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71화 (171/276)

171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43)

스르릉.

르베나가 검집에 넣어놨던 검을 천천히 빼어 들었다.

그녀의 양옆에 자리한 루시드와 아사드도 다가오는 보토니에의 마법사들을 보며 아주 오랜만에 그들 몸 안의 신력들을 점검하기 시작했고 아를과 다한도 들고 있는 검에 그들의 색으로 물든 검기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웅- 웅-- 아주 작게 진동하는 아벨디온 모두의 검기가 주위의 김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국경과 제일 가까운 곳에서 아벨디온에 대한 실드를 준비하는 세츠들도 꿀꺽, 긴장하며 겨우 침을 삼켜 냈다.

저벅.

저벅.

어느새 보토니에 마법사들이 르베나 일행과 서로의 얼굴이 보일 만한 거리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적의와 마법은 내비치고 있지 않고 있는 상황.

쾅.

콰광……!

그때, 여기저기 다른 국경들에서 들려오는 전투 소리가 점점 더 그 소리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아직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은 보토니에의 마법사들을 보며 르베나가 먼저 말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싸늘할 만큼 차가운 르베나의 말에 그들의 얼굴을 가릴 만큼 깊게 로브를 뒤집어쓴 보토니에의 마법사 중 하나가 꽤 걸걸한 목소리로 답했다.

“디오니스… 이곳에 우리가 원하는 게 있다. 하지만 무엇인지는… 알려 줄 마음이 없다.”

그의 말에 답을 한 건 아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아. 디오니스에서 나는 돌멩이 하나라도 너희에게 줄 마음은 없으니까.”

여유 있는 무표정으로 내뱉은 아를의 말에 입가만 겨우 보이는 보토니에의 마법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찾아낼 테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마라. 메이슨 공작의 차남……!”

콰광……!!!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를의 검에서 폭발적인 검기가 튀어 나가 보토니에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말을 하다 날아온 갑작스런 공격에 놀랐는지 마법사가 급히 실드를 치긴 했지만 그의 얼굴을 가리던 로브의 끝이 새카맣게 태워져 버렸다.

“너 따위에게 불리라고 있는 메이슨 공작가가 아니다.”

매섭게 날아간 아를의 검기를 본 루시드가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어 옆에 선 아사드에게 말했다.

“호오… 검기라… 얘기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더 멋지고 효율적인 기술이군. 그렇지 않나, 아사드.”

아를의 검기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루시드가 아사드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의 침묵에 의아한 루시드가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엔 경악으로 일그러진 아사드의 얼굴이 있을 뿐이었다.

“…아사드?”

루시드가 다시 그를 부르자 아사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앞을 바라보며 겨우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케… 케탄… 자네가… 자네가 어찌.”

떨려오는 아사드의 목소리에서 나온 이름에 놀란 루시드가 휙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케… 탄…….”

아사드만큼은 아니었지만 루시드 역시 꽤 놀란 듯 그들앞에 자리한 사람을 보고 중얼거렸다.

오래전 신마전쟁에서 실종되었던 그들의 동료, 율엔 가문 휘하의 세츠였던 이, 케탄이 그을린 그의 로브 끝자락을 붙잡고 웃으며 서 있었다.

…20년 전 그가 사라졌던 그때와 똑같은 외모로.

* * *

“한 번에 쓸어 버리기가 힘들게 됐군요.”

달려오는 마법사들과 용병들의 모습에 칸이 조금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텔레포트로 북쪽 국경에 도착하자마자 날아오는 공격을 루드바하는 아주 여유롭게 받아냈다.

문제는 보토니에의 마법사와 함께 달려오는 용병들을 보고 흥분한 아네벨 상회의 용병들이 “감히 우리 르베나 왕녀님의 나라를!!”

“감히 그분이 태어나신 곳을!!”

“우리 여신님의 고향을!!!”

라며 순식간에 달려 나가 아군과 적군이 눈 깜짝할 새 한 데 뒤섞여 버렸다는 것이다.

아주 잠깐의 전투만으로 아네벨 상회의 모두는 르베나에게 흠뻑 매료되어 버렸다.

용병이란 본래 힘의 세기에 따라 위아래가 결정되는 순수한 무력의 단체.

그만큼 그들은 가녀리고 여린 몸으로 혼자 오롯이 하늘에 올라 검으로 번개를 만들어 낸 그녀. 모든 바모린을 한순간에 몰살시킨 르베나를 보며 속으로 단 한 마디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신.

그들 앞에 선 그녀는 검과 마법의 여신이었다.

게다가 주요 인물들이 회의 중일 때 칸과 루안의 과할 만큼의 보호 아래 휴식을 취하던 르베나는 무감각한 얼굴로 일어나 어느새 세츠들과 함께 용병들의 큰 상처들을 치유해 줬다.

