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42)
바모린이 모두 전멸하고 나서도 공간의 사위를 감싼 적막은 한동안 깨지지 않았다.
어째서 모두가 그녀를 ‘최강의 베이라’, ‘왕관을 버린 왕녀’, ‘세기의 베이라’ 따위로 부르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세계 최강… 아니야?”
얼이 빠진 듯한 라웅의 말에 대답이 들려온 것은 예상치 못한 곳이었지만.
“그건 좀 서운한데, 라웅.”
기분 좋은 미풍,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 모든 세츠들이 안정을 찾으며 자연스레 그들의 소비된 힘을 채워 주는 강인한 신력.
“유파시드께 영광을.”
“유파시드께 영광을.”
어느 세츠의 인사를 선두로 수백의 세츠들이 그들의 왕을 반기며 무릎을 꿇어 인사를 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여느 때와 같이 그림으로는 그릴 수 있을까 싶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루드바하가 말했다.
“전장에서 그런 인사는 필요 없다 했을 텐데요.
모두 일어나세요.”
루드바하의 말에 세츠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라웅이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달려들어 외쳤다.
“아니, 이 폐하야! 유안한테 진짜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고 그래! 젠에 몬스터 왔다고 할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디오니스에 와서 대규모 실드라니!! 디오니스가 폐하 나라야, 응? 폐하가 디오니스 황제냐고! 대답 좀 해 보라고!!”
왕왕대며 큰 소리로 따져 묻는 라웅의 목소리가 시끄러울 만도 하건만 익숙하다는 듯 라웅의 이마를 조용히 오른손으로 밀어 버린 루드바하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국경 쪽으로 다가오는 르베나에게 환하게 미소 지으며 걸어갔다.
하지만 그 미소도 잠시,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곧 그늘진 염려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벌써 이틀째 쉬지 않고 힘을 쓴 르베나의 얼굴이 부쩍 수척해 보였던 것이다.
켄느에서 오전 일찍부터 오후가 늦도록 보토니에 마법사를 상대하고 곧바로 칸에게로 넘어와 아주 짧은 휴식을 취한 후, 곧바로 자칸으로 향한 르베나.
그 전에 딱히 힘을 쓸 일이 없던 루드바하와는 달리 이미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소비한 르베나는 자칸에선 더 큰 힘을 쓰며 밤이 새도록 마법을 쓰고 검을 썼다.
그때 이미 피로가 상당했을 텐데 곧바로 디오니스로 달려와 또 큰 힘을 쓰다니… 비록 이번에는 팅의 도움으로 큰 힘을 안 쓴 것처럼 보이지만 세밀한 마력의 콘트롤은 여느 큰 힘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것보다 더 큰 기력이 소진됨을 루드바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덧 석양이 져가는 늦은 오후.
조금씩 드리우는 어둠이 하늘을 사뿐히 밝아가는 가운데에서도 유독 얼굴이 창백한 르베나를 보는 그의 마음이 저릿했다.
“르베나. 너무 오래 마법을 쓰면 몸이 상합니다. 부디… 그대의 몸을 아껴 주십시오.”
간절하고도 애틋한 말.
여전히 미소를 드리우고는 있지만 다가오는 석양처럼 걱정으로 상기된 얼굴.
루드바하의 얼굴을 차분히 응시한 르베나가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루드라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기 있는 보토니에의 마법사들. 그들 중 실력이 꽤 강한 이도 섞였다는 것을. 게다가… 왕궁에서 가까운 이곳 서 국경뿐만 아니라 동쪽이나 남, 북의 국경에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인원을 차출해야 합니다. 디오니스가 완전히 안전해질 때까지… 휴식은 안 됩니다. 적어도 저는 말입니다…….”
창백한 얼굴에도 흔들림 없이 빛나는 르베나의 붉은 눈. 언제나 모든 휴식에서 저만을 제외하는 묵직한 책임감.
‘도대체 그녀의 어깨에는 내가 모르는 얼마나 많은 책임과 무게가 실려 있는 걸까…….’
잠시 르베나를 보던 루드바하가 저답지 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당당한 그녀가, 어린 나이부터 다른 사람의 생명과 정의를 목숨처럼 책임지던 그녀가.
참 좋았는데.
때로는 안쓰럽고 안아주고 싶게 여려 보여도 당당히 제 길을 걸어 나가는 그녀를 마음에 담았는데.
어째서 이제는 앞만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그 눈이, 많은 이를 짊어진 그녀의 어깨가, 조금도 스스로에게 휴식을 허락지 않는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미워지는 걸까.
