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40)
“부상자는 뒤로 빠져라!!”
다한 경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벨디온은 모두 부상 정도에 상관없이 검을 들고 일어나 달려오는 몬스터 떼와 강하게 맞섰다.
큰 마법 공격으로 인한 부상 때문에 팔에 들어가는 힘은 약해졌고 그들의 타격을 줄여줄 강인했던 발은 땅을 단단히 딛지 못했으나 그들은 웃었다.
젠에서 온 세츠들의 공격마법이 보토니에 마법사들의 손과 발을 묶어놓고 있었고 수백의 다른 세츠들은 무너진 디오니스의 실드를 자신들의 마법으로 다시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아벨디온이 부상으로 모자란 딱 그만큼 신나게 뛰고 있는 라웅의 검이 넘치도록 춤을 추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지켜라!!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아까를 기억해! 우리의 디오니스를, 사람들을 지켜내라!!”
그들은 아직도 지킬 수 있었으니까.
“으라찻차!! 죽어라!!”
몬스터를 한 번 벨 때마다 다친 팔의 상처에서 피를 뿜는 룬의 기합 소리도,
“젠장, 아프다아!!”
팔을 휘두를 때마다 아프다 소리치는 마른의 절규 같은 외침도 아벨디온에게는 또 다른 희망이고 새 삶이었으니.
아벨디온은 모두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귀신들처럼 싸우며 웃었다.
조금 전 검기로 방어를 하려고 검을 치켜든 탓에 대부분의 부상이 팔에 집중돼 휘두르기 어려울 텐데도 그들은 웃는 얼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악귀 같은 그들의 모습에 간혹 젠의 마법사들이나 라웅이 무서워하는 얼굴로 진저리를 쳐도 그들은 계속해서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하늘은 절대 희망이라는 낯설고도 먼 단어만을 주지는 않았다.
아를이 제 팔에 느껴지는 선연한 고통에도 흔들림없이 눈앞에 있는 몬스터를 베어내며 뒤에서 느껴지는 또다른 몬스터의 기척에 재빨리 검을 돌려 베어냈다.
“…큭!”
순간 팔이 뜯겨나갈 것만 같은 고통에 검이 몬스터의 몸통에 얇게 박혔음을 느낀 아를이 재빨리 이어질 공격에 대비해 뒤로 물러나려던 때였다.
솨악. 깨끗하고 시원한 검의 소리가 몬스터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쿵.
제 앞에 섰던 몬스터가 쓰러지자 그 뒤로 드러난 이의 얼굴에 아를의 금안이 살며시 떨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를 경.”
빠르고 날카로운 검과는 다르게 선량한 미소로 인사하는 이를 보는 아를의 얼굴에 그답지 않은 환한 미소가 어렸다.
“…답지 않게 좀 늦기는 하셨네요, 칸 님.”
아를답지 않게 조금은 물기가 어린 목소리의 농담에 한껏 미소 지은 칸이 언젠가 바흐란에게 들었던 대로 깔끔하지만 날카롭고 빠르지만 무거운 검을 휘두르며 답했다.
“챙겨올 게 좀 많았어서 말입니다.”
씨익 웃으며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다니는 칸의 몸놀림을 아를이 채 볼 틈도 없이, 순간 아를을 비롯한 모든 아벨디온의 기사들 주위로 여러 개의 검들이 불쑥 더해져 왔다.
“뭐, 뭐야!!”
“이, 이거 놔!!”
놀란 랄프의 비명 같은 소리가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당황스러워하는 아벨디온 기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수백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한의 용병들이 저마다 아벨디온 기사단의 곁으로 와 그들의 앞과 뒤, 양옆을 감싸 몬스터들을 베어내며 그 틈으로 그들을 뒤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이게 뭡니까, 칸 님!!”
아무리 아벨디온이라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부상당한 몸으로는 네 명의 용병들을 당해낼 수 없어 모두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 버렸다. 다른 기사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 한껏 당황한 다한 경의 급박한 질문에 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젠의 치유 세츠님들이 만든 포션입니다. 인당 최소 다섯 병씩 마시고 다시 전투에 참가해달라는 칸 님의 전언입니다. 참고로 최소가 다섯 병이고 그 이상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조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만 그들의 하나같은 생존에 기쁜 기색을 채 지우지 못한 채로 기사들의 앞에 포션을 궤짝으로 내려놓는 이, 루안을 보며 아벨디온 기사들의 입이 헤 벌어졌다.
