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34)
청량한 바람이 불어온다.
모든 대지를, 반짝반짝 빛을 내며 솟아오르는 작은 새순을, 추악한 인간의 욕망을, 그리고 구슬프게 울어 재끼는 누군가의 눈물을 시원하고 달콤하게 감싸줄 것만 같은 바람이, 불어온다.
불어온 바람이 새카맣게 물든 이마께의 잔머리들을 사정없이 괴롭히며 식은땀으로 젖은 그녀의 이마도 식혀 준다.
그렇기에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오는 짙은 피 냄새도, 그 바람결에 더욱 흐드러지게 흔들리며 퍼져 오는 작은 비명 소리도, 익숙한 누군가의 고통과 땀과 피도 더욱 선연하게 그녀, 르베나에게 닿아 왔다.
“…아…….”
차마 나오지 못한 말은 신음이 되어, 고통이 되어, 절규가 되어 르베나의 온몸을 잘게 흔들고 그녀의 붉은 눈을 처절한 고통으로 내몰았다.
“어떻게… 어… 떻게…….”
르베나 답지 않게 자꾸만 말이 늘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녀 옆에 자리한 루드바하도, 다른 이들도 차마 그녀의 얼굴을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들의 모습도 르베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르… 베나.”
한참 동안 숨을 참다 겨우내 터진 첫 숨처럼 뱉은 루드바하의 부름에 르베나가 아래로 시선을 고정하며 되뇌었다.
“…꿈… 입니다. 이건… 이건 꿈입니다. 이곳은, 저들은, 절대… 절대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이나… 두 번이나 그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루드. 그러니 이건 꿈입니다. 꿈… 이어야만 할 겁니다.”
말을 이을수록 점점 강한 억양이 실리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의 떨리는 시선이 그녀, 르베나에게로 향했다.
곧 르베나를 향하는 그의 시선이 안타까움과 아픔과 연민, 그리고 알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의 소용돌이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며 그녀를 소리 없이 불렀다.
그러나 루드바하의 소리 없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르베나 몸 안의 모든 마력은 깊은 분노와 처절하게 찢기는 슬픔으로 맺어져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단 몇 초만의 일이었다.
몇 시간 전.
“그럼 베이라 마법사 1명, 세츠 마법사 1명, 자칸의 기사 2명이 4인 1조가 됩니다. 세츠들이 농도가 조금 짙은 실드마법을 퍼뜨려 마법이 통하지 않는 부분을 감지하면 베이라가 바로 그곳으로 가 몬스터의 결정을 발견하고 바로 파괴합니다.”
눈동자만큼이나 시리도록 푸른 목소리가 수색자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발견한 자칸의 시민들은 힘을 아끼기 위해 신호탄으로 표시합니다. 죽은 사람은 검은색, 경상의 경우는 노란색 신호탄을 터뜨리고 이 경우 동행한 기사들이 사망한 사람들과 경상 환자들을 옮깁니다.”
모두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로 향해 있었다.
“중상일 경우 붉은색 신호탄을 터뜨리며 이 경우 여기에서 사람들을 살피던 치유 세츠들이 곧바로 그곳으로 갑니다. 중요한 것은 결정을 파괴한 다음에도 반드시 확인 마법을 통해 그 이상의 결정이 없는지를 확인하는 겁니다.”
율엔 가문의 마법사들이 도착하기 무섭게사람들을 모으고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젠의 성기사들이나 라웅, 유안 만이 익숙한 냉정하고 빈틈 없는 날카로움만이 맴돌 뿐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존대였지만 그 존대 안에 도사리던 존중, 부드러움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다만 그 자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과 이 사람이 제국이 황제라는 압도적인 각인만이 자리했다. 흠칫.
순간, 루드바하의 말을 듣고있던 르베나가 몸을 부르르 작게 떨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허리에 있는 검의 폼멜(검의 가장 끝부분) 중앙에 박혀있는 붉은 보석에 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 조금 있다가는 곧 폼멜 전체를 손으로 꽈악 쥐며 날카롭게 미간을 좁혔다.
“그럼 준비 후 바로 지정된 장소로 가서 탐색을 시작합니다.”
르베나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루드바하는 티나지 않게 모든 지시사항을 빠르게 전한 후 모두가 준비로 조금 부산스러운 틈에 르베나를 돌아보았다.
르베나를 걱정스레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 누군가 보았다면 다른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르베나 무슨일이 있습니까?”
자칸에 와서 처음보는 걱정이 가득한 그의 부드러운 얼굴에도 불구하고 르베나가 뭔가 초조한 듯 그에게 말했다.
르베나에게서는 볼 수 없는 종류의 초조함이었다.
“뭔가 느낌이 안 좋습니다. 생각해 보니 마법을 막는 결정이라면 통신구 역시 막히는 게 아닙니까? 확인해보니 지금 제 통신구에 마력이 흡수되지 않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 역시 흰색의 긴 로드를 하나로 엮는 곳에 위치한 마름모꼴의 다이아에 신력을 주입했다가 곧바로 율엔 가문의 마법사들에게 물었다.
