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35)
루드바하는 어느새 바흐란의 위에서 그에게 적은 양의 신력을 끊임없이 보내 주고 있었다.
“으… 으윽……!”
루드바하의 신력이 들어갈수록 바흐란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이를 바라본 루드바하가 살짝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그대의 팔에 끊어진 부분이 많아 갑자기 힘을 주면 완전히 절단될 수 있다. 적은 양의 힘으로 천천히 치유하며 이어야 하니 많이 고통스럽겠지만… 참아라.”
다소 무뚝뚝한 루드바하의 말에 바흐란은 대답도 못 하고 고통에 빠져 신음했다.
몬스터들에게 찢겨 이미 너덜너덜해진 팔이 아주 천천히 자극되고 있으니 고통이 심각할 텐데도 바흐란은 애써 신음을 삼켜내며 제 품 안의 아이를 그 순간까지 놓지 않았다.
그런 바흐란을 보고 르베나가 말했다.
“아이는 기절한 듯해. 마력으로 훑으니 다친 부분도 없고. 그러니 바흐란… 힘을 내라. 아를이… 널 많이 걱정하고 있어.”
르베나의 말에 다시 희게 웃는 바흐란이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엄습하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때 네 명의 치유 세츠들이 다급하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사드의 배려로 율엔 가문에서는 수준급의 베이라와 세츠 뿐만 아니라 제국에서도 귀하다는 치유 세츠들도 많이 보내주었다.
다가온 치유 세츠들이 바흐란의 상태를 보더니 심각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이 상태로는 치유할 수 없습니다. 환자를 넓은 곳으로 꺼내 팔다리를 모두 편 상태여야 제대로 접합이 가능합니다. 유파시드 님께서도 이 상태로는 오래 유지하기 힘드실 겁니다.”
그들의 말에 르베나가 침착하게 물었다.
“잔해를 모두 치울 순 있지만 꺼내도 괜찮은 상태입니까?”
르베나의 물음에 한 치유 세츠가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상당히 힘들긴 합니다. 얼핏 보아도 팔이… 심각해 보여 그 과정에서 팔이 절단이라도 된다면 다시 붙일 순 있으나 기능에 문제가 생깁니다.”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
바흐란은 검사다. 그것도 스스로의 검술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자칸의 검사.
검사에게 팔은 명예고 생명이다.
그리고 르베나는 그런 바흐란에게 명예와 생명을 뺏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르베나가 곧장 치유에 집중하고 있는 루드바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드, 플라잉 상태로 치유가 가능하십니까?”
르베나의 짧은 질문속 내포된 많은의미를 파악한 루드바하가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가능은 합니다만, 하지만 르베나… 그건…….”
“그럼 해 주십시오.”
움찔.
감히 유파시드에게 명령이라니 유파시드가 힘의 근원이고 중심인 치유 세츠들에겐 너무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장면이 방금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아무리 베이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해도 왕국의 공주가 제국의 황제에게 명령이라니.
말끝에 ‘주십시오’가 붙었을 뿐 그건 명백한 명령이었다.
치유 세츠들은 순간 멍한 기분으로 루드바하와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놀랄 일은 따로 있었으니, 하늘 같은 유파시드가 르베나의 말 한마디에 마음에 차지 않는단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순순히 공중에 뜬 상태로 바흐란을 치유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그것도 입을 삐죽 내놓고선.
얼이 빠진 치유 세츠들을 본체만체하며 르베나가는 제 손을 바흐란을 둘러싼 건물의 잔해를 향해 두었다.
곧 르베나의 손에서 검붉은 마력이 스멀스멀 나와 건물의 잔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러자 바흐란을 덮고 있는 거의 모든 잔해에서 르베나의 마력이 차올랐다.
가시적인 마력, 그것도 여기저기 질서 없이 흐트러진 모든 잔해에 뒤덮인 수준의 가시적인 마력이라니.
방금의 일이 잊고 꿀꺽 긴장된 침을 삼킨 치유 세츠의 놀람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화아악-- 르베나가 눈을 감고 집중하자 건물의 잔해를 둘러싼 르베나의 마력이 점점 색을 달리했다.
검붉은색에서 점점 검은색이 빠지며 곧 타오를 듯한 강한 붉은색이 되었고 이것이 점차 옅은 노란색, 흰색으로 바뀌더니 이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오싹.
그 모습을 본 한 세츠의 발끝부터 차가운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기 시작했다.
‘가시적인 마력을 저런 수준으로 콘트롤하는 것도 놀라운데 자신이 가진 마력의 성질을 바꾸다니… 르베나 공주는… 괴물인가.’
루드바하가 들었다면 매서운 시선을 받을 만한 생각을 이어나간 세츠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게 떠진 건 그때였다.
“기화.”
르베나의 입에서 나온 작은 말에 웅웅— 잔해 속으로 들어갔던 르베나의 푸른색 마력들이 반응하듯 소리를 내더니 이내, 화아악-- 소리와 함께 바르한을 둘러싼 모든 건물의 잔해더미들이 한순간 가루가 되어 흩어진 것이었다.
