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46)
그리고 조금 전, 치치의 마법이 르베나와 그녀를 제 품에 안은 아를을 강타하는 그 찰나의 순간 모든 보토니에의 마법사들은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제각기 알약을 먹기 시작했다.
우르륵, 끼기기긱.
퍼버버버벅. 끼리끼리끼익.
동시에 4개의 국경에서 모든 르베나 일행이 상대하던 보토니에 마법사들이 한순간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는 건 꽤 힘든 일이었지만 모두는 눈을 감기는 커녕 변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더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각각의 국경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어느새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 * *
남쪽 국경.
촤르르륵!
알약을 먹고 점점 기괴하게 변해가던 케탄이 아사드의 신력사슬을 풀어헤치며 어느새 1.5배는 더 커진 몸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케탄!”
감정을 지우고 그와 싸우기는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던 예전의 케탄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아사드의 기대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결국 보토니에의 알약을 먹고 죽음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케탄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도, 순수하고 정의로운 신력의 힘을 찾아볼 수도 없는 케탄을 보며 아사드가 제 맘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있는 작은 기대감마저 버리며 말했다.
“자네가 원하는 게 정말 이런 거라면…….”
곧 아사드의 몸에서 폭발적인 신력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더 단단하고 강한 신력의 사슬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촤악……!!!
“나도 더 이상은 봐주지 않겠네……!!”
아사드의 외침과 동시에 그의 두 손에서 신력의 사슬이 뻗어나가 기괴하게 변해버린 케탄의 온몸을 꽁꽁 묶기 시작했다. 아사드의 힘에 케탄도 힘에 부치는 듯 이리저리로 몸을 뒤틀기 시작했으나 신력의 사슬을 던진 사람은 모든 세츠들이 선망하는 가문들 중 하나인 율엔 가문의 수장.
그렇기에 케탄의 몸부림은 아사드의 신력사슬을 쉽게 부수지 못했다.
“케탄, 자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신력의 사슬은……!!!!”
파!!
파파팡!!!!
하지만 아사드가 말을 하는 그 순간, 케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어두운 힘들의 집약이 순간 아사드의 사슬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자신의 신력을 보며 아사드의 하늘색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떻게.”
아사드의 입에서 경악에 찬 말이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안광이 형형해진 눈을 한 케탄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쿵.
쿵.
그러고는 곧 보란 듯이 아사드의 신력을 박살낸 케탄이 어두운 힘으로 큰 마법의 구를 만들며 아사드에게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내내 떨리는 눈으로 바라본 아사드의 눈에 약간의 물기가 어렸다.
“케탄, 내 친구, 나의 가신, 나의 가족.
…끝까지 너를 사로잡고 싶었던 내 나약함을 너는 이리 저버리는구나…….”
점점 가까이 달려오는 케탄을 보며 아사드는 이내 안타까운 듯 떨리는 그의 하늘색 눈을 조용히 감았다.
휘이이익---!
아사드의 몸 주위로 아까와는 비교도 안되는 양의 신력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사드에게 다가오던 케탄은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아는지 잠시 자신의 발걸음을 멈칫, 했다가는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어오며 아사드에게 어두운 힘으로 만든 마법의 구를 내던졌다.
“…자네의 어머니는 아직도 그 집에서 자네를 기다리네.”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는 아사드의 말에 케탄의 손이 잠시 움찔하기는 했으나, 그는 자신의 손을 빠져나가는 마법의 구를 멈출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 광분한 채 아사드를 향해 소리칠 따름이었다.
“힘도 없는 가문의 부모 따위, 버린 지 오래다, 이 멍청한 가주 녀석-!! 너도 죽어, 죽어버려---!!!!”
언제나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던 케탄, 어머니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눈을 부치던 케탄.
어머니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며 말갛게 웃던 케탄.
이제는 그 케탄을 보내야 할 시간임을 확인한 아사드의 하늘색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자네가 어둠에 잡아먹히도록 알지 못 한 내 죄를 갚겠네!
자네 어머니에겐 자네가 신마전쟁에서 죽은 것이 확실하다 전할 것이며 오늘……!!!
자네의 유해를 가져가겠네!
…잘 가게, 내 오랜 친구여.”