“혹시 이쪽으로 오는 텔레포트 중 마법을 방해하거나 파훼하려는 시도는 없었습니까?”
루드의 질문에 마법사 중 대표 격인 자가 나서 말했다.
“안 그래도 저희끼리 그 얘기를 하던 참이지만 어떤 방해나 힘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데 지금 켄느로의 통신구가 먹통인 걸로 보아 결정의 힘이 통신 정도의 마법까지만 막는 것으로 보입니다.”
율엔 가문 마법사의 말에 루드바하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르베나에게 말했다.
“저자의 말대로 결정이 막는 힘은 통신구의 방해, 그리고 결정이 많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직접적으로 행해지는 마법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 정도의 힘으로는 다른 곳에서 열고 오는 텔레포트까지는 막지 못합니다.”
르베나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르베나. 디오니스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반드시 가스트가 그대에게 올 겁니다. 또한 젠에도 항시 디오니스의 돌발상황에 대비하도록 명령을 내려 두었습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조금은 불안을 떨친 르베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르베나의 표정이 맘에 걸린 것인지 루드바하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르베나, 혹시 계속 마음이 불편하다면 디오니스로 가세요. 이곳은 나와 다른 자들이 맡겠습니다. 불편해 하는 그대를 보는 내 맘이 더 안 좋습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눈을 들어 그의 심해같이 어둡고도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 벽안의 어두운 부분이 잠시 일렁이자 르베나의 불안한 마음이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듯 멀어져 갔고, 눈의 맑은 부분을 보자 다소간 불안했던 기분이 사라지며 점차 편안한 숨이 돌아왔다.
르베나가 곧 루드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고는 말했다.
“아닙니다. 디오니스를 믿습니다. 또한 루드의 말씀처럼 위험이 생겼다면 가스트는 무조건 내게 알려왔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흐란을 찾아 내겠다고 아를에게 약속했으니까요.”
르베나의 말에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빠르게 정리해 보죠, 르베나.”
* * *
펑.
퍼벙.
자칸의 하늘위로 많은 신호탄이 울리고 있었다.
어느새 아침을 맞은 덥고 햇빛이 강한 자칸의 하늘과 어울리지 않는 노란색과 붉은색 그리고 검은색의 신호탄이 여기저기서 하늘로 올랐다.
검은색의 연기가 차마 올려다볼 수도 없도록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침범할 때마다, 자칸의 백성들이 내뱉는 울음소리가 불어오는 바람소리처럼 점점이 번져갔다.
그렇게 또 하나의 검은 신호탄이 멀리서 타오를 때, 르베나는 루드바하가 말한 곳으로 가 결정을 찾아 가볍게 파괴했다.
르베나와 루드바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맡았지만 일의 속도는 월등히 빨랐다. 어느새 마지막 지점의 마지막 결정.
결정을 파괴하는 순간 르베나는 이 마지막 결정의 파괴에 그, 바흐란의 기척이 생겨 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결정을 파괴하고 난 직후, 르베나가 빠르게 건물 더미의 어떤 지점으로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아주 가볍고 조심스럽게 착지했다.
탁. 가벼운 착지 소리와 함께 르베나의 붉은 눈이 건물의 잔해 속 큰 틈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 랜… 만이네… 하아… 르베나… 공… 주 아… 니… 쿨럭… 왕녀… 전… 하… 신가.”
그토록 찾았던. 마지막 구역이기에 더욱 애타게 찾았던 그, 바흐란을 보았다.
바흐란의 인사가 반가웠다. 언제나처럼 장난기 넘치는 그의 인사가 이렇게나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맑고 형형했던 그의 녹안이 조금만 덜 빛을 읽었다면, 언제나 건강미 넘치던 그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조금만 덜 푸석했다면, 그의 곁에 흥건한 검붉은 피가 조금만 더 적었다면, 그리고 옆으로 누운 채 아이를 감싼 그의 팔이 조금만 덜 상했다면 그의 인사가 몇 배는 더 반가울 거라 르베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르베나는 티를 내지 않고 옅게 웃으며 인사했다.
“살아 있을 줄 알았다, 바흐란.”
르베나의 인사에 바흐란이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와… 이… 정도는 돼야… 울컥. 르베… 나가… 웃어… 주는… 구… 나… 하아…….”
바흐란의 상태를 본 르베나가 곧바로 하늘로 붉은 신호탄을 세 개 쏴서 올렸다. 동시에 르베나의 표정을 본 루드바하가 어느새 그들에게 다가왔다.
루드바하를 본 바흐란이 잠시 인상을 쓰더니 인사말을 읊으려 하자 루드가 빠르게 말했다.
“인사 따위는 됐다, 바흐란 왕자. 곧 치유 세츠들이 올 테니 말을 아끼고 힘을 아껴라. 그게 줄곧 널 찾아 헤맨 르베나에 대한 예의다.”
루드바하의 말에 바흐란의 흐린 눈이 르베나를 보았다가는 쓰게 그만 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