여전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르베나를 보고 루드바하는 항복한다는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그대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눠 질 수 있는 이가… 생기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게 나이기를.’
조금은 욕심 같은 바람을 내비치며 루드바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말리지 못한다면 굳이 그녀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은 저가 대신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마침 르베나 마법의 여파로 보토니에의 마법사들은 모습을 감추었고 이에 루드바하는 젠의 세츠들에게 아직 남은 4명의 보토니에 마법사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일렀다.
아직 그 마법사들을 치기 전,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루드바하는 곧 미리 일러둔 대로 가스트의 텔레포트로 이동해 온 후벤과 제노스, 크론을 위시하여 아벨디온과 함께 작전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아를과 제노스 그리고 가스트와 후벤의 만류로 르베나는 칸과 루안의 조금은 부담스러운 마나 포션과 도대체 이 상황에 어떻게 가져왔을지 모를 그레이풀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디오니스에만 공격이 집중되고 있다.
일반 몬스터뿐만 아니라 보기 힘든 바모린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마법사들까지.
‘보토니에’에서 무얼 위해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 4명의 마법사들과의 격돌 중 다른 국경이 뚫리면 수습이 어려우므로 모두는 서둘러 인원을 분산 배치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네벨 상회의 절반과 칸과 루안이 지금의 국경과 정반대인 북쪽의 국경을, 나머지 아네벨 상회의 나머지와 제노스 왕, 크론, 라웅이 서쪽의 국경을, 그리고 후벤을 위시한 디오니스의 1, 2, 3 기사단과 가스트가 동쪽의 국경을 맡기로 하였다.
젠의 세츠들과 율엔 가문의 마법사들 역시 균등하게 각각의 국경으로 갈라지기로 했고 르베나와 아벨디온 전원이 4명의 보토니에 마법사와 격돌할 남쪽의 국경에만 집중하고 혹시나 모를 상황에서 아벨디온을 수호할 마법사들이 추가로 조금 남기로 했다.
“저도 함께 이곳에 남겠습니다.”
아주 짧은 회의의 끝 무렵 던져진 루드바하의 말에 공간에는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니, 폐하. 최강의 베이라와 최강의 세츠가 한 곳에 있다니. 지금 힘의 균형이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젠의 황제로서 그게 진짜 맞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 줘.”
모두가 할 말을 대신한 라웅에게 일행이 처음으로 마음속에서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남쪽의 국경에는 적들이 포진해 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는 만큼 루드바하와 르베나가 한 곳에 있는 건 힘의 균형이 너무 치우친 배치였기 때문이다.
라웅의 말을 들은 루드바하가 아주 약간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일단 ‘보토니에’의 마법사와 당장 격돌해야 하는 건 남쪽 국경이고… 나는 이동이 가능하니 이곳에 있다 어느 한 곳이 위험하면 바로 그곳으로 가면 되지 않나…….”
그의 억지 같은 투정에 이번엔 칸이 웃으며 그를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루드바하 님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디오니스의 다른 국경에 루드바하 님께서 있어야 르베나 님이 더 마음을 놓고 싸우시지 않겠습니까? 저 ‘보토니에’ 마법사들이 석연치 않아 걱정하신다면… 더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만…….”
칸의 마지막 말에 물음표를 그린 모두의 눈이 그에게로 향하자 칸이 웃으며 어느 허공의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곧 그가 바라본 허공이 일렁이며 의외의 인물들이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의 등장에 제일 당황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루드바하였다.
“아, 아니 아버지… 이게 무슨……!”
라웅조차 조금은 당황한 그의 등장에, 또 루드바하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란 호칭에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버… 지……? 유파시드 님께서 지금 아버지라고 부르시… 헉!!”
한 세츠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더욱 놀란 눈으로 허공에서 나타난 이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루드바하의 입에서 나온 호칭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복사 수준 아닌가…….”
아벨디온 중 어느 한 기사의 말에 누구도 반박의 의견을 내지 못했다. 금빛이 언뜻언뜻 섞인 루드바하보다 더 순 은빛에 가까운 머릿결과 깊고 시린 벽안.
루드바하의 시간을 약 10년쯤 후로 돌린 것 같은.
하지만 말이 10년이지 솔직히 지금 어디를 걸어 다녀도 20, 30대 로 보일 빛나는 외모의 세츠가 조금은 오래된 흰 정복을 입고 웃으며 나타났기 때문이다.
“…웃는… 것… 까지 똑같다니… 소름돋아.”
