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39)
“아벨디온을 수호하라!!”
라웅의 강한 힘이 실린 명령에 젠의 세츠들이 저마다의 방어마법을 구동시키며 아벨디온의 주위를 빈틈없이 감싸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어느새 가시적으로 발동된 각각의 신력이 만나 하나로 단단히 굳어진 신력의 힘은 매섭고 집요하게 몰아치는 모래폭풍을 향해 저항을 시작했다.
춥고 척박한 겨울을 딛고 일어나려는 생명과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치켜든 누군가의 의지마저 꺾으려는 듯 사납게 몰아오던 모래폭풍이 세츠들의 방어마법을 만나 사납게 부러뜨리던 수많은 나뭇가지도, 바람에 나부껴 매섭게 아벨디온을 때리던 어느 돌멩이들도, 흙도, 풀도 모두.
비로소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르베나 왕녀의 실드가 뚫렸다!! 실드를 확대하라!!”
디오니스를 감싸던 르베나의 물리적 실드가 채 완벽하게 디오니스를 감싸기도 전에 불어닥친 공격 마법으로 인해 점점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라웅이 쉼 없이 세츠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모두 몸을 낮추십시오!!”
한 세츠의 경고와 더불어 세츠들이 더욱 환하게 빛을 낸 신력이 발동하기 무섭게 모래폭풍의 뒤로 새까맣게 요동치는 불꽃이 화악- 휘몰아쳤다.
“크흑……!”
“…큽.”
수백의 세츠들이 낮은 침음을 흘렸다.
누구보다 순수하고 정의로운 힘, 신력을 가진 세츠들에게 보토니에의 마법사들이 내뿜는 분노와 절규와 누군가의 마지막 숨이 불러낸 힘은 상대하기 힘든 만큼이나 불쾌하고 농도가 짙은 악의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낯설고도 기분 나쁜, 살면서 단 한 번도 닿아보지 않았던 성질의 힘에 세츠들이 조금은 뒤늦게 실드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를 집어삼킬 듯 음울하게 빛나던 새카만 불꽃은 처음부터 그들이 목표가 아니었던 것처럼 아벨디온과 마법사들의 위를 지나쳐 점점이 흩어지는 르베나의 실드를 강타했다.
암흑처럼 새카만 불꽃이 마치 디오니스를 끝낼 것처럼 르베나의 실드에 부딪쳐오자 그에 대항하듯 르베나의 실드 역시 지지 않고 더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주인이 부재중인 실드와 시동자가 바로 옆에 있는 마법의 대결이 항상 그러하듯 어느새 디오니스의 실드는 새카만 불꽃에 삼켜지듯 강한 진동과 함께 깨져 버리고 말았다.
“디오니스의 실드가 깨집니다!!”
“디오니스 방어 기능 상실!”
“디오니스에 임시적인 방어선을 구축해야 합니다!”
르베나의 실드가 깨진 것을 느낀 마법사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외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깨진 국경 쪽에 그들의 실드를 확장해 나갔다.
어느새 위력이 약해진 모래폭풍과 르베나 실드와의 격돌로 힘이 다해 소멸해 버린 검은 불꽃이 지나간 곳에는 황폐해진 디오니스 국경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디오니스의 국경 앞 울창했던 수목은 모두 사막처럼 메마른 땅으로 변해버렸고 르베나의 즉위식 이후 투명하게 디오니스를 감싸던 검붉은 실드는 하늘 곳곳이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 젠의 세츠들이 펼친 실드로 인해 디오니스의 국경, 르베나의 실드가 사라진 그곳에 새로운 실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모든 세츠들의 힘이 깃들어 흰색의 투명한 막이 그들이 선 곳의 국경을 따라 서서히 디오니스를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수백의 세츠라 하여도 그들의 힘으로는 디오니스를 전부 감쌀 수 없는 노릇.
투명하고 단단한 실드는 그들의 가시거리 바깥 어디 쯤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 버렸다.
그리고 이를 확인한 라웅이 매서운 눈으로 제 검을 뽑아 내며 아직 조금은 절망적인 눈으로 없어진 르베나의 실드를 찾는 듯한 이들, 아벨디온을 쳐다보았다.
모두 경상이라고는 억지로 붙이기도 어려울 만큼 부서지고 찢긴 이들. 순수한 기사인 라웅조차 저들처럼 살아남는 게 가능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버티고 살아남은 아벨디온의 꼴은 처참했다.
게다가 목숨을 걸고 지키던 르베나의 실드가 깨지자 그들은 마지막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잠시 멍하니 디오니스의 하늘과 그 안에 있을 사람들을 향해 멈추어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디오니스의 기사였고 아벨디온이었다. 절대로 꺾이지 않는 신념, 르베나의 기사들이었다. 그랬기에,
“르베나 왕녀의 실드가 깨졌다! 디오니스의 백성들이 무방비해진다!!”
라웅이 던진 그 한마디에.
단 한 번 나온 그의 외침에.
휙, 휘휙. 척, 처처척.
아를과 다한 경이 피투성이가 된 몸을 땅에 꽂은 검에 의지해 힘겹게 일으키자 그 뒤로 하나둘, 마치 마력으로 움직이는 시체들처럼 기를 쓰고 뒤따르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온몸이 모래폭풍에 의해 할퀴고 찢겨나간 아벨디온 기사들이 피로 젖어 붉어진 기사복과 찢어진 붉은 망토를 두른 채 몸을 일으켰다.
서걱서걱한 바람이 그들의 찢어져 엉망이 된 망토를 휘날렸다.
무의식중에 그들을 다그치고자 외치기는 했지만 아벨디온 전부가 일어나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라웅은 조금은 소름이 돋은 제 몸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
“오늘은… 하아… 죽는 날이 아닌가 보다.”
