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65화 (165/276)

165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37)

다그닥, 다그닥. 아한을 안고 빠르게 말을 달리는 가스트의 안색이 창백했다.

빠르게 땅을 박차는 말의 발굽이 일으키는 먼지가 뿌옇게 그들의 주위를 감싸도 서둘러 사라지는 실체는 그 먼지가 다가오길 기다려주지 않았다.

품 안에 덜덜덜 떠는 아한을 한번 더 꼬옥 품으로 당겨안은 가스트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을 한번 더 재촉했다.

“이랴-!!”

가스트의 재촉에 말은 지금의 급박한 상황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딴딴한 허벅지에 빽빽하게 힘을 주며 더욱 강하고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발, 늦지 않기를… 그들의 결심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제발.’

속으로 계속해서 늦지 않기를 바라는 가스트의 손에 땀이 한가득 찼다.

땀 때문에라도 말고삐를 놓칠세라, 가스트는 다시 한번 세게 말고삐를 부여잡고는 말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르베나가 디오니스를 위해 발동한 실드는 견고했다. 모든 인간적인 움직임은 허용되지만 마법으로 디오니스를 공격하는 순간 르베나가 바로 알아챌 수 있었고 아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루드바하에게 선물받은 천문학적인 가격의 마석을 디오니스의 궁에 두고는 팅을 시켜 수시로 본인의 마력을 축적시켰다.

유사시, 르베나가 없다면 가스트가 그 마석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만으로 디오니스를 감싼 르베나의 실드는 물리력까지 막게 되어 물체나 사람의 출입마저도 통제되도록 말이다.

그리고 디오니스 안에서 밖으로의 텔레포트는 허용되지만 밖에서 안으로의 텔레포트는 르베나를 제외한 누구도 허용되지 않는다.

“뭐든 것에 예외는 없는 것이 좋습니다, 르베나 님.”

가스트의 편의를 위해 실드를 조금 수정하려던 르베나는 그의 의견을 따라 가스트마저도 텔레포트로는 디오니스로 바로 들어올 수 없게 하였다.

그래서 오늘 켄느에서 온 가스트와 일행은 그나마 왕성과 가까운 디오니스의 국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때마침 마중을 나온 아한과 함께 몰려오던 몬스터 떼와 격돌했다.

“아한을 뒤로 보내!”

그 상황에서조차 어린 아한을 보호하며 뒤에서 마법을 난사하는 가스트와 아를을 위시한 아벨디온. 그들은 몰려오는 수백의 몬스터와 여유롭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제껏 르베나와 수많은 전투를 치른 아벨디온에게 수백의 몬스터는 눈을 감고도 해치울 수 있는 전투 상대였고 신마전쟁까지 겪은 가스트 역시 상대가 쉬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유롭게 마지막 몬스터를 베어낸 룬이 아한을 돌아보며 씨익 미소 지을 때쯤.

우두두두두두-.

뿌연 연기와 함께 다가오는 수많은 소리가 진동이 되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때 방금 베어 낸 몬스터들에게서 나던 악취가 곱절 이상이 되어 그들에게 도달했을 때, 일행의 얼굴은 더없이 서늘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가스트 님, 왕궁으로 가주십시오. 그리고 르베나의 마석을 발동시키십시오.”

아를의 말에 가스트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고작해야 몬스터입니다, 아를 경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얼른 해치우고 함께 들어갑시다.”

가스트의 말에 아를이 작게 웃었다가는 아한을 한 번 보고 다시 가스트를 보며 말했다.

“적게 잡아도 천 마리가 넘습니다. 저희로서도 시간이 걸리고 부상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왕궁으로 가시는 길에 다한 경과 나머지 아벨디온을 불러 주시고 왕궁 기사들을 파견하여 국경 주변의 백성들을 피신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서늘함을 담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물리적 실드의 가동을 부탁드립니다.”

