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64화 (164/276)

164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36)

다양한 색의 향연이 공중을 끊임없이 수놓는다.

지금이 아니라면, 이 상황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넋을 빼놓고 볼 만큼, 각양각색의 자수가 하늘을 화려하게 물들여 갔다.

길고 날카롭게, 때로는 빠르게 발포되어 나간 각각의 색들이 공중을 가르고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마법사에게 쇄도했다.

펑. 퍼버벙!!

하지만 아름다운 검기가 물들이는 하늘도 잠시, 네 명의 마법사에게 닿은 검기들은 속절없이 흩어져 뿌연 연기로 더럽혀지고 있었다.

“젠장!! 부단, 검기가 전혀 들지 않아요!”

어느새 온몸 가득 먼지로 뒤덮힌 흰색의 아벨디온 기사복을 입을 룬이 거칠게 말을 뱉자, 몬스터들의 피를 흰 제복 가득 뒤집어쓴 아를이 날카로운 금안을 빛내며, 다가오는 몬스터를 하나 더 베어 넘기며 소리쳤다.

“일단은 나와 다한 부단장의 기사들이 몬스터들을 처리할 동안, 너희들은 저들이 더 큰 마법을 쓸 수 없게 계속 방해해! 여기서 더 큰 마법이 오면 그땐 백성들이 위험하다!”

쉬익! 푸욱.

몬스터의 기습에 자신의 큰 검으로 몬스터의 전신을 꿰뚫은 아를의 얼굴에 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땀마저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를의 몸은 점점 한계에 닿았다 소리 없는 아우성만을 외치고 있었다.

“하아… 하.”

어느새 아를의 입가로 거칠게 터져 나오는 숨소리에도 불구하고 땅을 가득 메우는 몬스터들과 네 명의 마법사들이 쏟아 내는 마법의 폭격들은 거침없이, 그리고 사정없이 그들의 땅, 디오니스를 짓밟기 시작했다.

촤악!!

그때, 제 눈앞의 몬스터를 베어 내며 다한 경이 아를에게 소리쳤다.

“가스트 님은 아직인가!!”

다한 경의 힘이 실린 소리에 아를의 눈이 힐끗 디오니스의 궁을 향했다가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아직인 것 같아! 젠장……!!”

촤악, 촥!!

계속해서 그어지는 아벨디온 기사단과 디오니스 기사들의 검과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검기.

‘어째서… 어째서……!’

계속해서 늘어나는 몬스터들을 베어 내며 아를은 이를 꽉 물었다.

오늘은 적어도 오늘은, 누군가의 죽음을 더는 듣지도 보지도 않는 하루가 되길 그렇게 바랐었건만……!!

흩날리는 붉은 색과 녹색의 피에 아를의 손이 점점 떨려 왔다.

디오니스는 르베나가 로드의 길, 즉 성년식에서 보여 준 강력한 실드로 보호받고 있다. 보토니에 조직의 존재를 알고 디오니스의 안전을 걱정한 르베나 왕녀의 선제 조치였다.

그래서 오늘 가스트와 함께 켄느에서 돌아온 아를과 아벨디온 기사단 일부는 자칸을 걱정하면서도 디오니스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실수였다는 것을 그들은 도착 직후부터 깊이 깨달았다.

“3시 방향, 마법사 출현! 공격 마법이다, 모두 피해--!!!”

다한 경의 큰 목소리가 공기를 울림 들림과 동시에 불쾌한 검은색의 힘이 폭발적으로 사위를 어둡게 물들이며 힘을 팽창시켜 나갔다.

모든 공기가, 주변의 아벨디온과 왕실 기사들이, 그리고 바로 제 눈앞이, 순식간에 어두운 마법으로 물드는 것을 바라보는 아를이 이 순간 이 자리에 없어 다행인 그녀를 떠올리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우웅-!

갑자기 신호가 끊겨버린 폼멜의 마석을 르베나가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르베나의 눈을 꼭 닮은 신비한 루비라며 좋아하던 사나가, 르베나에겐 부족하다며 웃던 후벤이, 그리고 정성스레 마석에 통신마법을 새기던 가스트와 그 옆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던 아한이.

