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45)
두근두근.
누구의 것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는 심장 소리가 틈 하나 없이 아를의 품에 안겨있는 르베나와 그런 르베나를 놓칠세라 꼬옥 껴안은 아를의 사이에서 깊은 고동으로 전해졌다.
주위의 모든 소리가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의 귀에는 정적만이 감돌았지만, 그 순간조차 여전히 세찬 르베나의 심장고동과 뜨거운 체온을 느낀 아를은 아주 조금 더 꼬옥 르베나를 제 품으로 끌어 안았다.
살아있어서, 버텨주어서, 아직 제 품에 이리 뜨거운 체온으로 있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아를은 속으로 수백, 수천 번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을 감싸며 치치의 마법을 막아내던 루드바하의 신력이 환하게 빛을 내며 서서히 르베나의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조금씩 뜨거웠던 르베나의 체온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그녀답지 않게 힘없는 몸을 오로지 아를에게만 의지해 기대있던 몸에도 서서히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두근두근.
여전히 둘 사이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거세게 들려왔지만 한 사람, 아를의 마음에 휘몰아치던 절박함과 간절함은 어느새 조금은 사라져 있었다.
“르베나…….”
조금은 안심한 듯, 그리고 조금은 안타까운 듯 한 아를의 목소리가 르베나의 귓가에 작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아를의 단단한 품 안에 기대어있던 르베나의 의식 역시 서서히 맑아지고 있었다.
지독한 피곤함과 아찔함이었다.
조금 전 모든 마력을 끌어내는 순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피곤함과 그로 인해 정신이 멀어지는 아찔함은 르베나에게 아주 생소하고 낯선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 걱정할까 굳이 표 내지 않았지만, 이미 르베나의 마력은 이어진 바모린과의 전투를 끝으로 상당 부분 고갈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르베나의 몸으로 조심스레 들어오는 누군가의 힘은 더없이 따뜻했고 다정했으며 조금은 익숙한 안정감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향한 걱정이 담뿍 담겨 있어 그, 루드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신력을 전해왔는지 묻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내 루드의 신력이 르베나의 몸속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 아를. 걱정… 하지 마. 고맙다.”
르베나의 목소리에 아주 조금은 힘이 돌아오는 걸 느낀 아를의 마음속엔 깊은 안도와 함께 왠지 모를 씁쓸함이 생겨났다. 아를 자신도 지금 느끼는 약간의 씁쓸함이 조금은 놀랍고 생소하다 여겨졌다.
그런데 그 순간,
흠칫.
르베나의 몸이 순간 놀라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르베나!”
놀란 아를이 조심스레 르베나의 몸을 제게서 떼어내며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내뱉은 급박한 부름과는 확연히 다른 부드러움이 베어있었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또다시 창백해진 르베나의 얼굴을 보며 아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일이야, 어디가 안 좋아?”
다급히 물어오는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아직도 제 몸속으로 차곡차곡 들어오는 루드의 신력을 느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친… 인간 같으니라고…….”
“…응??”
영문 모를 아를만이 뜻밖에 들려온 르베나의 말에 어리둥절해 있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여전히 아직 멀었다는 듯 제 몸에 켜켜이 들어오는 루드의 신력을 느끼며 그가 단단히 미쳤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이었다.
하지만 서로의 생존을 느끼고, 누군가를 욕할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난데없는 힘의 방해로 제 마법이 파훼되어 버려 잔뜩 화가 난 이, 치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악!!! 짜증 나, 짜증 나!! 저게 뭔데! 저 르베난지 뭔지가 뭔데 다들 못 도와줘 안달이야!!!!
그렇게 돕고 싶어? 그렇게 죽고 싶어? 그러면… 이제 그냥 다 죽어볼까? 응?”
어느새 루드바하의 신력에 밀려나 만신창이가 된 치치에게선 더는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양 쪽 눈이 짐승의 것처럼 벌겋게 충혈 된 채 튀어나온 모습으로 잔뜩 흥분한 치치가 순식간에 2개의 알약을 더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휘이잉---!!!