아를의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챈 가스트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스트는 아를에게 편안히 웃어 보이면서도 점점 다가오는 수많은 실체를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헤아렸다.

“아벨디온에게 수천의 몬스터가 문제겠습니까, 제가 잠시 들어가 아한을 놓고 다한 경과 다른 아벨디온 기사들과 다시 오겠습니다. 혹시라도… 마법사가 나타날 경우를 대비해야 하니.”

가스트의 말에 아를이 자신의 검에 묻은 몬스터들의 피와 점액질을 휘익- 공중으로 털어내며 앞을 보고 말했다.

“가스트 님, 젠과 자칸에도 몬스터만 나타났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한 르베나가 이 상황에 있다면 르베나는 몬스터들을 도륙하면서도 혹시나 모를 걱정에 백성들부터 대피시켰을 겁니다. 물리적 실드는… 그들을 위한 것이니 잊지말고 꼭 드립니다.”

어느새 금안을 날카롭게 빛내며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아를을 본 가스트의 눈이 깊어졌다.

르베나의 입장, 그것을 헤아리는 사람이 또 하나 늘어난 것이 이 상황에서도 좋다고 생각한 가스트는 스스로가 노망이라도 났나 생각했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몬스터들을 보며 가스트가 말했다.

“마석에 필요한 마력이 적지는 않아 저도 마력을 아낄 겸 말을 달려 갑니다. 다행히 왕궁에서 멀지 않은 국경이니 왕성까지는 금방 도착할 겁니다. 그러니, 아를 경 백성들은 걱정 말고 다한 경의 부대가 올 때까지 다치지 마시길.”

가스트의 말에 씨익 웃는 얼굴로 답하는 아를의 옆모습이 보였다.

순간 가스트는 곧바로 아한을 안아 들고 국경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국경 수비대에게 다한 경의 호출을 부탁하며 말을 빌려 빠르게 내달렸다.

아벨디온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그들은, 르베나와 함께 커 온 그들은, 결코 몬스터떼에게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 물리적 실드는 다만 안전장치일 뿐이다.

따위의 말들을 계속해서 되뇌는 마음과는 다르게 가스트는 계속해서 말을 더 세게 내달렸다.

불쾌한 감정, 자꾸만 무엇인가를 놓친 듯한 찜찜함.

수년 전, 아들 내외가 죽던 날 느꼈던 그런 감정을 오늘 제가 다시 느끼는 건 늙은이의 괜한 기우일 뿐이라 생각하며.

* * *

다행히 가스트의 부름을 전해 들은 다한을 비롯한 나머지 아벨디온 기사단은 상황이 급박하다 판단되어 언젠가 칸이 아벨디온 모두에게 선물로 준 텔레포트 종이를 찢어 단숨에 아를의 기사단과 합류했고, 텔레포트 종이가 없는 왕국의 기사단은 부지런히 말을 달려 국경 주위에 위치한 백성들을 디오니스의 시가지와 왕궁 쪽으로 재빨리 피신시켰다.

“결계는 이중, 삼중으로 치고 있으니 안심하고 곧 몰려들 백성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라!!”

그리고 가스트의 소식을 전해 들은 제노스 왕 역시 서둘러 녹색의 마력을 왕국내 흩뿌리며 궁인들을 재촉했다.

‘아무리 지나쳐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것이 안전의 확보다. 게다가 공격에 대항할 힘이 없는 백성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국경에서의 전투로 끝이 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아주 작은 숫자의 확률에도 힘없는 백성들은 쉽게 죽을 수 있음을 제노스는 신마전쟁을 통해 너무 많이 보았다.

그렇게 왕의 명령하에 모든 준비가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고, 국경에서의 전투가 심화되었는지 어느새 국경에서의 폭발음과 연기가 왕궁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빠르게 달린 말이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가스트가 날쌘 기사처럼 아한을 안고 내려 왕궁으로 달려 들어왔다.

예순의 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움직임에 바쁘게 움직이던 몇몇 시종들의 눈이 잠시 가스트에게 닿았다 멀어져갔다.

