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77화 (177/276)

177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49)

루시드와 아사드가 점점 밀려나며 모두 뒤로 후퇴하라 소리쳤고 젠의 세츠들 중 눈물을 흘리는 자들까지 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눈에 담은 르베나가 제 몸 안에 요동치는 루드바하의 신력을 느끼며 조용히 내뱉었다.

“르베나.”

멈칫.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던 루드바하의 신력들이 아까와 같이 더 격한 움직임으로 르베나의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느낀 르베나가 다시 소리내어 외쳤다.

“르… 베이나.”

오소소.

순간 그의 신력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경직되는 모든 과정이 르베나의 온 신경과 세포들을 통해 예민하게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을 느낀 르베나가 허탈한 듯 잠시의 표정을 지워냈다. 그러고는 다시 맑고 명료한 눈으로 곧 루시드와 아사드를 뚫은 듯 다가서는 치치의 마법을 보며 조금 더 강하게 내뱉었다.

“르… 베이나. 내 앞의 모든 적을… 섬멸하라!”

툭.

르베나가 말을 뱉음과 동시에 르베나의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아를이 놀라 저도 모르게 르베나에게 제 오른손을 가져가 대려는 찰나,

화아아아악------! 르베나의 몸 안에 있던 루드바하의 신력들이 폭사하듯 몸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환했고, 밝았고, 검붉었다.

이 모든 색이 뒤섞인 르베나의 마력이 그녀의 온몸을 통해 폭발적인 마력이 되어 뿜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화아악---!!

르베나의 마력이 앞에서 고군분투중인 루시드와 아사드를 감싸며 그들에게 다가오던 치치의 마법을 스르르 부드럽게 녹여냈다. 그리고 젠의 세츠들과 아벨디온 모두를 감싸며 그들 주위의 모든 어두운 기운 역시 몰아내기 시작했다.

“말, 말도…….”

차마 말도 잇지 못하는 아사드의 하늘색 눈에도 하늘로 치솟는 르베나의 마력이 선명하게 보였다. 끼이이이익---- 르베나의 마력과 격돌한 치치의 마법이 마지막까지 힘을 내며 꺾이지 않으려는 의지가 모두의 귀를 긁듯 들려왔으나 그것에 표정을 찌푸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모두의 눈은 치치의 마법과 격돌하다 이내 모든 걸 뚫고, 파아아악--!!!! 디오니스의 상공으로 강렬히 치솟는 르베나의 마법을 향할 뿐이었다.

오직 단 한 사람, 눈물을 떨어트리는 르베나를 바라보는 아를. (아를을 강조하기 위해 루시드는 삭제했습니다.)

그의 시선만이 르베나에게 머물 뿐이었다.

곧 하늘로 솟아오른 르베나의 마력이 어두운 하늘을 밝게 물들였다.

그리고 여기에 여러 가지의 색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동쪽에서 솟아오른 가스트의 회색 마력, 서쪽에서 솟아오른 제노스 왕의 녹색 마력 그리고 북쪽에서 솟아오른 칸의 검붉은 마력이 모두 하늘로 치솟아 르베나의 마력과 한 데 뒤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위가 조용해졌다.

섬멸된 적의 시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파사삭- 공기 중에 흩날리는 베이라들의 고요한 분노가 디오니스의 온 하늘을 울렸기 때문이다.

화아악--!!!

네 명의 베이라가 쏘아 맞물린 마력의 빛에 디오니스에서 함성이 터져 오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디오니스 만세!!”

“제노스 전하 만세!!”

“르베나 왕녀 전하 만세!!”

“베이라의 별, 가스트 님 만세!!”

디오니스의 모든 백성들이 그들과 그들의 땅을 지켜낸 디오니스의 베이라들을 소리 높여 불렀다.

후두둑.

그리고 목청이 터져라 그들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는 백성들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르베나 님 만세!!!!”

“제노스, 우리의 왕 만세!!!”

울음기가 가득 섞인 목으로 그들은 더욱 소리 높여, 목청껏 불러보았다.

그들의 왕을, 그들의 왕녀를.

그리고 모두가 사라져야 한다고 했던, 그래서 하나둘 자취를 감추어 버린 그림자 속 영광의 그들, 베이라를.

“디오니스 만세!!!!”

“베이라 만세!!!”

어느새 디오니스에 이어 베이라 만세를 외치는 디오니스 백성들의 함성에, 그 함성에 묻힌 수많은 원한과 슬픔에 세츠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수백 년.

우리는 왜 부질없는 싸움을 계속해 왔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정의를 모른다는 베이라들도 결국은 제 땅을 사랑하고 제 사람을 사랑하며 제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인데.

하늘 높이 치솟아 제 땅과 제 백성을 지키려 저렇게 환희 빛을 내는 베이라들의 마력을 누가 감히 정의롭지 못하다 탓할 수 있었을까.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의 존재를 지우려 한 세츠들은 또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는가.

이 모든 생각을 이어가는 세츠들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뜨거운 눈물이 되어 흘렀다.

“보고 있나, 아사드…….”

그리고 또 한 명. 루시드 역시 하늘 높이 솟아올라 어둠을 밝히는 베이라들의 환한 마력을 보며 제 옆의 친구에게 물었다.

“보고… 있네… 꿈은 아니겠지, 루시드.”

