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48)
‘신력이… 잠잠해졌다?’
순간 제 몸안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감각에 르베나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런 르베나의 변화를 느낀 건지 엉망이 된 아벨디온과 치치의 마법을 실드로 막아내고 있는 루시드와 아사드, 젠의 세츠들도 조금은 놀란 눈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르베나의 몸에서 사정없이 날뛰던 루드바하의 신력들이 다소 잠잠해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짜증나아아~!!!!!!!”
치치의 비명같은 외침과 동시에 아사드와 루시드, 젠의 세츠들이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치치의 마법이 한층 힘을 더해가고 있었다. 치치의 주된 마법은 오직 공격. 하지만 세츠들의 주된 마법은 방어계열이었다.
물론 루시드와 아사드의 경우 신마전쟁으로 인한 전투경험이 많아 공격마법도 잘 쓰긴 하지만 지금 루시드와 아사드의 힘이 공격으로 바뀌면 젠의 세츠들만으로 그들 자신과 아벨디온을 지키긴 힘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힘인데…….”
루시드의 말에 아사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약으로 인한 순간적인 힘이라 해도 이 정도면 뒤에 있는 르베나 왕녀님이나 루드바하님의 힘에 상응한다고도 볼 수 있겠군.”
아사드의 말에 루시드가 어두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인간의 몰골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치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타깝군,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면 분명 좋은 베이라가 되었을 텐데…….”
순간 루시드의 말이 치치의 귀에 닿은 것인지, 치치의 기세가 형형해지기 시작했다.
“네들이 뭔데 감히… 감히… 나를 평가해!!
나는 이미 훌륭한 마법사야!
나보다 강한 마법사는 몇 없다고!!
빌어먹을 세츠들, 지들이 제일인줄 아는… 빌어먹을 세츠들!!!!
너희 때문에… 너희 때문에 우리 아빠는 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어!
그렇게 숨어살다… 약 한번 못 얻어먹고 외롭게 죽어야 했다고.
다 죽어야해, 세츠들은……! 다 죽어버려야 한다고!!”
순간 치치의 몸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무너지는 치치의 몸 사이사이로 훨씬 어둡고 음습한 힘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녹아내리는 제 짐승같은 모습을 보며 치치가 말했다.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하는 나같은 베이라에게 다가와준 건… 보토니에가 전부였어… 세츠도… 저 디오니스의 왕녀도… 아니었어.
그러니 내 목숨따위… 우리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너희들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
파아아악---!!!
순간 치치의 몸에서 어두운 힘이 폭사하듯 나오더니 그녀의 몸이 빠르게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아사드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직도 저런 힘이……!!! 모든 세츠들은 실드 강화를 최상으로 올린다!!”
아사드의 외침에 모든 세츠들이 긴장하며 다가오는 어둠의 힘에 환한 신력의 실드를 내보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각, 루시드가 갑자기 놀란 듯 먼 북쪽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마력.
순수하고 강인한, 그래서 여느 세츠의 힘보다 따뜻하게만 느껴졌던 베이라의 힘.
북쪽 국경에서 솟아오른 힘을 보며 루시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붉은 눈의 베이라……?”
루시드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온 소리에 옆에 자리한 아사드 역시 놀란 눈으로 북쪽 국경의 하늘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마전쟁 당시 전장을 뒤흔들어 놓았던 단 한명의 베이라.
어디 소속인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가 나타나는 전투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세츠는 거의 없었다.
항상 긴 로브를 뒤집어쓰고 놀러나온 듯 전장을 뛰어다니던 그에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로브 속 언뜻언뜻 스치는 붉은 눈이 전부였다.
당시 모든 세츠가 두려워했고, 모든 베이라가 동경했던 한 사람.
그가 나타나면 세츠의 패배부터 점치게 되었던 한 사람.
나중엔 세츠들마저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베이라.
그 붉은 눈의 베이라는 맘대로 휘젓던 신마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 돌연 모습을 감추었었다.
그래서 르베나의 붉은 눈을 보며 괜히 생각나던, 르베나의 마력을 보며 더 깊이 생각나던, 그 마력이. 지금 이 순간 북쪽의 국경에서 타올랐다.
“말… 도 안돼…….”
한 아벨디온의 중얼거림과 함께 르베나의 놀란 눈도 북쪽의 국경을 향했다.
자신의 것도 너무도 흡사한 검붉은 마력.
하지만 더 단단하고 그래서 더 견고한 마력.
왜인지 그곳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다정함에 자꾸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차오르는 벅참마저 느껴지는 힘.
르베나는 순간 멍하니 제 마력과 빼어닮은 북쪽 하늘의 마력을 보며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 숙여!!!!”
크게 들려온 아를의 말과 함께 세츠들의 실드가 크게 흔들리며 치치의 마법이 파괴적으로 그 틈을 뚫고 들어왔다.
