면 분명… 좋아하실 거야. 우리 아버지잖아…….”

아니나 다를까, 언제나 아랫사람에게 배려가 넘치는 루아나는 걱정스런 율린의 얼굴을 잘 알아채고 먼저 다독였다.

그래서 율린은 그 뒤를 따라오는 수많은 걱정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

루아나 공주의 뒤를 철석같이 따르는 어린 시녀 사나가 매달 오는 손님을 치르지 않는 루아나의 상태를 걱정한다는 것도, 점점 음식을 남기는 그녀의 접시에 왕궁 주방장의 근심이 늘어간다는 것도 말이다.

사랑스러운 공주님, 모든 백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공주님. 그만한 자격이 충분한 공주님.

그리고 그런 공주님의 옆자리를 차지한 베이라.

순간 율린의 눈이 저 멀리 전쟁터를 신나게 휘젓고 다니는 한 인영을 향했다.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여유로운 검붉은 마력.

로브로 얼굴을 꽁꽁 숨겨 놨지만 이미 루아나의 곁에서 그의 마력을 자주 본 율린은 알았다.

카네스터, 그가 벨모린 공작가의 마지막 핏줄이라는 사실을.

디오니스에서 역대 가장 강한 베이라만을 배출했지만 유독 손이 귀했던 벨모린 공작가.

그중 카네스터의 부모였던 공작 부부는 그들의 선조처럼 디오니스를 위해 싸우다 어린 아들만을 둔 채 전사했다. 그들의 힘이라면 분명 살 수 있었을 상황에서 그들은 디오니스의 무력한 병사들을 보호하고 살리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설상가상, 때는 신마전쟁이 가장 치열했기에 어린 칸을 돌봐줄 만한 가문의 어른들이 많지 않았다. 때문일까?

칸은 유독 어릴 때부터 두문불출하며 밖으로 쏘다녔고 시간이 흘러 어느새 거미줄이 성성해진 벨모린 공작가의 마지막 핏줄은 오랫동안 모습을 감추어 사실상 죽었다는 소문만이 왕성했다.

숨겨둔 재산만 해도 디오니스 땅의 절반을 가질 수 있다는 벨모린 공작가.

하여 많은 이들이 밤을 틈타 인적 없는 공작가에 곧잘 숨어들었지만 베이라들의 하늘인 벨모린답게 공작가에 있는 갖가지 마법과 실드로 주인 없는 공작가에 들어간 모두는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벨모린의 마지막 핏줄이라니.

카네스터가 루아나 공주에게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우연히 루아나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본 율린은 놀라 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본디 각 공작가에는 초대왕실에서 하사한 고대의 유물이 하나씩 주어진다. 그리고 그 유물이 끝내 주인을 잃을 경우, 저절로 왕성 비밀스러운 장소에 돌려지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벨모린의 유물은 끝내 그곳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공작을 추대하지 못한 채 벨모린은 방치되었다.

한데 그 목걸이를 루아나 공주가 가지고 있다니.

율린은 부쩍 부른 배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쓰다듬으며 다친 병사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는 루아나 공주를 보며 그녀에겐 들리지 않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가의 핏줄에 저런 힘을 가진 베이라라면 나쁜 조건은 아니고, 우리 공주님을 아주 사랑하는 것도 합격… 아니지, 아니지. 그건 당연한 거지!! 우리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남자도 아니지!! 아무튼 뭐 조건이나 외모 다 봐줄 만한 정도지만 딱 한 가지… 저렇게 전장을 미친놈처럼 휘젓는 걸 보면… 하아…….”

멀리서 날뛰는 칸을 보는 율린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더해지기만 했다.

* * *

어느새 루아나 공주의 배는 만삭이 되어 있었다.

“칸… 정말 같이 가지 않을 거야?”

조금은 서운한 듯 묻는 루아나 공주를 보고 칸이 쓰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말했다시피, 루아나. 요즘 이상한 놈들이 자꾸 날 추적해 오니 이대로는 불안해서 네 곁에 있을 수가 없어. 괜히 출산 도중 일이 생기면 안 되잖아. 그러니 넌 안전한 궁으로 가 있어. 내가 잘 따돌리고 갈게. 우리 아이가 나오기 전까지는 갈 거라고 약속해, 루아나.”

칸의 말에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인 루아나가 가만히 배를 쓸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칸이 정말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루아나의 배에 가만히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빠 갈 때까지 엄마 잘 지키고 있어. 엄마 힘들게 하면 안 된다, 르베나.”

배 속의 아이에게 말을 전한 칸이 이번에는 루아나의 입과 코 그리고 이마에 차례로 정성스레 입을 맞추더니 율린을 바라보았다.

“율린, 루아나와 아이를 잘 지켜줘. 내가 가면 율린 남편감 꼭 구해 줄게.”

여전히 우스갯소리나 던지는 칸을 흘겨보며 율린이 말했다.

“첫 출산이시라 아기님이 언제 나올지 모르니 서두르셔야 해요!! 아셨죠!!!”

율린의 엄포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 칸이 루아나를 한 번 꼬옥 안고는 그들을 배웅했다.

루아나의 머리카락 한 올마저 안 보일 때까지. 그렇게 칸은 디오니스의 궁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몰랐다.

그게 루아나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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