순간 치치의 몸이 3배가량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까지가 장난이었던 듯, 엄청난 힘이 치치에게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를!!”
르베나가 재빨리 아를에게 피하라는 듯 그를 불렀다. 하지만 아를은 누구보다 빨리 제 안의 모든 검기를 끄집어내 르베나의 앞을 막아서는 것을 택했다.
“아를!!”
아를이 제 앞을 막아서자 르베나가 다급하게 그를 부르며 재촉했다. 하지만 아를은 마치 르베나의 모든 상황을 아는 사람처럼 단단하게 그녀의 앞에 서 몸을 물리지 않았다.
“하아… 젠장!!”
그런 아를을 본 르베나가 저답지 않게 답답함에 짜증을 내었다.
페어링으로 들어온 상대방의 힘을 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그것이 같은 베이라의 힘이라면 말이 조금 달라지겠지만, 세츠인 상대방의 힘을 쓰는 것, 그것은 완전한 불가능 이었다.
평소 루드의 축복 덕에 그의 신력에 익숙해지긴 했으나 단순히 치유와 보호라는 일정부분의 마법을 부여받는 것과 페어링을 통해 들어온 힘을 쓰는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페어링. 영혼과 생명을 약속한 사이에서만 서로의 힘을 무한으로 나눌 수 있는 가장 강대한 힘의 계약. 게다가 강대한 베이라인 그녀가 그녀만큼, 혹은 그녀보다 강대한 세츠인 루드바하의 힘을 받아 쓰는 것은 얼마 없는 가능성의 확률조차 낮춰버렸다.
그럼에도 르베나는 해야만 했다.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포기하면, 그녀가 해내지 못하면 치치의 마법은 그녀의 앞을 막은 아를부터 시작해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은 삼켜 버릴 것임을, 또 치치란 자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치치의 마법을 맞은 르베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의 자세한 상황까지는 모르지만 치치가 알약을 추가로 먹었음에도 빠르게 마법을 구동하지 않는 르베나를 보고 그녀에게 시간이 더 필요하단 사실을 깨달은 아를은 재빨리 르베나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르베나의 앞을 혼자 막아선 아를을 보며 치치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감히 네 까짓 게 내 앞을 막아서면 뭐가 달라져? 기사주제에! 하지만 치치는 용서가 없지, 자비가 없어! 그러니까 죽어!! 죽어버리라고!!”
치치가 괴상한 소리로 고함을 치며 아까만큼이나 큰 마법의 구를 아를과 르베나를 향해 날렸다.
“저건 안 돼!!! 아를 피해!! … 제발!!”
르베나의 조급한 외침을 들으며 다가오는 마법의 세기가 얼마나 큰지를 느꼈지만 아를은 결코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뒤에 네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 피해, 바보야.”
르베나에게만 들릴 듯 작게 말한 아를이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자신의 검기로 치치의 마법을 그대로 받아냈다.
콰광……!!!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 한들 기사인 그 혼자의 힘으로 보토니에 알약을 3개나 먹은 마법사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를!!!!”
아직까지 루드바하의 신력에 휩싸여 이렇다 할 마법을 쓰지 못하는 르베나가 애타는 목소리로 그를 불러 봤지만 아를은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럼에도, 아를이 얼마나 잘 버티고 있는 것인지 치치의 마법은 아직까지 르베나에게로 조금도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르… 베나! 앞으로… 길어야 2분! …크흣.”
순간 들려온 아를의 힘겨운 외침에 르베나의 심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2분.
아무리 아를이라도 검사인 그로써는 치치의 마법은 30초도 버티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2분이라니.
2분이 지나면 아를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 르베나는 떠올리기조차 두려워졌다.
‘제발… 제발!!’
르베나가 간절한 마음으로 제 몸 안에 들어 와있는 루드바하의 신력을 움직이려 노력했다.
치치의 마법에 조금씩 밀려나는 아를을 보는 것만큼이나 조바심이 들고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도대체 얼마나 힘을 퍼부은 건지 아직도 그의 신력은 르베나의 몸 속에 들어오기 위한 순환을 멈추지 않고 있었고 처음으로 깊이 들어온 르베나의 몸 안을 어지럽게 날뛰고 있었다.