더 좋은 마석을 구해 준다며 잠시만 기다리라던 아를도.

‘왜 지금… 갑자기 모두 생각이 나는 거지, 왜……!’

더 이상 빛나지 않는 마석이, 언제나처럼 빛을 잃고 얌전히 있는 그 마석이, 지금 이 순간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이 되어 르베나를 압박해 왔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를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천천히 제 목 언저리에 있는 다이아로 길쭉하고 매끈한 손을 가져다 대었다.

- 아, 폐하---!!

신력을 보내자마자 연결되어 들려온 목소리에 르베나의 눈이 루드바하를 향했다.

여전히 르베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루드바하가 시끄럽게 울려오는 목소리에 조용히 답했다.

“라웅인가.”

루드바하의 답에 건너편 라웅이 소란스레 답하기 시작했다.

- 그래! 근데 도대체 폐하 자칸에 갔다면서 왜 이렇게 연락이 안돼! 나 진짜 자칸에 드래곤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잖아!

- 라웅, 황제 폐하다, 좀 더 예의있게 대하도록.

- 아, 뭐래 이 글쟁이가!! 저리 안 가?

언제나처럼 격의 없이 떠드는 라웅과 그를 말리며 나무라는 유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루드바하의 벽안은 여전히 르베나에게만 고정되어있었고 웃음기 없는 목소리가 조용히 울릴 뿐이었다.

“용건만.”

루드바하의 웃음기 없는 목소리에 일순간 마석에서 들려오던 시끄러운 소리가 뚝, 멈췄다.

그러고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군기가 바짝 든 라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폐하, 현재 디오니스에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 떼와 보토니에 소속 추정되는 네 명의 마법사가 출현했다는 소식입니다. 르베나 왕녀님의 결계 덕에 아직 디오니스는 괜찮고 아벨디온 기사단이 단독으로 몬스터떼와 국경 밖에서 격돌 중이라고 하나, 저희 측 정보망에 네 명의 마법사가 근처에 은신 중이라는 소식이 걸렸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조용히, 그리고 절도있게 들려오는 라웅의 목소리가 르베나에게는 웅웅거리는 울림으로 전해져왔다.

수천의 몬스터, 네 명의 마법사, 아벨디온, 단독.

따위의 단어들이 어지럽게 르베나의 머릿속을 떠다니며 그녀가 라웅의 말을 더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르베나는 그들과 함께 간 가스트가 물리적 실드를 발휘해 모두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임을, 자신의 기사들인 아벨디온이 결코 약하지 않음을 떠올리며 깊게 호흡을 하고는 이어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 마법사 발견 직시 기존 폐하의 지시에 따라 저희 세츠들과 성기사들을 투입해 잡으려 했습니다만…….

“다만?”

루드바하의 되물음에 라웅이 조금 뜸을 들이다 답했다.

- 현재 모두 통신이 끊겼습니다. 디오니스에서 소식을 전해 주던 정보원들 역시 한순간 모두 기척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디오니스에 현재 큰 모래폭풍이 불고 있다는 타 국의 정보입니다.

쿵. 쿵쿵쿵.

라웅의 말에 르베나의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아벨디온이, 그들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르베나의 적안을 본 루드바하가 라웅에게 말했다.

“세츠들로 구성된 2차 파견대를 보낸다. 그리고 라웅, 너도 함께 간다. 그동안 젠의 보안은 유안이 맡는다, 이상.”

- 뭐, 아니 폐하? 난 젠의 기사단장……!

뚝.

일방적으로 신력을 멈춘 루드바하 때문에 통신구에서 흘러나오던 급박한 라웅의 말이 잘려나갔다.

처음부터 통신구가 끊긴 지금까지 르베나만을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바흐란을 돌보고 있던 치유 세츠들에게 물었다.

“바흐란 왕자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통신구는 기본적으로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기에 라웅의 말을 듣고 금새 안색이 안 좋아진 치유 세츠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일단 의식을 재워 놨습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팔은?”

곧바로 되물어오는 루드바하의 조금 온도가 낮은 목소리에 이번엔 다른 치유 세츠가 눈치를 보며 답했다.