“하나에도 그 비싼 포션을 다섯 병씩……?”
룬의 멍청한 물음에 루안이 그답지 않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그 비싼 포션을 인당 다섯 병씩 말입니다. 충분히 가져왔으니 모두 어느 정도 포션의 힘이 돌 때 다시 검을 드시길. 그때까지는 아네벨 상회의 용병들과 저, 그리고 칸 님이 맡겠습니다, 그럼.”
스릉.
제 검을 뽑으며 익숙하게 전장으로 걸어 나가던 루안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제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날카로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익숙한 몸짓으로 그 검을 피한 이가 아벨디온의 사이로 달려오며 물었다.
“이거! 나도 먹어도 돼?”
몬스터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젠의 가사단장, 라웅의 질문이었다.
기세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한 번에 엄청난 마법을 쓴 네 명의 보토니에 마법사들은 젠의 마법사들이 쏟아내는 공격에 아슬아슬하게 실드만 치며 버티고 있었고 다시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은 아네벨 상회의 용병들과 루안 그리고 라웅마저 저 대단한 기사는 누구야, 어디에서 왔어, 라며 포션을 일곱 병째 들이켜며 묻는 주인공, 칸에 의해 전멸되었다.
그동안 조금은 여유롭게 앉아서 포션을 여덟 병씩 해치우고, 점점 도는 포션의 기운에 조금씩 상처가 아물며 기운이 난 아벨디온은 예상외로 다시 전투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안과 칸이 각자의 검을 적신 몬스터의 피를 털어내며 아벨디온에게 가벼운 발로 다가오는 순간. 그 순간 아벨디온과 라웅은 방금까지의 여유가 거짓말인 것처럼 모두 빠르게 검을 들고 튀어 나갔다.
“공중형 몬스터다!”
“국경 안으로 들어가지 못 하게 해!!”
“마법 부대는 모두 공중형 몬스터에 집중해!!”
아벨디온 기사들과 이어진 라웅의 목소리에 그들에게 오던 루안과 칸 역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공격 마법 카드를 찢으며 공중으로 내던졌다.
쾅. 쾅……!!
그들이 던진 공격 마법 카드로 인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던 공중형 몬스터, 바모린들이 마법을 피하며 유유히 상공을 날아왔다.
“바… 모린이 어떻게.”
칸의 작은 중얼거림에 검기를 날리던 다한도 다른 아벨디온도 그리고 라웅조차 검을 내린 채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저게 바… 모린이라고?”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상공을 바라보는 라웅의 넋 빠진 소리에 칸이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검은색의 강철 같은 외피로 둘러싸인 공중형 몬스터로 개체 당 2미터 정도의 크기. 절대로 그들의 서식지를 벗어나지 않지만, 새로운 서식지를 찾을 때에는 목표 서식지의 생명체를 단 하나도 남겨 놓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죠.”
모두의 귀에 칸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흘러갔다. 현실감을 상실할 정도의 바모린 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모린은 마법과 검의 회피능력이 상당한 최상급 몬스터입니다. 유일한 약점은 목과 날개 사이 유일하게 강철 외피가 없는 곳이죠. 하지만 날개에 독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날개에 닿아선 안 됩니다.”
칸의 말은 꼭 귀담아들어야 할 정보였지만 당장 머릿속에 박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칸은 계속 이어 말했다.
“저것들은… 바모린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현 상황을 보자면…….”
“디오니스를 새로운 서식지로 정한 건가.”
칸의 말에 이어진 아를의 짓씹는 것 같은 목소리가 공중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를과 칸을 위시한 모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 바모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공중으로 끊임없이 마법을 쏘아댔고 아벨디온은 최대한 높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기를 쏘아댔으며 칸과 루안 그리고 아네벨 상회의 모두는 폭약과 공격 마법 카드등을 던지며 그들에게 대항했다.
“디오니스로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
“디오니스를 지켜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모두의 절규 같은 비명과 공격이 사방에 쉼 없이 뿌려졌다.