곧 아사드의 온몸에서 날카로운 신력들이 철퇴의 모양을 한 큰 사슬로 만들어져 달려오는 케탄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그리고 아사드의 힘에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한 마법구가 가까이 다가가자 케탄이 깔깔 웃으며 소리쳤다.
“오늘 유해를 건져갈 건 니가 아니라 나다!!!
율엔 가문의 가주가 아닌, 바로 나! 케탄이란 말이다.”
케탄의 광폭함 외침과 둘의 힘이 한 지점에서 만났다. 그러고는 큰 파열음을 내며 공중에서 부딪히기 시작했다.
퍼버벙-!!!!!!
“그리고 미안하네, 그대를 어둠 속에 혼자 두어.
또 그런 자네를 구하는 방법이 오직 파멸뿐이라.”
아사드의 마지막 말이 조용히 신력의 구슬에 섞여들어 더 환하게 발광하며 케탄의 광폭한 힘과의 마지막 대립을 시작했다.
* * *
아사드와 케탄의 접전과 치치의 마법에 맞서 르베나의 앞을 가로막은 아를 그리고 루드바하의 신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르베나를 보며 루시드가 조금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미친 아들놈께서 더 날뛰기 전에 빨리 우리 며느님을 구해드려야 하는데…….”
세츠가 베이라에게 페어링이라니.
아내가 들으면 여느때와 같은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로 웃으며 우리 루드가 이제 다 컸네, 하겠지만 직접 본 아비로써는 속이 타들어가는 상황에 루시드의 벽안이 르베나와 제 눈앞에서 사나운 짐승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보토니에의 마법사를 번갈아 보았다.
아들 녀석이 몇 년 전 디오니스에 다녀온 후로 루안 공녀와의 소문을 칼같이 자르기 시작하고 모든 약혼과 결혼얘기를 꺼내는 가신들에게 아주 환한 미소를 지을 때부터,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꺼낸 가신들의 가문에 큰 일이 닥쳐 황제의 결혼따위엔 관심갖을 틈도 없이 바빠지는 것을 볼 때부터 무언가 짐작하긴 했었다.
시린 저 녀석의 마음에도 세츠가 품기엔 아주 힘든 꽃씨 하나가 내렸다는 것을.
언제나 정의와 대의가 최우선인 세츠들이 틔우기엔 너무 어려운 사랑의 꽃씨가, 루드의 마음에 내려앉았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꽃씨가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 한 송이 꽃이 되어 있을 줄만 알았지 저 녀석의 마음을 온통 차지할 광활한 꽃밭을 이루었을 줄이야.
페어링은 한번 연결하면 끊기가 어려운 마법인 만큼, 르베나가 크게 다치거나 죽는 것만으로 페어링의 상대인 루드바하 또한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루드바하와의 관계를 떠나 기특하고 예쁘기만 한 디오니스의 왕녀를 도와야 겠다 생각은 했지만 이젠 돕는 것 만으로 부족해졌다. 르베나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 멍청한 제 아들녀석의 삶과 죽음 역시 깊게 얽혀버렸으니.
그렇게 르베나에게 차마 시선을 떼지 못하던 루시드의 앞에 있던 보토니에의 마법사가 어느새 사자의 꼬리같이 돋아난 것에 서서히 어둠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보토니에의 알약.
루드와 아사드에게 듣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모아지는 힘의 크기가 정말 대단했고 그만큼 풍겨오는 기분 나쁘고 불쾌한 힘이 꺼림칙했다.
그리고 그런 힘을 감히 젠 제국 제일의 세츠 가문이자 유파시드의 아버지인 제 앞에서 피워대는 보토니에의 마법사를 보며 루시드의 손에서도 광폭하리만치 넘실거리는 신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걸로 얼른 끝낼까.”
씨익.
화사하게 웃어보인 루시드의 손에서 터져나간 신력이 새롭게 돋아난 보토니에 마법사의 꼬리에서 터져 나온 어둠의 힘과 격돌하기 시작했다.
사랑에 미쳐버린 아들 녀석과 그런 아들 녀석의 마음을 사정없이 모두 훔쳐간 르베나를 위해 20년 만에 폭사되는 젠의 영웅, 루시드의 신력이었다.