굳이 그녀가 하지 않아도 세츠들과 마나포션이 충분한 상황이었을 텐데.

르베나가 남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혼자만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어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걸 모르는 그들은 르베나의 별명 앞에 한 단어를 더 붙여 주었다.

자애의 여신.

그렇게 본인도 모르는 새 검과 마법과 자애의 여신이 되어 버린 르베나를 두고 아네벨 상회의 모든 용병은 거대한 팬덤을 이루게 되었고, 이미 르베나에게 빠진 젠의 세츠들까지 합세 한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칸의 명령이라 따라온 디오니스가 이제는 그들의 여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자 땅이라 생각하니, 그걸 짓밟으러 온 보토니에에게 모두들 아주 많이 화가 난 상태였다.

덕분에 루드바하가 한 번에 밀어버릴 수 있는 적을 일일이 해치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겨 버렸지만.

물론 자칸에서처럼 모두에게 실드를 두르고 적들만 밀어버릴 순 있었지만, 언제 르베나를 도우러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루드바하는 신력을 아끼기로 했다.

하지만,

“르베나 왕녀님을 위해서!!”

“그분의 땅을 지키겠다!!”

“이곳은 아름다운 여신의 땅이란 말이다!!”

따위를 소리치며 제 몸집만 한 바스타드 소드와 삐죽삐죽 날카롭게 돋아있는 철퇴 등을 휘두르는 용병들을 보며 루드바하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다… 밀어버릴까.”

흠칫.

루드바하의 말을 유일하게 알아들은 칸이 잠시 흠칫하다가는 억지로 선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모두 저를 닮아 전투를 유난히 좋아하는 녀석들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하.”

혈기 좋게 검을 휘두르며 보토니에 쪽에 고용된 용병들을 차례로 박살 내는 상회의 용병들을 보며 칸이 조금은 당황스레 웃어 보였다.

그런 칸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루드바하가 마뜩잖다는 듯 가볍게 여기저기로 필요한 공격 마법과 실드를 보내며 물었다.

“한데 저들은 용병이 아닙니까?”

용병은 본래 저들끼리 단체를 구성하고 그때그때 맞는 조건으로 맺은 계약을 대가로 싸우는 이들이다.

그러니 용병들이 평생 어딘가에 속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끔 아주 유능하고 부유한 귀족가에 흡수되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태생이 자유롭고 거침없는 용병들은 귀족가의 귀속을 보통은 견디기 어려워해 이 경우 역시 아주 드물었다.

그러니 아네벨 상회에서 데려온 용병들 역시 칸과 친분이 있을 순 있지만 칸을 닮을 만큼의 친분은 없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여유롭게 싸우는 상회의 용병들을 바라보며 칸이 루드바하에게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현재 존재하는 다이아 등급의 용병조직이…….”

휙, 휘휙!

순간 루드바하와 칸에게 달려든 보토니에의 용병들을 깔끔하게 검을 내질러 해치운 칸이 이어 말했다.

“아네벨 상회에서 훈련시켜 내보낸 자들입니다. 게다가.”

촤, 촤촥!!

다시 덤벼드는 상대편 용병들을 가벼운 몸놀림으로 해치우고 달려온 상회의 용병들에게 맡긴 칸이 제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말했다.

“골드와 플래티늄급의 용병들도 상당 부분이 아네벨의 소속이죠. 다만 대외적으로 이 일을 아는 건 루안뿐입니다. 이젠 루드바하께서도 알게 되셨지만요.”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편안하게 내뱉은 칸의 말에 좀처럼 놀라지 않는 루드바하조차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늄 그리고 다이아. 이 중 다이아몬드 등급의 용병조직은 모든 대륙을 통틀어 오직 1개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이아 등급의 희소성 유지를 위해 다이아 등급을 뺏으려면 그들과 싸워 이겨야 하는데 그럴 경우 용병조직 자체가 전멸하거나 와해되버리는 상황이 잦아 골드와 플래티늄은 함부로 다이아등급의 용병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게다가 다이아 등급의 용병은 웬만한 왕족들도 함부로 고용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은신, 암살뿐만 아니라 대규모 사살 작전에도 유용하기 때문에 그만큼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컸기 때문이다.

특히 다이아 그룹의 경우 대개 베이라와 세츠 모두를 포함한 인원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더욱 희귀했고 웬만한 금액과 조건으로는 일의 의뢰 자체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언제나 얼굴을 가려 누구도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젠에서도 아직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으니 다이아는 젠의 정보통에서도 콧대 높기로 유명한 유안조차 고개를 절레절레할 정도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아네벨 상회에서 훈련시킨 자들이라니… 칸이 가진 재력과 무력이 자신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루드바하는 새삼 다시 알게 되었다.