조금은 물기 어린 아사드의 대답을 들은 루시드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꿈이 아니야. 신마전쟁이 끝나고 20년, 드디어 베이라들의 불길이 솟아올랐네. 그리고 오늘이… 비로소 신마전쟁이 끝난 진짜 종식의 날이네 …….”

말을 끝낸 루시드의 깊은 벽안이 하늘 높이 떠오른 어느 빛을 향했다. 루드바하의 신력이 섞여 조금은 환히 빛나는 르베나의 마력과 그 주위를 감싸는 검붉은 마력에.

“숨겨진 영웅… 나의 은인 또한 이 세상에 다시 빛을 내는군.”

옆자리에 있는 아사드에겐 들리지 않을 아주 작은 소리가 루시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 *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라웅이 디오니스의 상공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조금 멋있네… 베이라들.”

그의 목소리를 들은 크론과 원 없이 모든 마력을 개방한 제노스의 주름진 눈이 베이라들의 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어떤 광경이 있었다. 세츠들과 힘을 합쳐 누군가를 물리치는 장면이. 그들의 앞에서 당당히 빛을 내는 베이라들의 마력이. 그리고 디오니스의 백성들이 힘차게 그들의 베이라를 부르는 어느 날이. 그들에게는 그랬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폐하.”

그래서 크론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히 제 주군앞에서 먼저 죽음을 얘기했다. 하지만 이를 탓할 주군은 그의 앞에 없었다. 오로지 그의 앞에는 모든 힘을 개방하면서도 조금도 지치지 않은 얼굴로 영원히 기억하고픈 어느 하늘을 녹안 가득 담아내는 한 베이라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크론의 눈과 같이 그 베이라의 눈도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가스트 님.”

남쪽 상공을 물들인 기분 나쁜 힘을 강하고 부드럽게 꺾은 르베나의 마력을 필두로 색색의 마력이 디오니스의 상공을 물들이자 백성들의 환호 소리가 동쪽까지 들려왔다. 이에 놀란 후벤이 조금은 먹먹한 목소리로 상공을 회색으로 물들이는 가스트를 불렀다. 하지만 가스트는 후벤이 단지 이 광경에 대한 감동만으로 자신을 부르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르베나와 너무도 닮은 검붉은 색의 마력. 자신이 보는 저것을 후벤도 익히 보았을 테니.

“예전 신마전쟁 때 붉은 눈의 베이라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네. 마치 산책을 나온 것처럼 불쑥불쑥 전장에 나오곤 했는데 그가 나타나면 세츠들은 먼저 백기부터 들었지.”

여전히 환한 회색의 마력을 상공에 보태며 가스트가 과거의 어느 순간을 헤집듯 말을 이었다.

“디오니스에서도 그를 정식으로 포섭하려 했지만 어떠한 방법을 써도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었네. 단서라고는 오직… 아주 신비스러운 붉은 눈과 그 눈만큼이나… 눈에 띄는 마력… 뿐이었지.”

어쩐지 그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새삼 발견하며 깨달은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떨려왔다.

“그런데 어찌… 잊고 지냈을까. 르베나 왕녀님의 눈이, 마력이… 그 사람과 그토록 닮았다는 사실을 말이야. 시간이 무서운 것인지. 사람의 기억이 무서운 것인지…….”

회한이 어린 가스트의 말에 후벤의 눈 또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디오니스의 상공을 향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르베나와 흡사한 마력을 상공으로 쏘아내는 칸이 루드바하를 보며 물었다.

어느새 상공을 물들인 4개의 마력들은 수십 겹의 실드를 만들어 디오니스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루드바하의 시선이 르베나의 흔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 깊게 빛나는 붉은 눈.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보았던 멋진 사람.

루드바하는 붉어진 눈시울로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이같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족뿐일까요. 이렇게 멋진 마력을… 볼 수 있을 거였다면 좀 더 빨리 무너져 버릴 걸 그랬습니다.”

왠지 투정같이 들리는 그의 말에 한 번 웃어 보인 칸이 하늘에 눈을 고정한 채 작은 소리를 내어 루드바하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어린 날의 그 약속을 지켜 주어서.”

칸의 말을 들은 루드바하의 눈이 잠시 놀란 듯 커졌다가는 이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가 시작한 어느 멋진 상공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수많은 의지와 삶이 빚어내는 눈부신 빛의 향연을 향해.

* * *

먼 훗날의 역사 속 진정한 신마전쟁의 종료를 알린 사건으로 기록되는 <디오니스, 베이라들의 날>.

이날 네 명의 베이라가 쏘아낸 마력의 형상은 디오니스 전체에 수십, 수백 겹의 실드를 씌울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아침이 다가올 때까지도 꺼지지 않았다. 훗날 수많은 베이라들의 자랑스러운 표식이 된 상징.

어둠을 밝히는 진정한 불.

몰락의 길에서 타오른 뜨거운 의지.

화합과 정의의 표징이 된 베이라들의 숨결.

그리고 남쪽의 국경에도 그것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어두웠고 그래서 자신의 모든 걸 다해서라도 밝히고 싶었던 디오니스의 하늘. 그 하늘을 바라보는 어느 눈이 말이다.

그 눈은 하늘을 바라보는 내내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수많은 슬픔과 어둠에서 피어났지만, 그 눈물을 먹고 자란 그녀의 미소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피어났다.

만개한 꽃이 어울리는 계절이 그렇게 성큼 디오니스에 다가오고 있었다.

<검을 든 왕녀, 르베나> 제3장 아벨디온 下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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