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69화 (169/276)

169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41)

휘잉- 어느새 사막처럼 변해 버린 디오니스의 국경에 아주 조금은 추위를 누그러트린 이른 봄날의 찬바람이 불어 왔다.

풍겨 오는 피비린내와 싸우는 이들의 쉴 새 없는 병장기 소리, 그리고 여기저기 공중으로 폭사하는 마법의 굉음들은 여전했지만 그곳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달라졌다.’

르베나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모두의 검을 잡은 손가락 끝에서, 마법의 힘이 광폭하게 터져나가는 손바닥에서 또 누군가를 치유하려 들고 있는 값싼 천 쪼가리에서도 같은 색의 바람이 희망을 타고 불어옴을.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어.’

‘바모린을 물리칠 수 있다.’

그 바람이 그들에게 닿아 왔음을 이제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명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이미 디오니스의 백성들과 아벨디온의 눈에는 전에 없던 승리감이 엿보이기 시작했고 아네벨 상회의 모두와 젠에서 온 모두 역시 같은 기분에 조금씩 고취되어 갔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들려온 르베나의 목소리에, 그리고 아벨디온을 위협하려 둥글게 모여든 바모린들을 베어내는 그녀의 검날에, 또 사위를 날카롭게 흩날리는 검붉은 마력에 아주 잠시 힘을 뺐던 모두가 처음처럼, 아니 그보다 더 강하게 그들의 검을 움켜쥐었고 폭사하는 마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르베나의 붉은 마력과 검은 어느새 유연하고도 날카롭게 또 때로는 무거운 철퇴가 되어 감히 디오니스의 백성들과 아벨디온을 감싸고 날개를 편 모든 바모린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다른 기사들에게 백성들의 곁을 떠나지 말라 당부한 아를과 다한 경이 르베나와 합세하자 모두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만 같이 거대하게만 보이던 바모린들은 어느새 모두 죽어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벨디온과 디오니스의 백성들 주위에 있던 바모린들 에게만 해당된 것.

여전히 국경 안, 디오니스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절규는, 또 국경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는 불행히도 그 위세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디노니스의 백성 하나가 그들 주위의 바모린을 물리치고 다가온 르베나에게 말했다.

“왕녀 전하. 디오니스의 국경 안으로도 저 몬스터들이 침입했습니다.

살고자 도망 쳐나온 제가 할 걱정은 아니지만… 그들은… 괜찮겠습니까?”

방금 전 그 끔찍한 상황 속에 있었음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침착해 보이는 남자. 살고자 도망쳐 나왔다고 하기엔 아마도 마을 주민 모두를 통솔하며 이끌고 나온 것으로 보인 남자.

그를 잠시 르베나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르베나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모두의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이름이… 뭐지?”

예상치 못한 르베나의 물음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아벨디온과 다른 모든 이들이었다.

지금이 한가하게 상대방의 이름을 물을만한 상황도, 또 르베나가 그런걸 궁금해할 성격도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르베나에게 국경 안의 일을 전하던 선하고 바르게 생긴 청년은 망설임 없이 제 이름을 전했다.

“루센… 루센이라 합니다. 왕녀 전하.”

- 언제나 폐하께서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고 나면 저희는 물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냐고.

- 그리고 폐하가 떠나시고 난 뒤 저희가 물으면 그분들은 항상 답했습니다. 언젠가 저희들의 힘을 필요로 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저희 모두가 폐하를 지켜달라고!!

- 저희는 그때의 약속을 지킬 뿐입니다!!

이제는 조금 먼 그날의 기억 속.

그녀를 위해 확성기를 들고 백성들과 함께 왔던 이.

어설픈 자세로 든 나약한 농기를 든 손이 눈에 띄게 떨려 와도 결코 잡은 그의 무기를 절대 놓지 않던 이.

그랬기 때문에… 사실은 나약하고 오만한 왕이었음에도 그녀가 그들의 군주라 믿은 그 순수함에, 동정하듯 베풀었던 작은 어느 순간도 평생을 보은하리라 다짐했던 그 충성스러움에.

흐느끼며 그만하라 외친 르베나의 마지막 울음에조차 순박한 미소로 보답하며 잡은 농기구를 휘두른 만큼 다치고. 그보다 많은 피를 흘리다 결국 그녀의 앞에서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었던 이.

