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38)
그사이 제노스 왕의 허락을 받고 들어온 메이슨 공작은 마치 조금 전 발걸음 소리가 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제노스 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조금은 어두운 방 안, 환하게 붉은빛으로 발광하는 큰 마석에 잠시 메이슨 공작의 눈길이 닿았다 떨어졌다.
“강대한 힘의 근원, 그 중심에 앉아계신 폐하에게 디오니스의 영광이 함께하시길…….”
메이슨 공작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제노스 왕이 깊은 녹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랜 친우인 메이슨 공작이 걸음을 이렇듯 빨리 재촉한 적은 이제 곧 태어날 아이들을 보러갈 때뿐이었거늘.
같은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놓고 차분한 낯을 하는 그의 친우를 보니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잠시 머뭇거릴 뻔 하였으나 제노스 왕은 익숙하게 그런 감정을 제 맘 깊이 묻어놓고는 빠르지 않게 물었다.
“소식을 듣고 왔는가, 메이슨 공작.”
제노스 왕의 말에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제노스 왕과 가스트에게 오로지 신하의 얼굴로 물었다.
“디오니스의 국경에 수천의 몬스터가 몰려와 현재 아벨디온 기사단이 단독으로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메이슨 공작의 말에 가스트가 마석에 불어넣는 제 힘을 살짝 줄이고는 답했다.
“네, 사실입니다. 또한 혹시나 국경을 침범할 위험에 대비해 지금 아를 경과 다한 경, 그리고 아벨디온 기사단 모두의 뜻에 따라 물리적 실드를 작동하려 합니다, 공작님.”
가스트의 말에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 메이슨 공작이 저 멀리 연기가 솟구치는 국경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찬찬히 고개를 돌려서 가스트와 그의 손이 닿아있는 마석을 바라보았다.
디오니스의 별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에 맞지 않게 아주 작은 양으로 모여든 그의 회색 마력. 그리고 그만큼의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주름진 얼굴. 또 그 이상의 망설임이 깃들어 버린 주름진 손.
이 모두를 찬찬히 눈에 담은 메이슨 공작이 한번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는 아를과 꼭 닮은 금안을 천천히 내보이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무얼 하십니까, 가스트 님.”
“…네?”
메이슨 공작의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한 가스트가 그에게 의미를 되묻자, 메이슨 공작이 이제까지 중 제일 편안하면서도 조금은 엄격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가스트 님의 손에, 그 마력에 우리 디오니스 백성들의 안전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한데 어찌 망설임을… 그 손에 담으십니까.”
메이슨 공작의 말에 그의 곁에 서 있던 제노스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메이슨, 가스트의 손에 또한 그대 아들의 안전도 달려 있네.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말일세.”
안타까움이 담긴 제노스 왕의 말을 들은 메이슨 공작이 그답지 않게 잠시 웃음을 머금었다가 금세 노련하고 엄격한 공작의 얼굴로 제노스에게 말했다.
“저는 디오니스의 공작입니다, 전하. 결코 백성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한 아를 경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디오니스의 귀족으로서, 또… 그 아이의 아비로서 말입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는 가스트가 아까 들었던 아를의 목소리와 어쩐지 닮아 있었다. 공작의 말은 담담하게 이어졌다.
“오히려 그런 선택을 한 그 녀석이… 자랑스럽고 대견할 뿐입니다. 그러니 어서 작동시켜 주십시오. 그 녀석… 그리고 그 녀석의 동료들이 한 선택이 절대 헛되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국경에서 디오니스를 지키려 검은 든 그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이지 않겠습니까.”
메이슨 공작의 단호한 말에 제노스 왕이 그의 어깨를 무거운 손길로 툭, 툭 두드리고는 가스트에게 시선을 돌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둘의 결연한 표정을 한 번씩 확인한 가스트가 이번엔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마석에 가시적으로 보일만큼 많은 양의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웅웅- 웅우웅--. 가스트의 마력에 반응하는 마석이 내는 진동에 방 안에 들어선 셋의 얼굴에 한순간 긴장과 걱정 그리고 초조함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우우우--- 우웅---. 곧 더 큰 진동이 마석에서 뻗어 나와 방안을 어둡게 만든 보랏빛 벨벳 커튼을 조금씩 흔들었다.
어느새 방 안에 가득 찬 마력이 조금씩 제노스 왕과 메이슨 공작을 압박하며 가스트의 얼굴을 힘겨움에 일그러트렸다. 그 때 이내 그의 회색 마력이 한꺼번에 마석에 흡수되며 디오니스 전체에 물리적 결계가 발동되기 시작했다.
화와악---! 르베나의 붉은 마력 중간중간 가스트의 회색 마력이 희끄무레하게 비추는 힘이 그 방을 딛고 힘차게 디오니스의 상공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콰광……!! 쾅쾅……!!
아벨디온 기사단이 몬스터 떼와 싸우고 있는 국경 쪽에서 전에 없던 큰 폭발음이 들려왔다.