세찬 마법의 타격 탓에 여기저기가 모두 찢어지고 그 탓에 과량의 출혈로 어지러움마저 느끼는 몸에 힘겹게 힘을 주면서 툭 내뱉는 아를의 말에 그 옆에 비틀거리며 선 다한 경이 깊게 찢어져 아직도 피가 흐르는 제 오른 손목에 찢긴 망토를 단단히 감으며 답했다.
“…쿨럭… 오늘은… 그런가 보군.”
그리고 둘의 말에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몸에도 히죽히죽 웃으며 하나둘 몸을 일으키는 아벨디온을 보며 라웅의 이제는 자신의 팔뚝을 세차게 문지르며 우는 소리로 말했다.
“폐, 폐하 어딨어… 나 너무 무서워… 이 자식들… 진짜 너무 좀비 떼 같다고…….”
덜덜 떨면서 중얼거리는 라웅의 말이 마치 좀비 떼를 부리는 언령의 마법이라도 되는 듯 어느새 넝마가 되어 버린 아벨디온 모두가 스르륵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스러졌을지언정 절대로 놓지 않은 검을 들고 있었다.
“감히… 큭… 우리 단장님의 실드를… 깼겠다… 하아…….”
“그 아름… 답고 성스러운… 하아 하아… 실드를…….”
“단장님의 얼굴에… 걱정의 그늘을 만들… 었다는… 아악……!! 거지…….”
여기저기 찢기고 갈라진 몸에도 눈앞에 다시금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피에 젖은 그들, 아벨디온은 웃었다.
누구보다 악귀처럼, 또 누구보다 차갑게.
오늘은 아직 그들에게 누군가를 지킬 시간이 더 남아 있기 때문에.
* * *
“…큭!!”
쿨럭.
르베나의 실드가 깨지지 않게 계속 제 마력으로 지탱하던 가스트가 피를 왈칵 쏟으며 뒤로 물러났다. 검은 불꽃의 마법에 순간 모든 실드가 깨지자 훅, 들어온 힘의 반동에 타격을 입은 것이다.
하늘에 흩날리는 르베나의 마력이, 제 옷을 적신 검붉은 피가, 꼭 같아 보여 가스트는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한 채 질끈 눈을 감았다.
“이, 이런 일이…….”
가시적으로 디오니스를 덮듯 다가오던 모래폭풍에 맞선 아벨디온. 그런 그들이 목숨걸고 지키려던 르베나의 실드. 그 실드가 이내 가시적으로 산산조각 난 모습에 메이슨 공작은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힘겹게 벽을 지탱해 섰다.
한순간에 보인 모든 시각적 잔상이 그의 머릿속에서 짧은 시간 동안 쉼 없이 되풀이되었다.
르베나 공주의 실드를 뚫을만한 강력한 공격.
그리고 그걸 마법사 하나 없이 맨몸으로 맞았을 아벨디온의 기사들. 그래서,
“아, 아를…….”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그의 아들을 생각하며 메이슨 공작이 떨리는 눈을 꾸욱 감으며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눈을 감고 가만히 제 마음을 다스리는 가스트와 떨리는 손을 주체못해 주저앉아 버린 디오니스의 공작.
하지만 그럼에도 오직 한 사람.
그 모든 광경을 묵묵히 자신의 녹안에 담고도 한 번 흔들리지 않은 그, 제노스 왕은 조용히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왕궁의 기사단장을 호출했다.
“전하.”
침통한 목소리로 제노스 왕의 앞에 부복한 그를 바라보며 제노스 왕이 명했다.
“이 시간 이후로 디오니스는 전쟁 수준의 비상 상태를 선포한다. 왕국의 기사단 중 4, 5, 6 기사단은 디오니스의 시민들을 왕궁과 마석이 집중 포진되어 있는 중앙광장으로 피신시키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몬스터의 공격에 대비한다.”
“예!”
“그리고 1, 2, 3기사단은 즉시 적이 나타난 국경으로 가 살아남은 몬스터떼를 상대하며 왕국 내로의 진입을 막고 아벨디온을 수호한다. 후벤, 디오니스 왕국의 기사단장인 그대에게 제노스 드 디오니스가 명한다.”
제노스 왕의 명에 후벤이 제 검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숙여 답했다.
“기사단장, 후벤. 디오니스의 백성으로, 또 기사로써 전하의 명을 받습니다.”
단 한 줌의 망설임도 없는 후벤의 모습에 제노스 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후벤이 빠르지만 절도 있는 모습으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점점 사라지는 후벤의 모습을 보던 제노스 왕이 이번엔 시선을 돌리며 다른 이를 불렀다.
“크론.”
디오니스 왕궁 전체를 강타했던 큰 진동을 듣고 서둘러 달려온 크론을 앞에 둔 제노스 왕이 제 몸에 둘러 있던 망토를 풀어 내며 말했다.
“남은 목숨을 아까워 말고 나와 함께 백성들을 지켜 달라고… 베이라인 그대에게 내가 그리 명해도 되겠나.”
어느새 망토를 푼 제노스 왕은 한 왕국의 왕이 아닌 마법사 베이라가 되어 있었다.
그런 제노스 왕의 모습에 한 차례 같은 베이라로써의 전율을 느낀 크론이 재빨리 그의 앞에 부복하며 답했다.
“이미 저의 생은 폐하의 것이오, 제 살과 피는 디오니스의 것입니다. 베이라 크론, 감히 떨리는 마음으로 전하를 모십니다.”
20년 만의 출정을 앞둔 두 베이라의 눈빛이 서늘하게 퍼석거리는 공기 중에서 뜨겁게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