“말… 도 안 돼…….”
제법 대단한 실력으로 수준급 치유 세츠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하나같이 모두 넋이 나간 듯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마력의 성질을 바꿔 순간적으로 아주 뜨거운 상태로 만든 것만 해도 다른 이들이 믿지 못할 수준인데 저 커다란 건물의 잔해들을 한순간에 가루로 만들다니.
이건 모든 마법사들에게 말해도 거짓말쟁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고 동시에 기적이었다.
보통의 마법, 그것도 순수한 신력이나 마력의 힘만으로 어떤 형태를 부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순수하고 농도가 짙은 신력이나 마력일수록 대상은 작은 입자의 크기로 부서지고 만다. 곧 부서진 크기가 작을수록 그건 엄청나게 집약되고 농도가 짙은 힘을 가진 마법사란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 강대한 힘을 가진 마법사란 얘기도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부피의 잔해를 모두 알갱이도 아닌 가루로 날려버린 저 베이라는 도대체 얼마나 강하고 압도적인 실력의 마법사라는 것인가.
사정없이 떨려오는 치유 세츠들의 시선도 모른 채 르베나는 순간적으로 소모된 엄청난 힘과 더운 자칸의 날씨로 인해 흘러내린 땀을 가볍게 닦아 내며 평소와 같이 무감정한 얼굴로 흩날리는 가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르베나가 다시 힘을 모을 찰나,
“루드.”
가벼운 언령 마법과 함께 그 가루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이, 이건 또… 뭐…….”
루드바하의 행동에 치유 세츠들은 다시 한번 심각한 충격에 부딪혔다.
가루를 흩날려 보내는 게 아니라 아예 없앤다는 것은 가루들을 또 다른 이공간으로 보내버린단 뜻이었기 때문이다.
텔레포트와 비슷하지만, 마력이나 신력을 담지 않은 아주 미세한 것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마법. 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마법을 대면한 것이다.
엄청난 부피를 순식간에 가루로 만든 베이라와 그 수많은 가루를 한순간 이공간으로 보내 버린 세츠.
치유 세츠들은 그들이 과연 이곳에서 치유 신력을 발휘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 애초에 우리는 세츠나 마법사란 수식어를 붙여도 되는 것일까 하는 원론적인 고민에 봉착했다.
대단하다 일컬어진 그들의 상식도 가볍게 뛰어넘어 버린데다 모두 힘 하나 들지 않아 보이니.
이 넓은 지역을 가장 빠르게 해결한 것도 이미 놀라웠는데 이들이 숨 쉬는 것처럼 부리는 마법의 수준은 평생 기억하고 곱씹어 보고 싶은 지향점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이 경이롭고도 대단한 마법사들에 대한 생각을 더 오래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눈앞에 선 대단한 베이라 마법사가 그들에게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자리에 함께하는 모든 치유 세츠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공손한 태도로 르베나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검사입니다. 검사의 명예와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솨아악-- 사막에 불어오는 한 자락 뜨거운 바람과 흩날리는 검은 머리의 베이라.
르베나를 보는 치유 세츠들이 선망과 동경이 가득 담긴 눈으로 힘차게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저희의 뼈를 갈아 넣어서라도 저분의 명예와 생명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순간, 치유 세츠들의 때아닌 군기에 르베나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담겼다.
“맙… 소사.”
그리고 르베나의 미소를 본 그들은 이번엔 다른 의미로 얼이 빠진 듯 몽롱한 시선을 빼앗겼다.
‘천상의 미소다.’
‘심장이 멈춰 버렸다.’
‘이건 꿈이 분명하다.’
르베나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며 저마다의 생각에 빠진 순간은 억겁 같았건만, 막상 그들을 그곳에서 빼낸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급하지 않은가 보군요.”
부드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어렵게 고개를 돌린 모두의 몸이 순간적인 공포에 얼어버리고 만 것이다.
“극상의 아름다움. 그 미소를 본다면 너의 생은 거기까지다.”
유파시드에 대해 알음알음 전해지는 소문을 떠올린 그들은 후다닥 바흐란에게 달려가 신력을 뿜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 막 엄청난 꿈에서 깨어나 생애 마지막 치유를 시전하는 마법사처럼 절실하고 열정적으로.
하지만 그렇게 모든 순간이 조금은 느리고 또 조금은 사막의 열기처럼 뜨겁게 흘러가던 순간의 정적은 오래가지 못했다.
위잉- 위이잉- 르베나의 폼멜 속 루비와 루드바하의 목 아래 위치한 다이아몬드가 기다렸다는 듯 세차게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더운 열기가 사방에 아지랑이를 만들어 냈다. 불어오는 바람마저 뜨거워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그 가운데 들려오는 통신구의 소리에 르베나는 순간 발끝이 아스라이 꺼져 버리는 아찔함을 느꼈다.
사막의 한가운데, 자꾸만 울려오는 두 사람의 통신구 소리가 흩날리는 바람에 멈춘 것은 그즈음의 어느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