“현재로서 장담할 순 없지만, 발견이 너무 늦지는 않은 덕에 최악은 면할 듯싶습니다. 확실한 건 치유가 조금 더 진행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은 루드바하가 천천히 르베나에게 다가가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 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르베나.”

루드바하의 부름에 르베나가 애써 표정을 감추며 언제나처럼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잘게 떨리고 있는 르베나의 손끝이, 그리고 계속해서 굳어 있는 르베나의 얼굴이, 멈춘 듯 깜빡이는 그녀의 적안이, 루드바하의 눈에는 아프게만 박혀와 그는 르베나를 바라보며 최대한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벨디온은 강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르베나를 아낍니다. 그러니 르베나를 아프게 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겁니다.”

움찔.

루드바하의 말에 심장의 한 부분이 베인 것처럼 놀란 르베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라웅의 말을 듣고 내내 떠오르던 생각들,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던 잔상들.

아직 회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돌아가고 싶은 시간에 남아 있던, 그녀를 감싸다 죽어 버린 기사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그녀의 앞을 막아서던 큰 그림자들. 그래서 이제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소중해진 그들, 아벨디온.

만약 그들이 또다시 다친다면, 또다시 이 세상에서 그들이 사라진다면… 그리고 그게 그녀가 너무나도 아끼는 디오니스의 백성이고 또, 아벨디온이라면…….

르베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고 손에는 어느새 조금씩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르베나가 지켜주지 못한 사람들. 그것이 르베나에게 단 하나 역린이 되어 있었다.

단순히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르베나는 어지럽게 얽혀 들어오는 수많은 감정들에게서 선뜻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르베나.”

그런 르베나를 보고 놀란 루드바하가 서둘러 그녀를 불렀다.

“르베나!!”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어린 날 혼자 눈물을 쏟던 그 어딘가로 가 버렸는지 계속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점점 가빠지는 호흡 때문인지 괴로운 얼굴로 적안에 조금씩 눈물이 고여가는 르베나를 보며 루드바하가 조심스레 큰 손바닥으로 천천히 그녀의 한쪽 뺨을 감쌌다.

움찔.

따듯하고 큰 누군가의 손바닥이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에 닿아 오자 그 온기에, 그 안정감에, 또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각에, 놀란 르베나가 어느새 제 눈앞에 가까이 와 있는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좋아합니다, 르베나…….”

그리고 이어진 루드바하의 고백에 르베나는 아주 잠시 지금의 상황마저 잊고 놀라고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루드바하가 자신의 고백에 놀란 르베나를 보고 조금 웃다가는 긴 손가락으로 놀란 그녀의 눈 밑을 조심스레 쓸며 말했다.

“이런식으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충격이 없으면 그대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아서…….”

이어진 그의 말에도 여전히 대답 없이 굳어 있는 르베나의 모습에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인 루드바하가 말했다.

“무서워 마십시오. 두려워 마세요. 그게 무엇이든 슬퍼 울지 마십시오, 르베나. 내가 그대를 좋아합니다. 그대가 알면 놀랄 만큼 내가 그대를 좋아합니다. 그러니 그대를 두렵게 하는 것도, 무섭게 하는 것도, 슬픔에 울게 하는 것도 제가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다정한 시선은 붉은 눈동자를 절대 피하지 않았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르베나. 내가 그대를 좋아하는 만큼, 딱 그만큼만 그대가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화아악-- 루드바하의 깊은 벽안이 불안과 초조함으로 박동 치던 르베나의 심장에 가만히 박혀 들어왔다.

두근두근.

아벨디온에 대한 불안함 때문인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들은 낯설고도 생소한 고백 때문인지, 자꾸만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르베나의 붉은 눈이 잘게 떨렸다.

동시에 두려움, 초조함, 그리고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루드바하가 건넨 낯선 감정이 르베나를 조금은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화악-- 그리고 그 순간, 르베나와 가깝게 맞대고 있던 루드바하의 전신으로부터 부드럽고 따뜻한 신력의 바람이 불어와 르베나와 그의 온몸을 천천히, 그리고 빈틈없이 감쌌다.

디오니스의 습격, 루드바하의 고백.

르베나는 이 두렵고도 생소한 날을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루드바하의 신력이 빈틈없이 감싼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에 대한 불안은,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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