“루… 센…….”

르베나의 입에서 차마 담지 못할 수많은 감정들이 단 한마디, 그의 이름 사이사이에 무겁고도 단단히 얽힌 채 뱉어졌다.

“네… 네?”

르베나가 제 이름을 다시 부를 줄은 몰랐던지 놀라는 루센의 모습에 르베나가 곧 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같은 얼굴로 웃으며 힘겹게 말했다.

“그대는 아직도… 농기구… 를 무기처럼… 들고 있군…….”

뜻 모를 르베나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럼에도 루센은 제 앞에서 곧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르베나의 웃음이 아팠다.

분명 미소가 맞는데 왜 그게 제 눈에는 눈물로만 보이는지.

아무리 디오니스의 자랑이라 해도 가까이에서는 처음 본 왕녀님의 웃음이 왜 이렇게도 가슴 아픈 일인지… 루센은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런 루센을 보며 르베나가 휙 뒤로 돌아 금세 감정을 추스르고는 말했다.

“국경 안쪽은 걱정하지 마라. 제국 최강의 실드가… 그곳에 있으니.”

르베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모린들이 떠 있는 디오니스 국경 안에서 새로운 빛이 모습을 나타냈다. 상공의 아래쪽으로부터 환한 빛이 폭사하듯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빛에 맞은 바모린들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이리 저리로 날개를 휘적이다 쿵쿵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국경 안에서,

“떨어진 바모린의 목을 베어라!!”

“후벤 경의 명을 따라 모두 백성들을 보호하며 바모린을 쳐라!!”

큰 확성기를 통해 후벤과 그를 따르는 왕궁 기사들의 소리가 전해져왔다.

묻지 않아도, 궁금해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제국 최강의 실드가 누구인지.

게다가 단 한 명의 투덜거림이 그의 존재를 더욱 명확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아니, 저놈의 폐하가 젠에 실드 좀 치라고 할 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남의 나라에 저럴 일인가… 사랑이 무서워… 이래서 사랑에 나라도 판다고… 어쩌고 저쩌고…….”

여전히 바모린을 향해 무거운 검을 휘두르면서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라웅의 말에 이 상황에서도 여기저기서 풋. 하는 웃음소리들이 터져나왔다.

르베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루센을 한번 보고는 아를과 다한 경을 보았다.

옷을 보면 엉망인데 그들의 몸 안에서 미약한 신력이 느껴졌고 또 멀리서 즐겁게 바모린을 베어가는 칸을 보니 대충 상황이 파악되었다.

르베나의 걱정을 눈치챈 아를 역시 그녀의 생각을 거들었다.

“마나 포션을 다들 배 터지게 먹었어. 그러니 걱정 마. 랄프하고 바리타, 마른이 바모린 독에 당하긴 했지만 여기저기 많은 게 세츠이니 부탁하면 돼. 그러니 넌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오히려… 미안하다, 르베나.”

르베나가 걱정할 만한 모든 상황을 정확히 집으면서도 결국 르베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게 미안한 듯 그답지 않게 아를이 조금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아를을 본 르베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를 너와 다한 경. 그리고 아벨디온이 있기에 내가 자칸의 일을 잘 마무리 하고 올 수 있었음을… 모르진 않겠지? 그리고 아를. 바흐란 왕자를 찾았다. 상처가 깊긴 했지만 훌륭한 치유세츠들이 붙었으니 그는 무사할 거다. 그러니…….”

르베나의 말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든 아를이 이 상황에 기쁨을 겉으로 표현하기는 싫었는지 제 주먹을 꽈악 쥐고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는 더 잘해야겠네, 그 녀석보다.”

아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가 다한 경과도 한 차례 눈을 맞추고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모두를 보고는 말했다.

마법으로 확장한 목소리는 싸우고 있는 모두에게 바로 옆에서 들리게끔 하는 힘을 지녔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 그 부름에,

“아벨디온.”

르베나를 보고 하나둘 다가오던 바모린을 보며 충전완료를 외치던 아벨디온도,

“디오니스.”

자신들을 보호하려 틈 없이 둘러싼 아벨디온에게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고자 어설픈 부엌기구들이나 농기구 따위를 집어 들던 백성들도,

“아네벨 상회.”