이번 일이 끝나고 젠으로 돌아가면 아네벨 상회에 대해 유안에게 좀 더 조사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루드바하가 칸에게 물었다.

“하지만 저들 중 다이아로 보이는 이들은 없군요.”

다이아 용병들의 존재를 묻는 루드바하의 은근한 물음에 칸은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여기엔 없습니다...”

콰콰쾅!!!

곧 보토니에와 아네벨 상회가 엉켜 싸우는 공간의 한 가운데 큰 마법의 화구가 떨어지며 순식간에 비워진 공간에 여덟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쏘아진 마법에도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이제 여기에 왔군요.”

루드바하의 말에 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오지 말라 했는데 워낙 저에게 애착이 심한 녀석들이라…….”

조금은 애틋하게, 그리고 조금은 안타까운 듯 이곳에 들어선 8명의 용병을 본 칸의 눈빛을 루드바하가 잠시 자신의 벽안에 담았다.

그리고 그들의 등장과 동시에 보토니에 마법사들과 그들이 고용한 용병들은 빠른 속도로 그 수가 줄어갔다.

다이아 등급의 용병.

웬만한 전장에 내보내도 열 개의 소부대 역할을 한다는 그들이 존재 이후 처음으로 많은 이들 앞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가볍게 몸을 놀려 전장을 휘저으며 보토니에 마법사들과 용병들을 때려잡는 모습에, 모두 얼굴을 가리고는 있지만, 그 와중에 끊임없이 칸을 의식하는 조금은 어린애 같은 모습에, 칸이 다이아 용병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저 녀석들 모두… 최근 그 아이의 존재를 알고 나선 그 아이를 저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기특하고 고마운… 녀석들이죠.”

이어진 칸의 말에, 그리고 여기저기 화려하게 솟아오르는 그들의 마법과 검술에, 그만큼 번져오는 적들의 비릿한 피 냄새와 고통에 찬 비명 소리에, 루드바하가 그답지 않게 조금은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 마음만 얻으면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쾅!!

콰쾅!!!

마치 루드바하의 작은 소리에 격하게 대답하는 듯한 다이아 용병의 베이라가 쏜 마법이 북쪽 국경의 땅을 사정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제 앞으로 날아온 마법을 능숙하게 막아낸 제노스가 순간 멈칫, 하며 멈추어 섰다.

이에 놀란 크론이 얼른 제노스에게 다가오는 보토니에의 용병을 향해 강한 마법을 발동해 그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는 놀라 외쳤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연신 놀라 묻는 시종장 크론의 질문에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싸늘하고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인 제노스가 말했다.

“그런 건 없네, 다만…….”

“다만……?”

처음 본 제노스의 표정에 초조함과 불안함으로 물든 크론이 그의 말을 따라 읊자 제노스가 다음 말을 이었다.

“방금 뭔가 아주 사특한 것이… 나의 아주 귀한 보석을 탐내는 것 같은… 아주아주 기분 나쁘고 불길한 느낌이 들었네. 아주 강하게 말이네…….”

제노스의 말에 크론이 크게 놀라 제 손에 마력을 더욱 강하게 집중하며 결의에 차 말했다.

“그렇다면 더 단단히 공격을 해야겠습니다! 누구도 전하의 보석을 탐낼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하게! 아주 뿌리를 뽑도록… 말입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크론의 손에서 빛난 마력이 큰 구의 형태를 만들어내며 파괴적으로 적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가만히 다이아 용병들의 무위를 지켜보던 루드바하는 알 수 없는 오싹함에 한 번 더 시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그런 루드바하를 보고 귀엽다는 듯 웃던 칸과 혼자 조용히 용병들을 노려보던 루드바하가 동시에 눈빛이 매섭게 돌변하며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북쪽 국경에 있던 루안과 싸우고 있던 수많은 용병들 역시 순간 흠칫, 하며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아악---!!

보기만 해도 불길한 보토니에의 마력이 국경을 모두 집어삼킬 것처럼 부풀어 올라 팽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르베나.”

“…르… 베나… 님.”

루드바하와 칸의 입에서 차마 속에 담아두지 못한 누군가의 이름이 떨림을 타고 흘러나왔다.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눈가에서 흩날리는 은빛의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석양이 어느새 어둠에 잠식되어 가며 이 순간 미치도록 보고 싶은 그녀를 그려냈다.

매캐하게만 느껴지는 주변의 공기조차 이 순간만은 그녀에게서만 나던 어느 향기로 변해 전해졌다.

곧 차분하게 숨을 내어 쉰 루드바하가 조용히 눈을 감자 곧 그의 몸에서 어둠을 밝힐 만큼 찬란하고 환한 빛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남쪽 국경.

르베나가 있는 그곳에서 강하게 터져 나온 보토니에의 불길한 힘을 향해 루드바하의 빛이 조금씩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닿고 싶은 그녀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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