“가스트, 상황이 심각한가?”

제노스 왕의 물음에 가스트가 국경 쪽을 한번 보고는 작은 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면 아벨디온으로 충분하겠지만 심상치 않습니다, 전하. 몬스터들이 저희가 오길 마치 기다린 듯 출현한 것이 말입니다.”

“흐음.”

가스트의 말에 제노스 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젠과 자칸으로의 습격, 그리고 이어진 디오니스의 습격.

‘그들이 바라는 것이 대체 뭐길래…….’

제노스 왕은 이어지던 짧은 생각을 잠시 중단하고는 가스트가 왕궁으로 온 이유를 상기하며 그에게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트는 어느새 다가온 제노스 왕의 시종, 크론에게 아한을 맡겼다. 그리고 아한이 불안하지 않게 한 번 편안한 미소를 보이며 머리를 차분히 사랑을 담아 쓰다듬어 주고는 빠르게 제노스 왕과 왕궁에 위치한 한 외진 방으로 향했다.

우웅— 우우웅--. 제노스 왕의 침실, 그것도 마법적 트릭을 열어야만 열리는 작은 방 안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마석이 현란한 붉은 빛을 빛내며 방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마석을 본 제노스가 표정을 굳히며 가스트에게 말했다.

“이걸 작동시키면 우리 아벨디온이 위험하지는 않겠는가…….”

제노스의 말에 가스트 역시 표정을 굳히며 잠시 있다가는 곧 표정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이것이 아를 경이 원하는 것입니다, 전하. 그리고 다한 경 역시 저에게 자신과 아벨디온 모두의 뜻을 전해 왔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믿어 주시지요. 그리고 르베나 왕녀님께는…….”

가스트의 말에 제노스가 옅은 미소로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말하지 않았네. 자칸에서 고생하고 있을 그 아이에게 괜한 심려 주지 말게나. 디오니스엔 아벨디온과 자네, 그리고 수많은 왕실기사단과 내가 있네. 르베나는 자칸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고 디오니스는 우리가 지키세.”

제노스의 왕의 말에 동의하듯 웃은 가스트가 마석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 손을 마석 위에 올렸다.

“명심해, 가스트. 이게 작동되면 끄는 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어. 그러니 이걸 작동시킬 땐 신중해야해.”

“작동 후에는 사람 하나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겠지만, 들어올 수 없는 사람 중에 우리 사람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

르베나의 조언을 다시 한번 새긴 가스트가 왕궁으로 들어오기 전 보았던 아를을 떠올렸다.

단 한 번의 지체도 없이 침착하게 몬스터들을 막으며 물리적 실드를 작동시키라는 그의 얼굴엔, 그리고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소리친 아벨디온 기사들의 얼굴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벨디온, 르베나 왕녀의 기사단.

패배를 의심하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붉은 망토의 기사단.

과연 지금의 결정을 부디 르베나 왕녀님께서 노여워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스트는 천천히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르베나의 마력을 꼭 닮은 색으로 빛을 발하고 있는 마석.

이 마석을 르베나가 디오니스의 실드에 연결해 놓은 덕분에 누구 하나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견고한 물리적 실드를 추가할 수 있다.

가스트가 천천히 자신의 손에 왕궁으로 올 텔레포트에 아낀 힘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눈을 닮은 다정한 회색의 빛이 천천히 그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빠른 발걸음 소리가 가스트와 제노스 왕의 귀에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전하, 신 메이슨 공작입니다. 드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빠르고 초조한 걸음걸이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

그 순간 가스트의 손에 망설임이 새겨져 버렸다.

아벨디온 기사단.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디오니스 모두의 안전을 지키려는 진정한 기사. 그 기사의 아버지가 이 방에 들어서려 한 것이다.

순간, 죽은 아들 내외가 생각나 마석에 마력을 모으던 가스트의 손이 찰나 흔들린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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