바모린과 전투를 벌이며 어느새 크고 작은 부상들을 가득 몸에 아로새긴 아네벨의 용병들과 그들을 위시한 칸과 루안도.

“젠의 단장과 세츠.”

여전히 루드바하를 욕하며 바모린을 상대하던 라웅과 멀리 있는 네 명의 보토니에 마법사들을 상대하고 공중의 바모린들을 저격하던 수백의 세츠들도.

하나같이 그들을 부른 르베나에게로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눈앞의 적을 두고 함부로 시선을 돌리지는 못하나 그들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 높지도 낮지도 않은, 하지만 절대로 저항할 수 없는 이끌림으로 그들을 부르는 압도적인 매료에. 모두의 귀와 신경이 그녀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누구든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말을 그녀가 했기때문이다.

“제가 신호하면 모두 뒤돌아 뛰십시오. 조금도, 잠시도 망설이지 말고 뛰십시오. 단 한 명도 뒤쳐져서는 안 됩니다. 옆의 부상자는 지금부터 신경 쓰고 챙기십시오.”

르베나의 말에 전장에 한차례 의미 모를 침묵이 휩쓸었다.

…이 상황에? 바모린이 코앞에 있는 이 상황에?

조금만 방심하면 바모린의 날개에 몸이 뚫릴 수 있는… 이 상황에 무방비하게 뒤로 돌아 뛰라고?

르베나가 아니라 젠의 유파시드가 명해도 절대 선뜻 들어줄 수 없는 말을 방금 그들이 들은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부상당하고 죽었고 또 언제 죽을 줄 모르는 전장에서 무방비하게 등을 돌려 뛰라니.

매섭게 휘둘려지던 검이나 거침없이 폭사하던 마법이 잠시 주춤한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예고도 없이, 주저 없이 외치는 르베나의 소리에 바모린을 상대하던 수백의 인원이 한순간 모두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마치 그들 모두가 오래도록 르베나만을 바라보고 충성을 맹세했던것처럼, 모두는 죽기 살기로 국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아를과 다한 경은 부상당한 랄프와 기사들을 둘러업었고, 라웅과 칸, 루안, 그리고 여유 있는 용병들도 순식간에 부상자들을 짊어지고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도록 뛰었다.

그 순간.

어쩌면 그녀의 명 하나에 모두가 바모린에게 몰살당할 수도 있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수백 명의 인원 중 단 한 명도 의심과 주저함에 뒤를 돌아본 이가 없다는 것은 훗날 모든 제국과 왕국의 제왕학, 그 중 리더의 덕목을 가르치는 수업에서 제일 많이 거론되는 일화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 일화가 현재진행형인 상황.

모두가 르베나의 명에 따라 뒤로 돌아 전력을 다해 뛰는 그 순간,

“팅!!”

르베나의 부름에 작은 털뭉치가 모습을 드러내며 그녀의 부름에 응답했다.

“팅!!!”

안 본 새 조금은 더 몸집이 커져 이젠 제법 새끼 토끼 정도로는 봐줄 만한 새하얀 털뭉치 팅이 이제껏 먹고 저장했던 르베나의 마력을 폭발적으로 그녀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르베나의 오른손에서 검붉은 화마가 무서운 기세로 피어올라 퍼지며 눈 앞의 땅을 가르기 시작했다.

눈으로 좇기에도 벅찰 만큼 빠르고 높은 화마는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땅을 갈라 달렸지만, 마치 자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군과 바모린의 사이로만 길을 내며 빠르게 내달리렸다.

화끈- 달리는 모든 이들이 조금은 놀랄 만큼 뜨거운 화기가 그들의 등 뒤로 느껴졌지만 이들 중 그에 놀라 멈추거나 머뭇대는 이들은 없었다.

놀라기만 했을 뿐 전혀 고통이 없는 화마는 바모린에겐 그렇지 않은 듯 등을 돌린 이들을 쫓던 모든 바모린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오싹.

이를 본 모든 젠의 마법사들이 제 온몸에 돋아나는 경이로운 소름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는 듯 그렇게 마치 벽처럼, 아군과 바모린의 사이를 모두 가른 르베나의 화마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발적인 힘을 내며 위로 솟아오를 때였다.

“… 지금!!!”