서쪽 국경.
“폐하!!!!”
크론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알약을 먹고 흉포한 힘을 내뿜기 시작하는 보토니에의 마법사를 보며 제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약의 힘에 이지마저 삼켜져버린 듯,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제 앞의 모두를 해치우며 다가오는 적을 보며 제노스가 크론에게 말했다.
“크론!!! 아군을 모아 실드를 치게… 그리고 라웅군, 나머지 적의 용병들을 부탁하네.
지금이네!!!”
제노스 왕의 명에 크론이 남은 제 힘을 모두 쏟아 아군에게 실드를 침과 동시에 라웅이 마치 좀 전까지는 장난이었던 것처럼 빠르고 무거운 검으로 남은 적의 용병들을 빠르게 제압해나가기 시작했다.
“젠장!! 멍청한 폐하 같은 이라고!! 사랑에 미친 폐하 같은 이라구!!”
적의 머리를 하나씩 베어낼때마다 루드바하를 욕하는 라웅의 검술과 사나운 눈빛에 적들은 어느새 압도적인 공포를 새기며 죽어갔다. 방금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너간 상당한 양의 신력의 루드바하의 것이란 것 그리고 그게 뭔지는 몰라도 르베나를 위해 그가 상당히 무리하고 있는 거란건 마법의 조예가 없는 라웅이라 할지라도 알았다.
그래서 사랑에 미쳐버린 폐하가 밉고, 그런 폐하를 못 말렸다고 들을 유안의 잔소리가 싫고 그러면서도 멀리 있는 폐하가 걱정되는 마음에 지금 라웅의 검은 모든 힘이 최대치로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단숨에 라웅의 검이 남아있는 모든 적군의 용병을 베어내고 이윽고 겁에 절려 마구잡이로 검을 흔드는 마지막 용병을 베어내며 소리쳤다.
“지금이야, 요! 디오니스의 전하님!!!”
라웅의 외침과 동시에 제노스의 손에서 영롱하고 밝은 녹색의 힘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지가 없어진 보토니에의 마법사가 어두운 힘을 넘실거리며 제노스 왕에게로 뛰어 오기 시작했다.
콰앙……!!!!
녹색과 검은 색, 손녀를 지키고 싶은 할아버지와 힘을 탐하는 마법사 그 둘의 광폭한 힘의 격돌이 디오니스의 서쪽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국경의 상황이 심각한가 봅니다.”
여기저기서 터져오르는 힘의 격돌을 느낀 후벤이 중얼거리며 검으로 다가오는 용병 하나를 베어버리자 가스트가 제 지팡이를 크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후벤, 우리도 멀지 않았네!”
가스트의 말에 후벤이 잠시 르베나가 있는 남쪽을 보더니 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었다.
그러고는 제 휘하의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3분! 3분 안에 남은 모든 용병들을 쓸어낸다!!
동쪽 국경을 지킴으로써 르베나 왕녀님과 제노스 폐하, 그리고 디오니스를 지켜라!!!”
후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후벤의 검이 궤도와 힘을 달리하며 마치 다른 이의 검처럼 돌변해 적군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이에 후벤의 기사단인 1, 2, 3 기사단 역시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좀 더 빠르고 날렵하게, 그리고 급소만을 노려 적군의 용병들을 차례로 베어나갔다.
그리고 약속한 3분이 흘러 마지막 적군의 용병을 베어낸 후벤이 뒤로 돌며 급히 가스트에게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가스트 님!!!“
후벤의 외침과 동시에 가스트의 지팡이가 쿵……!
소리를 내며 지대에 꽂혀들었고 동시에 앞을 향해 나아가며 스치는 모든 땅을 파괴했다.
그렇게 쇄도한 가스트의 힘이 아군을 향해 마지막으로 달려오는 보토니에 마법사의 앞에서 튀어 오르며 크고 난폭한 새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까햑!!!!”
가스트가 만들어낸 새의 형상에 보토니에 마법사의 몸이 충돌하며 순간 보토니에 마법사의 몸에서도 큰 뱀이 만들어져 튀어올랐다.
동쪽 국경.
그곳에서 모든 국경에서 보일정도의 큰 새와 뱀의 격동이 역사의 파동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