룬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내적 동의를 적극적으로 내비치고 있는 찰나, 그의 옆에 함께 나타난 이가 웃으며 말했다.
“거 보게! 내 말이 맞지 않은가! 베이라와 세츠, 성기사들과 아벨디온의 만남이래도!”
활기차게 웃으며 루드바하의 아버지, 루시드에게 말을 건넨 이는 다름 아닌 아사드였다.
둘의 등장, 특히 이미 면식이 있고 아직은 바쁠 아사드의 등장에 놀란 르베나가 그녀답지 않게 조금은 의외라는 듯 그에게 물어왔다.
“아사드 님…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켄느의 일은 잘 정리가 되신 겁니까?”
그리고 르베나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두 명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가 빠르게 박혔다.
아사드의 물빛 눈동자와 그보다 훨씬 진하고 깊은 벽안의 눈동자.
“혹… 디오니스의 왕녀 전하이자 아벨디온의 단장, 르베나 드 디오니스 되십니까?”
질문은 아사드에게 향했지만 답은 그 옆의 루시드에게 들려왔다.
분명 루드바하와 비슷하거나 조금은 더 짙은 벽안의 눈이건만. 호의 어린 호기심을 가득 실어 바라보는, 나이답지 않게 조금은 천진한 그의 눈빛에 르베나는 갑자기 조금은 생소한 부담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녀답게 흔들림 없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디오니스의 왕녀이자 아벨디온의 단장을 맡고있는 르베나 드 디오니스라 합니다. 존귀한 유파시드의 아버님께 정중한 인사를 올립니다.”
인사와 함께 자기보다 높거나 존중하는 사람에 대한 인사로 검을 쓰는 오른팔을 자신의 심장에 갖다 대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르베나가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고 세상이 환해질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 루시드가 말했다.
“반갑습니다, 르베나. 얼마나 그대를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를 겁니다. 실제로 보니 아들 녀석이 왜 그렇게 자주 피식대며 웃었는……!”
“아, 버, 지…….”
그가 말하는 도중 한 음절 한 음절 그를 부르는 루드바하의 목소리에 루시드가 깜짝 놀라며 급히 환한 웃음으로 마지막 말을 대신했다.
아들 녀석이라면… 루드바하. 왜 자신의 소개에 그의 이야기가 나오는지 조금은 갸우뚱한 르베나에게 금안을 시리게 굳힌 아를이 나와 눈을 맞추며 차분히 얘기했다.
“신경 쓰지 마. 너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 아마 그런 의미로 하신 말일 거야.”
루드바하와 루시드를 시리게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다정하게 르베나를 세뇌시키는 아를을 보며 르베나는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루시드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 아드님 경쟁 상대가 결코 만만치 않구나. 쯧쯧.”
루시드의 혼잣말이 분명했지만 결코 작지 않은 그 소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몸을 움찔, 부르르 떨었다.
“유파시드와 완전 똑같이 생겨서 성격이 너무 다르셔! 볼 때마다 신기해. 음! 정말 신기신기!! 얼굴만 복제라니!!”
라웅에게 눈치가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순간 “음!”, “크흠!” 하는 소리와 함께 제노스 왕과 칸이 갑자기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다가는 겹쳐진 반응에 조금은 놀라 서로를 바라보다 멋쩍어했다.
이를 본 루시드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다가가기 위한 산은 또 높고 험준하구나… 불쌍한 우리 루드…….”
이어진 루시드의 말에 루드바하가 안절부절못하며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르베나는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고 다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갑자기 펼쳐진 상황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얼굴은 같지만 성격은… 아주 많이… 다르시구나.”
이어 작게 중얼거리는 룬의 말에 모두가 신기한 마음으로 외모만 똑 닮은 부자를 바라보았다.
돌아가던 상황을 웃으며 보고 있던 아사드가 이제 화제 전환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활짝 웃으며 아를이 자신의 뒤로 은근히 숨겨 버린 르베나에게 답했다.
“르베나 왕녀님 덕분에 켄느의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정리가 되자마자 아사벨과 호안이 어서 디오니스로 가라 어찌나 성화이던지… 나 원… 녀석들 등쌀에 얼른 오려다 옛날 생각이 나 루시드도 불러오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군요.”
아사드의 말에 르베나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만 르베나는 내심 굉장한 부담을 느껴 알맞은 대답을 선뜻 하기가 힘들었다.
아사드와의 대화 내내 싱긋싱긋 웃으며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루시드 때문에.