바모린은 한번 서식지를 정한 곳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바모린이 서식지에 함께 정착하는 개체의 수는 적어도 수천.
바모린이 디오니스에 들어서는 순간, 디오니스는 절대로 무사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모두의 수고와 노력이 그리고 처절한 몸부림이 우습다는 듯 상공을 어둠으로 물들인 수천의 바모린은 서서히 착지를 시작했다.
국경 밖의 아벨디온과 아네벨 상회에게, 국경 바로 앞에 자리한 젠의 마법사들에게 그리고,
“꺄아!”
“살려줘!”
아비규환이 되어 버린 디오니스의 국경 그 안에도.
그랬기에 눈앞에 내려온 바모린을 상대하면서도 모두의 시선과 눈은 국경 안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처절하게 메아리치는 가는 여성의 절규가,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려는 어느 가장의 외침이, 그들의 피에, 살에, 심장에 아프도록 박혀왔다.
“안 돼… 안 돼… 제발!”
바모린에게 꽂아 넣어도 자꾸만 튕겨 나오는 검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꾸만 번져오는 피비린내에 몸 안의 모든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 와중에도 어느 단 한 명도 국경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선 바모린이, 국경을 지키던 마법사들에게 들려오는 비명과 신음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워 디오니스를 검붉은 피로 물들여 갔다.
“부단!!”
누군가의 비명 소리에 제 몸에 박혀오는 바모린의 가는 날개 끝을 겨우 피한 아를의 한쪽 뺨 가득 상처가 그어졌다.
툭, 투둑.
점점이 떨어져 바닥을 물들이는 피를 보며 아를은 다시 빠르게 검을 들어 눈 앞 바모린의 머리와 날개 사이를 검기로 찔러 넣었다.
“크아악!”
아를의 검에 비명을 부르짖는 바모린 하나가 곧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랄프!!”
빠른 발을 이용해 국경 안으로 달려가던 랄프의 오른쪽 어깨가 한 바모린에게 꿰뚫려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솩! 솨솩!
순간 빠르게 발도한 아를과 다한의 검기가 바모린의 양 쪽 날개를 그었지만 바모린의 날개는 찢어질 듯 찢어지지 않은 채 랄프의 몸을 더 깊이 압박할 뿐이었다.
“으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랄프를 본 아벨디온 모두의 눈이 뒤집혔다.
몇 명의 아벨디온이 랄프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다한과 아를의 명을 어기고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막내 랄프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바모린들이 뒤로 돈 아벨디온 기사들의 뒤로 빠르게 내려앉아 그들의 등을 날개로 그어 버렸다.
“쿨럭!!”
“큭……!”
“젠장!!”
랄프에게 채 도달하지 못하고 쓰러진 아벨디온을 보며 아네벨 상회의 용병들이 빠르게 달려들어 그들을 그은 바모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성들이… 백성들이 나와!!”
힘겹게 외치는 라웅의 눈이 디오니스의 국경을 향했다.
바모린을 상대하느라 어느새 실드는 거의 사라졌다. 그사이 국경 안으로 들어온 몬스터를 피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던 수백의 백성들이 가까운 국경 밖으로까지 나온 것이다.
“백성들을 보호해라! 절대로 죽게 하지 마라!!”
다한 경의 외침과 동시에 아를이 빠르게 발도한 검기로 랄프를 잡고 있는 바모린을 마저 베어 내고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랄프를 잡아챘다.
그리고 아를과 다한 다른 아벨디온 모두가 상대하던 바모린들을 아네벨 상회와 젠의 마법사들과 라웅에게 맡기고 겁을 먹고 도망쳐 나온 백성들에게로 달려가 그들을 동그랗게 둘러쌌다.
“…아벨… 디온?”
아를과 다한을 알아본 한 백성에게 다한이 소리쳤다.
“여러분! 국경은 디오니스보다 더 위험한 상황입니다! 저희가 여러분을 보호하며 국경 안으로 데려갈 테니 모두 조금만 진정하며 저희를 따라 주십시오! 절대 여러분을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디오니스의 자랑 아벨디온.
그들이 외치는 소리, 그들이 보장하는 안전, 그리고 그들이 든 검. 그러나 이미 패닉 수준으로 겁먹은 백성들이 과연 따라 줄 수 있을까.