곧 큰 폭발음의 진동이 모든 디오니스의 땅을 거쳐 왕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사라락, 사사삭.
흩어지는 바람에 왕궁의 천장에서 흙가루같은 먼지가 떨어져 내려오고 디오니의 반을 덮을 만한 모래 안개가 국경을 통해 크게 피어오르며 디오니스의 땅 위를 덮기 시작했다.
“아……!”
메이슨 공작의 목메인 소리가 매케하게 먼지로 뒤덮인 방 안을 가득 메우고 놀라 치켜뜬 가스트의 눈이 하염없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와, 왕녀 전하의 시, 실드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큭!!!”
가스트의 절망과도 같은 한 마디, 한마디가 제노스 왕과 메이슨 공작의 귀를 아프도록 세게 때려왔다.
금방이라도 디오니스 전체를 강하게 보호할 것만 같았던 르베나의 물리적 실드가 채 끝을 향해 달려가기도 전, 서서히 그 힘을 잃고 공기 중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입가에서 흘러나온 피로 물든 제 옷과 하늘에 흩날리는 르베나의 붉은 마력이 곧 디오니스의 땅을 뒤덮을 피바람처럼 보인다고 가스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 * *
“마법 방어 자세!!!”
다한 경에게서 마법 공격 신호를 전달받고, 아를이 재빨리 아벨디온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조금 전 르베나를 생각하며 감았던 눈을 뜨는데에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르베나도 모르게 오랫동안 훈련의 훈련을 거듭했던 마법을 방어하는 대형.
검기로 어느 정도의 마법은 방어할 수 있게 되었지만 큰 마법이 올 경우, 르베나가 없어도 그들끼리 서로를 지키고 피해와 사망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벨디온 창단의 시작부터 스스로 연구하고 고민한 훈련이었다.
수없이 반복되었던 훈련을 떠올린 모든 아벨디온 기사단의 몸이 그들의 생각보다도 더 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들의 등만 보이는 틈 없는 원을 만들어 냈다.
각자의 몸을 붙여 원을 만든 기사들은 모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그들의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렇게 자세를 잡고 각자 최대한의 검기를 있는대로 끌어올리자 서로 다른 색의 검기들이 형형색색이 모여들며 큰 파동을 만들어냈고 이윽고 커다란 검기의 원이 생겨났다.
그 와중에도 다한 경과 아를은 아벨디온이 만든 원의 제일 앞에 자리해 다른 대원들보다 큰 그들의 검기를 최대치로 펼쳐 들었다.
콰과과과과과앙……!!
아직 저 멀리 있는 공격 마법의 진동에 있는 힘껏 위로 치켜든 그들의 검이 벌써 흔들리고 있었다.
큰 공격 마법이 발동된 후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들의 이어진 공격마법이 강대한 모래폭풍으로 변해 주위를 삼키기 시작했다.
스치는 모든 땅과 초지가 처절한 울부짖음을 내지르며 고통스러워했고 마치 고통의 눈물처럼 사방으로 찢겨 나부끼는 나뭇잎들의 춤사위가 격동적이었다.
점점 다가오는 모래폭풍의 위력에 점점 흔들림이 심해지는 그들의 검에 그것을 든 그들의 팔도, 몸도 함께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힘은 점점 둥글게 모여들며 검기를 하나로 만든 아벨디온 기사단을 향하고 있었다.
“…후회는 없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아벨디온으로 죽어 영광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주님이 보고 싶습니다!”
“다한 경, 장가 못 보내드려 죄송합니다!”
파괴적인 공격마법의 끝을 예상한 듯 제각기 들려오는 단단하고도 우스운 아벨디온 기사들의 마지막 말이 광폭하게 나부끼는 바람에 의해 떨리는 몸을 통해 뱉어져 허공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을 예감하고 소리치는 기사단 누구 하나의 목소리에도 두려움에 떨리는 나약함은 깃들지 않았다.
공격 마법이 발동된 그 첫 순간, 아벨디온의 모두가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일제히 고개를 돌려 궁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어느새 물리적 실드가 발동됨과 동시에 붉은색의 마력이 뻗어 나와 디오니스 전체를 감싸기 시작한 그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의 희생이, 그리고 노력이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확인했기에,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갈 시간은 그들이 충분히 벌어두었음을 확인했기에 아벨디온 모두는 상황도 잊은 채 기분 좋게 웃으며 훈련대로 원을 만들어 검기를 뿜어냈다.
그들의 동작에는 단 한순간의 지체도, 망설임도 없었다.
디오니스의 기사가 되어 흰 제복에 붉은 망토를 걸치는 아벨디온의 일원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으며, 단 한 순간도 불명예스러운 명을 내린 적 없는 단장을 만나 명예롭게 죽을 수 있다.
그들의 피와 살로 디오니스를 구할 수 있음에, 아벨과 디온처럼 백성을 지키는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음에 아벨디온은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며 단 하나의 소원만을 마지막으로 간절히 빌었다.