르베나의 외침에 순간 화마의 위, 그 허공에서 포털이 열리며 수십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율엔 가문……?”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들은 마치 지금 일어날 일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르베나의 화마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나기 무섭게 그들의 두 손에서 타타탁!! 화려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는 번개가 화마의 장벽에 가로막힌 바모린들에게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쾅.

콰쾅!!!

천지가 울릴 듯 엄청난 번개가 바모린들에게 쏟아지자 수백, 수천의 바모린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에 하늘에 있던 개체들은 모두 땅으로 곤두박질쳤고, 땅에 있던 개체들은 하늘로 날아오르려 발악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국경에 다달아 르베나의 화마와 바모린들을 보던 칸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화마와 번개… 모든 몬스터가 그렇듯 바모린도 본능적으로 불을 싫어하지. 하지만 큰 상처를 입힐 정도는 아닐텐데… 유일하게 바모린을 제압할 수 있는 건 번개. 하지만… 저 정도가 아니라 바모린의 강철같은 외피를 감전 시킬 만큼 위력이 큰……!”

순간 칸의 목소리는 중간에 끊겨 버리고 말았다.

바모린에게 번개 마법을 쏟아붓던 율엔 가문의 마법사들 위에 모습을 드러낸 르베나가 별안간 제 검을 허공에서 바모린들에게 겨눈 것이다.

"혹시…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칸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었다.

치칙, 치지직.

곧 율엔 가문 마법사의 모두를 합친 것보다 큰 번개 마법이 르베나의 검을 통해 이미 시전 중인 그들의 마법 한 가운데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세상이 번쩍였다.

르베나의 검에서 흘러나온 번개가 이미 땅으로 모두 쳐박혀 버린 바모린들을 강타했다.대낮의 하늘을 수놓는 크고 강한 번개의 반짝임과 그 아래에서 번개에 맞아 단단한 강철의 외피에 이는 스파크에 괴로워하는 몬스터들. 그 모습은 마치 죄인에게 하늘의 형벌을 전하는 번개의 신과도 같았다.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에,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분노와도 같은 강대한 마력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칸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르… 베나…….”

칸의 입에서 차마 나오지 못한 뒷말은 주변의 공기에 잠식되어버렸다.

그뿐일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디오니스의 백성들도, 아벨디온도, 젠의 마법사들과 라웅 그리고 아네벨의 모두가 눈앞에서 보이는 위용과 압도적인 마력의 모습에 살며시 떨려 오는 제 손에 힘을 주어 버텨냈다.

그리고… 아를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려 오는 제 손을 꽈악 쥐며 한시도 제 눈을 르베나에게서 떼어 놓지 않았다.

르베나가 쏘아내는 번개의 스파크가 그의 빛나는 금안을 바싹 태울 것만 같았다.

허공에서 흩날리는 르베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아를의 안, 있는 줄도 몰랐던 어느 끈적한 감정을 사정없이 제 색으로 물들여 갔다.

“헤어나올 수가 없네요…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던 건가요.”

또한 디오니스 왕궁 안에서 허공에 떠있는 르베나를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속삭였다.

영원한 속박과 얽매임.

제 영혼의 남은 부분마저 이 순간, 르베나에게 모두 얽히고 있음을 알았다.

제 곁에 오지 않더라도, 제 손에 닿지 못하더라도.

결코 영원히 르베나를 제게서 떼어놓지 못할 것임을 느낀 그가 조용히 제 눈을 감았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두 명의 남자가 한 여자에게 영원을 속박당한 몇 초였다.

고요했다.

마치 아침 해를 기다리는 어느 새벽의 사위처럼 순간 모든 세상이 곧 떠오를 해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타앗.

사라진 화마가 갈라 놓은 어느 땅으로 가볍게 착지한 르베나에게 하나같이 전율과 두려움 그리고 선망과 경외를 담은 눈빛들이 향했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런 이들을 보지 않고 바싹 타버려 재만 남은 바모린들의 그을림을 보며 말할 뿐이었다.

“첫 번째는 해결… 이제… 저놈들 차례인가…….”

작게 속삭인 르베나의 붉은 눈이 저 멀리 경악에 찬 보토니에의 마법사들을 향해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혼자 디딘 땅이 모두 갈라져 마치 그 땅의 주인이 강림한 듯한 위용을 내뿜는 르베나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 만한 바람이.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에는, 심장에는 또 영혼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어느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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