“안돼… 안돼, 안돼. 제발!!!”
점점 치치의 마법에 모습이 가려지는 아를을 보며 르베나가 절박하게 소리쳤다.
이대로라면,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라면, 아를이, 순식간에 치치의 마법에 흩어져버릴 것이다!!
르베나의 머릿속에 윙윙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흣!!”
여전히 제 몸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루드의 신력을 르베나가 강제로 움직이려 했지만 그의 신력들은 어림도 없다는 듯 크게 저항하며 여전히 르베나의 몸 속을 채우려 그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점점 기세를 더해가는 치치의 마법에 흐리게 보이던 아를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지기 직전,
“아벨디온! 모두 방어!!”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다한의 기합 서린 목소리와 함께 모든 아벨디온이 검기를 장착한 채 엄청난 속도로 나타나 아를과 르베나의 앞에 일렬로 도열하며 소리쳤다.
“아벨디온 방어!!”
“아벨디온 방어!”
화악--- 순간 르베나의 뺨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하던 치치의 마법이 아벨디온의 강렬한 검기에 막혀 잠시 주춤하기 시작했다.
형형색색 빛나는 그들의 검기, 거센 치치의 마법에도 단 한발자국조차 물러서지 않는 그들의 발, 세차게 떨리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검을 든 그들의 손.
빠르게 나타나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르베나의 앞을 지키는 아벨디온의 모습에 순간, 르베나의 목에 뜨겁고 무거운 덩어리들이 울컥, 울컥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단장!! 저희가 맡던 놈은 젠의 세츠들이 상대해 주고 있어요!”
“그러니 저희가 버틸 게요!! 얼마든지 버틸 게요!!”
“부단도 지킬 게요! 그러니 힘내요, 단장!!”
“세츠들이 그거 되게 힘들다던데 단장은 할 수 있는 거죠?”
“단장은 할 수 있어요!! 저희는 믿습니다아악!”
치치의 강대한 마법에 하나둘, 여기저기가 터지고 선혈이 흐르면서도 아벨디온은 언제나처럼 견고했다. 그리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르베나를 안심시키듯 소리쳤다.
그들의 검기는 어둠으로 물든 치치의 마법 앞에서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들의 든든한 등도 괜찮다, 괜찮다, 끊임없이 르베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조금 서툴러도 괜찮다고.
르베나가 늦으면 늦는만큼, 새로운 어떤 것에 서툴면 서툰 만큼 그 나머지는 그녀의 기사들인 그들이 메꾸어내겠다고.
그들의 팔 다리가 그리고 등이 자꾸만 어둠에 먹혀들어 가도 그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언젠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도 제 품을 다른 이에게 내주었던 그때처럼, 아벨디온은 이번에도 르베나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앞에 섰다.
시큰. 루드의 신력으로 둘러싸인 제 몸을 보는 르베나의 눈에 자꾸만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 걸 아는데 자꾸만 뜨거운 무엇인가가 르베나의 눈가에 고여 흐르기 시작했다.
‘울지 마 울지 마. 써야 돼, 힘을! 그의 힘을!! 루드는 날 믿고 준 거야. 아벨디온도 믿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쓸 수 있어 반드시, 반드시!!’
르베나가 제 볼에 자꾸만 뜨겁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삼켜가며 제 몸 안의 신력들을 천천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어느새 루드의 신력은 르베나의 몸 안에 가득 찼지만 여전히 제 멋대로 이리저리 떠돌며 그녀의 부름을 거부하고 있었다.
“제… 발!!”
그 순간 르베나가 온몸 가득 찬 루드바하의 신력을 일시에 느끼며 언령 마법을 내질렀다.
“르베나!!”
멈칫.
순간 르베나의 언령 마법에 잠시 멈칫하는 듯했던 그의 신력들이 더 거세고 더 난폭하게 그녀의 몸 안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르베나의 심장에 불길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더 크고 강한, 어둠의 기운이 아벨디온의 위로 넘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치치의 마지막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