자라면서 사나와 후벤 그리고 가스트를 제외하고는 그녀를 보자마자 호의를 내비친 어른은 없었다.
그래서 르베나는 저를 향해 계속해서 무한한 호의의 눈빛을 보내는, 루드와 꼭 닮은 그가 아주 많이 낯설고 생소하고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다행인지 곧 빠르게 그를 제지하는 이가 나타나 그와 르베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제발 그만 좀 보십시오, 르베나가 당황해합니다. 게다가, 하아… 이곳엔 도대체 무슨 일로 오신겁니까?”
앞에 말은 루시드만 들리게, 그리고 뒷말은 모두가 들을 만큼.
난처한 기색을 채 숨기지 못하고 그답지 않게 예의 바른 미소까지 벗어던진 루드바하의 조금은 낯선 모습에 이번엔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가 박혔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 누군가를 가차 없이 베어 버리는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는 젠의 황제의 미소를 벗겨내는 사람이라니.
하지만 아들의 그런 모습조차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루시드가 겨우내 르베나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용건을 말했다.
“아사드가 우리의 꿈이 실현되었다기에 와 보았습니다, 유파시드 님. 그리고 얼핏 들으니 남쪽 국경의 배치로 의견이 분분한 듯한데 이곳은 저와 아사드가 르베나 왕녀님과 함께 할 테니 유파시드께선 다른 이들의 의견처럼 북쪽으로 가시지요.”
루시드의 말이 끝나자 남은 건 아주 소란스러운 정적이었다.
감히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던 루드바하를 드디어 제지할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에 대한 누군가의 안도, 여전히 루드바하와 너무나 닮은 얼굴로 그와는 전혀 다른 진짜 미소를 지으며 호탕하고 넉살스러운 두 부자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생소함과 당황스러움, 또 이 모든 일이 고작 수프를 한 그릇쯤 먹을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나 아직도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누군가의 다급함.
이 모든 소란스러움이 짧고 굵직한 정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 정적이 길어지기도 전, 4명의 보토니에 마법사들을 주시하던 한 세츠가 다급하게 말했다.
“각각의 국경에서 현재 마법의 흐름이 심상치 않습니다! 모두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세츠의 말에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두의 표정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벼려지기 시작했다.
와중에 짓던 미소를 깨끗이 지우고 날카로운 벽안을 빛내는 루시드의 절제된 신력과 아사드의 여유롭게 벼려진 신력에 르베나는 잠시 같은 마법사로써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각각의 국경에 새롭게 나타난 마법의 기운을 감지한 모두가 각각의 국경으로 배치된 마법사들과 서둘러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루드바하는 잠시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루시드를 보았다가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르베나가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하아… 르베나. 아버님이 무슨 소리를 하셔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십시오.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분이시니 제발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듣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그답지 않은 부탁에 르베나가 조금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루드바하가 곧 안도하는 듯 환하게 웃으며 르베나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축복하며 말했다.
“절대 다치지 마십시오. 그대에게 문제가 생기면 다른 국경 같은 건 내버려 두고 바로 이곳으로 와 버릴 테니…….”
갑작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러운 그의 축복과 조금은 그답지 않은 말에 르베나가 조금은 당황해 이마를 어루만지자 루드바하가 은근히 그를 재촉하는 칸과 함께 남쪽 국경에서 제일 먼 북쪽 국경으로 텔레포트를 이용해 이동했다.
아를은 매우 못마땅하다는 듯 르베나의 이마에 닿을 듯 닿지 않은 루드바하의 입술을 노려봤지만, 유파시드의 축복이 꽤 도움이 된다는 걸 잘 알기에 애써 화를 삭이는 듯 보였다.
그리고 모두가 각각의 국경으로 도착하자마자, 모든 국경에서 마법과 병장기가 격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저 멀리 모습을 감추었던 네 명의 마법사들도 슬슬 이쪽으로 다가오며 기분 나쁜 힘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르베나 왕녀님.”
감쪽같이 콘트롤하던 신력의 자락을 서서히 드러내는 루시드의 인사와,
“소싯적 솜씨가 남아있나 볼까, 루시드?”
그런 루시드에게 질세라 깨끗한 신력을 드러내는 아사드의 도발로 남쪽 국경에는 또다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루시드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아를도 어느새 눈빛을 바꾸어 검을 꺼내 들며 르베나의 옆에 자리했고 역시나 르베나의 옆에 선 다한의 뒤로 수십의 아벨디온이 자리했다.
디오니스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격돌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