“실드를 강화해!!”
“남은 모든 힘을 실드에!!”
“절대로 물러나선 안됩니다!!”
루시드와 아사드 그리고 모든 세츠들과 아벨디온까지 황급히 눈앞에 다가오는 마법에 집중했다. 하지만 제 생명을 내놓고 덤비는 치치의 마법에 그들은 스스로 조금씩 밀리고 있음을 느끼고 말았다.
조금씩 세츠들의 몸에서도 검붉은 피가 번지기 시작했고 하나 둘 탁하고 어두운 힘에 이기지 못해 각혈을 뱉으며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아사드!!”
루시드의 외침에 아사드가 그와 눈을 맞추고는 동시에 남은 거의 모든 신력을 끄집어냈다.
“신의 올가미!!”
루시드의 외침과 동시에 루시드의 손에서 밝고 환한 올가미가 날아가 치치의 녹아내리는 몸을 붙잡았다.
“신의 사슬!”
다음에 이어진 아사드의 외침과 함께 그 역시 남은 모든 신력으로 크고 단단한 사슬을 만들어 아사드가 잡은 치치의 몸을 둘렀다.
그러고는 루시드가 외쳤다.
“르베나 왕녀!! 서둘러야 합니다!!!
이걸로 저 흑마법사의 폭주를 견디는 건 고작해야 몇 분이니!!!”
하지만 루시드의 외침에도 르베나의 눈은 여전히 북쪽 국경에 머물러있었다.
큰 바람이 두어번 지나갈 쯤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와장차차창!!!!
큰 파열음과 함께 루시드와 아사드가 동시에 뒤로 밀려나갔고 다한과 아를이 이들을 빠르게 뒤에서 받쳐주었다.
“폭주가 시작된다!!”
다한에 의해 뒤로 밀리던 몸을 지지한 아사드가 소리침과 동시에 치치의 몸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어둡고 타락한 힘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그 힘은 죽은 치치의 의지를 전하듯, 제 생명까지 받치며 세츠를 증오하는 치치의 마음을 대변하듯, 생명력에 깃든 힘까지 합쳐져 전에 없던 위력으로 디오니스를 향해 날아왔다.
모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루시드와 아사드가 급히 강한 실드를 쳤으나 역부족임을 알았다.
모든 세츠들의 눈에 처음으로 절망이 감돌았고 아벨디온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으나 바람만 불면 꺼질 듯 약한 검기를 내뿜는 것이 전부였다.
다한과 아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아직도 북쪽 국경만 보고있는 르베나를 향해 달렸다.
멍하니 북쪽국경만 바라보는 르베나는 현재 무방비 상태.
이대로라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사람은 르베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한과 아를이 제게 달려오는 것도 모른채 북쪽에 시선을 고정한 르베나의 머릿속엔 누군가의 말이 생생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거 아십니까, 절대로 꺾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 그것을 고대어로 말하면 ‘르베이나‘가 됩니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며칠 전 자칸으로 향하기 전의 르베나를 붙잡으며 갑자기 생각난 말이라며 전하던 칸의 모습.아직도 환하게 타오르는 북쪽 국경의 검붉은 마력.
“르베나!!!”
“단장님!!”
그때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르베나의 고개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을 향해 돌려졌다.
가까스로 실드를 친 루시드와 아사드, 절망어린 손으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는 젠의 세츠들, 쉽게 꺼질만큼 약한 검기를 낼 힘밖에 없음에도 검을 들고 르베나를 보며 걱정스럽지만 여전히 웃는 얼굴의 아벨디온.
그리고 그런 르베나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오는 아를과 다한의 절박한 얼굴.
“아아…….”
르베나가 참았던 호흡을 작게 내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왼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제 오른손을 땅에 갖다 댔다.
아를과 다한이 저를 향해 뛰어오며 전하는 빠르고도 뜨거운 걸음이 르베나가 손을 올린 땅을 사정없이 울리고 있었다.
앞을 막고 있는 모든 이의 실드 위로 아슬아슬하게 펼쳐진 치치의 생을 다한 마법이 퍼져나가 어느새 르베나의 위로 스멀스멀 번져들고 있었다.
그 마법에 한 쪽 무릎을 꿇은 르베나의 얼굴에 자잘한 생채기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르베나의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르베나에게 다가온 두 사람의 뜨거운 열기가 르베나의 곁을 지켰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이 이 모든 것이 르베나의 눈에 느리게만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은 르베나가 하나 더, 얼굴에 더해진 생채기에 번쩍 눈을 떴다.
아를의 떨리는 금안에 비치는 르베나의 붉은 눈이 어느 때보다 맑고 단단했다.
상공에서는 치치의 마법이 세츠들의 실드를 뚫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텁텁하고 불쾌한 마법의 힘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가 이 순간, 이 바람, 이 공기가 그들 삶의 마지막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