바모린의 약점에 찔러넣은 검을 빼어내며 칸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아네벨 상회의 용병들도, 라웅도 또 젠의 마법사들도 같은 생각으로 그들을 보았다.
이미 몬스터 떼에게 가족과 친구 또 소중한 이들을 잃은 이들의 흥분과 두려움은 절대 쉽게 가라앉힐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저들이 또다시 흥분해 갈라지거나 뛰어다니면 그들을 보호하는 이들 역시 큰 부담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두가 바모린을 상대하면서도 언제 소리치고 울며 뛰쳐나갈지 모르는 디오니스의 백성들에게 집중할 찰나, 모두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한 경의 외침을 들은 백성들이 하나둘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내며 서로의 손을 잡고 점점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그들중 몇은 급히 챙겨나온 옷가지들을 찢어 고통스러워하는 랄프와 몇 명의 아벨디온의 상처를 감아 주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사태에 라웅의 몸이 다시금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저희는 르베나 전하를 믿습니다. 저희는… 디오니스를 믿어요. 그러니 저희는… 디오니스의 자랑이자 르베나 전하의 기사이신 아벨디온을 믿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저희를 부디… 지켜달라 염치없이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의 리더 격인 듯한 젊은 사내의 말에 순간 아벨디온 모두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형편없는 꼴이었다. 누구라도 믿지 못할 꼴이었다.
지금의 아벨디온은.
“전부 미쳤군…….”
그럼에도 그들을 믿는, 디오니스의 기사들을 믿는 백성들의 모습에 순간 라웅마저 상황도 잊고 잠시 감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백성들을 보호하느라 모여 원을 만든 아벨디온의 주위로 수많은 바모린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네벨의 용병들과 젠의 마법사들, 라웅 모두 이미 상대하고 있는 바모린들 때문에 쉽사리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뚝, 뚝.
마치 땀처럼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고요해진 사위에 모두의 몸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떨려왔다.
검을 든 채 다가오는 바모린을 바라보는 아벨디온의 눈이 침착함으로 물들고 냉정함으로 벼려졌다.
그랬기 때문일까.
유난히 고요한 사위에, 곧 운명을 가로지를 그 순간에.
모두가 절대로 부르지 않으리라 다짐한 그 이름을, 누구보다 디오니스에 헌신하고 있고 지금도 남을 위해 헌신하고 있을… 그 이름을.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떨려오는 몸에 기대어 누군가 한숨처럼 뱉어낸 것은.
“…르베나… 왕녀님…….”
하지만 결국 이변은 일어나지 않아 그녀를 부른 누군가의 부름을 끝으로 이윽고 바모린들은 그들의 코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죽이려는 듯 바모린들이 제 큰 날개를 활짝 펼친 순간이었다,
“누가 날 불렀나.”
언제나처럼 무감각하게, 하지만 누구나 그녀 안에 깃든 더없이 뜨거운 분노를 느낄 수 있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와, 왕녀 전하!!”
“전하!”
“단장님!”
“단장… 흑… 님!”
“…르베나…….”
놀란 아벨디온과 백성들, 그리고 아를의 부름에 그녀가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피로 물든 흰 제복, 넝마가 되어버린 붉은 망토, 그리고 누구 하나 괜찮지 않은 몰골.
기절한 랄프와 바모린의 독에 괴로워하는 몇 명의 기사.
그럼에도 꺼지지 않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전의로 불타는 그녀의 기사들.
아벨디온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때아닌 벅찬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진동시켰다.
그녀가 아니라도 디오니스를 지키는 이들. 그런 기사들을 여전히 도우며 믿는 백성들.
디오니스는 변하지 않았다. 디오니스는 절대로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그녀가 변하지 않는 디오니스를 정말로 구해야 할 차례였다.
그 모습을 잊지 않으려는 듯 빠짐없이 모두 자신의 눈에 담은 그녀, 르베나가 그들을 감싼 바모린을 검붉은 시선으로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수고했다, 아벨디온. 이제부터 너희는… 내가 지킨다.”
르베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붉은 마력의 폭풍이 백성들과 아벨디온을 가볍고 따듯하게 지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거친 분노를 실은 채 그들을 감싸고 있던 바모린 떼에게 향했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이 어느새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