“부디 우리 단장님이… 너무 괴로워하진 마시길.”
누군가의 작은 중얼거림이 아벨디온이 만든 원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랄프의 귓가에 스치는 바람처럼 들려왔다. 점점 코앞으로 다가오는 세찬 공격 마법의 바람보다도 그 한마디가 아프고 힘겨워서 랄프의 눈에 이윽고 눈물이 맺혀 버렸다.
“랄프, 고개를 숙이고 팔로 머리를 감싸라.”
“너 혼자 살아남게 된다 해도 너는 아벨디온의 자랑임을 절대 잊지 말아라.”
울컥 맺힌 눈물을 떨구기도 전에 들려온 아를, 다한 경의 말에 마치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랄프의 눈에서 후두둑, 후두둑 눈물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팠다, 막내라는 이유로 그들의 방패가 되지 못해.
슬펐다, 그럼에도 그를 가운데에 두고 보호해주는 이들을 모두 잃게 될 것이.
두려웠다, 자신만 아벨디온답게 죽지 못하고 남겨질까 봐.
하지만 다한과 아를의 당부에 이어 들려온 아벨디온 선배들의 말에 랄프는 목을 꽉 메우는 통증과 떨림으로 다가오던 울음을 소리 내어 뱉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때문에 괴로워 마라, 막내!”
“너 하나만은 살리고 간다!”
“네가 끝까지 살아남는 게 우리에 대한 보답이다!”
“우리 대신 장가는 꼭 가라, 막내!”
“혹여라도 따라오겠다고 난리 치면 하늘에서 뻥 차 버릴 거다.”
모두가 던지는 견디기 힘든 온도의 말에 왈칵 울음이 터져 꺽꺽거리며 우는 랄프의 소리를 들으며 아벨디온 기사단이 모두 하나의 목소리로 외쳤다.
“아벨디온의 정의를 위해!!”
몬스터 떼를 막아 시간을 벌고 그사이 물리적 실드가 쳐졌으니 디오니스는 무사하리라.
그들의 가족도, 사랑하는 그 사람도, 디오니스의 미래가 될 아이들도, 디오니스의 역사로 남을 노인들도.
모두가 그들의 피와 살을 딛고 무사하리라.
마치 아벨디온의 구호가 신호가 되듯 그 순간 강한 모래를 동반한 날카로운 공격 마법이 아벨디온 기사단의 위로 난폭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그들에게로 떨어진 공격 마법은 주위의 모든 공기와 소리와 생명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곧 아벨디온 기사단의 귀에서 압력 차에 의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검을 든 그들의 투박하고 상처와 흉터투성이인 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단단한 손도, 그 굳건한 힘도 목표한 모든 생명을 파헤치기 전에는 멈추지 않겠다는 듯 공격적이고 파괴적으로 몰아치는 공격 마법에는 끝까지 버틸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을 향한 그 욕망의 떨림이 감히 그들의 순수한 정의보다 더 깊고 어두웠던 것일까..
하늘로 높이 솟구쳐 올랐던 아벨디온의 검이 이내 하나둘 스러져 가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던 꼿꼿한 힘이, 매섭게 휘날리는 제 피에도 끝까지 버텨내던 그들의 몸이, 그들의 의지와 정의를 배반하듯 그렇게.
새순이 나기 시작하는 이른 봄이었다.
생명이 꿈틀거리는 도약의 시기. 모두가 희망에 가득 차 르베나의 실드를 찬양하고 그들의 기사 아벨디온을 자랑하던 무한한 희망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던 시기.
그 격동의 시기에, 디오니스의 국경에 불어온 메마른 모래바람은 황폐함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삼켜버리고 있었다.
생명이 도사리는 작은 새싹도,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늘 높이 치켜든 누군가의 정의도, 수많은 이를 지키기 위해 견고했던 누군가의 마음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삶의 희망으로 삶았던 어느 왕국의 힘찬 생명력까지도.
그러나 황폐한 모래바람의 삭막함에도 모든 걸 집어삼키는 그 포악함 속의 욕망에도, 그리고 점점 시들어 가는 작은 생명의 희망에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 것들도, 그리고 또다시 움트는 작은 희망들도 있었다.
육체보다 아득히 높은 곳을 점령해버린 누군가의 정의와 사명처럼, 흑과 백의 경계를 지우고 그중간에 처음으로 제 몸을 던진 누군가의 순수한 검처럼.
“젠 제국의 기사단장, 라웅. 유파시드의 명을 받들어 아벨디온을 수호합니다!”
“유파시드에게 영광을!”
“유파시드에게 영광을!”
모두의 검이 스러지고 보토니에 마법사들의 공격 마법이 아벨디온 모두의 파와 살을 전부 집어삼키기 직전, 흰 제복에 흰 망토를 두른 수백의 마법사들이 나타나 아벨디온의 주위를 빈틈없이 감싸기 시작했다.
세츠와 베이라.
성기사와 아벨디온.
그 화려한 조합의 서막을 알린, 어느 장대한 역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