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59화 (159/276)

159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31)

실드를 유지한 지 벌써 한 시간.

젠의 마법학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실드를 배운 학생들에게 한 시간은 사실상 한계 그 이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릴의 동기들도 하나씩 코와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내며 고군분투 중이었다.

기사들과 함께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몬스터떼를 몰아가며 점점 멀리 사라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

제일 먼저 달려들어 가장 많은 몬스터들을 베어 내고 길가에 쓰러져 있던 아이 하나를 감싸다 몬스터들에게 물어뜯긴 채로 건물의 잔해에 깔려 버린 바르한 왕자.

“크흡……! 흐… 흑…….”

다시금 입가로 터져 나오는 선혈과 더 이상 자리가 없는 실드들.

눈물이 흘렀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여워서, 그들의 비명 소리가, 살려 달라는 애원이 숨을 쉴 수 없도록 아프고 아파서. 그래서 자꾸만 분노가 커졌다.

그들 앞의 나는 여전히 무력해서, 아직도 나는 그들을 모두 구해 줄 수가 없음에.

그래서일까, 그 사람이 생각나는 건.

절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그 사람이 점점 힘이 빠져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너무도 뚜렷하게 생각나는 이유는.

“흑… 저… 잘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데… 흑… 그… 런데… 너무… 너무… 무서워요… 흑… 전… 아직도… 너무… 무력해요… 베나 언니.”

스릴이 누군가를 그리며 점점 흐려지는 자신의 실드를 보는 그 순간, 바로 그 찰나의 순간 주변에서 큰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게…….”

“저거, 혹시…….”

주변의 웅성거림을 듣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스릴의 눈이 더없이 크게 떠졌다.

“으흑… 으흑… 흑…….”

주르륵, 주르륵. 하늘을 올려다보니 힘겹게 참아 왔던 눈물이 더는 막을 길 없이 쉼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텔레포트 공간이 하늘에 열린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큰 공간 가득 수백의 몬스터가 나오고 있었다.

이미 자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았건만, 다시 한번 열린 공간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은 이제까지가 장난이었던 양 더 크고 더 흉측하고 더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뼈끝까지 차오른 공포가 스릴의 숨통을 조여왔다.

그리고 모두의 감정에 반응하듯 여러 사람을 감싼 실드들이 이곳저곳에서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흑… 흑…….”

스릴의 흐느낌이 거세어지고 실드를 유지하고 있는 동기들의 동요도 심해졌다.

그리고 마치 제 편의 등장을 느끼듯 몬스터들은 여태까지보다 더 강하게, 공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꺄아악!!!”

“안 돼! 안 돼!! 여보!!!”

귓가에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한 층 더 크기를 키워 들려왔다.

울컥. 이번엔 스릴의 입가에서 검붉은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 한쪽에서는 이젠 끝이라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스릴은 다시 한번 다리에 힘을 주고 제 앞으로 달려오는 여성을 향해 힘껏 달려 나갔다.

다리에 자꾸만 힘이 빠지고 눈앞이 흐려져도 스릴은 멈추지 않았다.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 여성과 그 여성의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는 스릴의 실드만은 더 견고해지고 강해졌다.

스릴은 눈앞의 백성을 두고 망설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자꾸만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바람에 맡기며 달려 나갔다.

끝없이 달렸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탁!!

휘청거리는 여자의 손을 빠르게 낚아챈 스릴이 재빨리 여자와 아이를 감싸 안고는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쥐어 짜내 하나의 실드를 만들어 그들에게 씌워 주었다.

“고, 공주님! 안 돼요, 공주님!!”

한 사람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실드. 그 실드 안에 아이를 안은 여자가 들어섰다.

그리고 그 여인은 실드 밖에 무방비하게 선 스릴을 보며 소리쳤다.

“안 돼요! 공… 흑… 공주님!!”

자꾸만 실드 밖으로 나오려는 여자를 향해 스릴은 괜찮다는 의미로 한 번 웃어 주었다.

털썩.

그리고 그대로 스릴은 바닥에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마지막 힘이었다. 스릴이 누군가를 지켜 줄 수 있는 마지막 마력.

울컥.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은 스릴의 입가를 온통 피로 물들였다.

더 이상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얼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소진한 힘, 그리고 이젠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몸.

그럼에도 스릴은 웃었다. 웃을 수 있었다.

“봤어요… 내가… 하아… 내가… 봤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순간.

휘이익----! 티하나 없이 맑고 찬란한 백색에 가까운 금빛의 물결. 홍수같이 거대한 힘, 모든 정의를 대변하는 힘, 신력이 자칸의 전역을 빠르고 강하게 휩쓸었다.

화아아아악--. 따뜻하고 안전한 빛. 모두를 포옹하고 견고하게 지켜주는 빛. 모든 세츠들의 힘이 다시 솟아오르게 하는 세츠들의 근원.

“이, 이건…….”

누군가가 제 몸에 닿아오는 빛에 놀라 더듬거렸다.

그리고 누군가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소리쳤다.

“오오… 오……! 유파… 시드… 여…….”

누군가의 오열 같은 부름에, 또 누군가의 떨려오는 부름에 유파시드의 신력이 자칸의 전역을 홍수처럼 거세게 매만지며, 이미 형성되어 있는 세츠들의 실드를 더 강하고 단단하게 받쳐 주었다.

또한 무방비하게 노출된 모든 이의 몸에는 그의 가호를, 몬스터 떼와 싸우는 자칸의 모든 이에게는 실드를 둘러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 맙소사…….”

누군가의 얼빠진 소리와 함께 하늘을 가득채울만큼 크고 난폭한 검붉은 마력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유파시드의 실드 안에서 넋이 나간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마력. 하지만 결코 불길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그 힘이 이내 성난 번개처럼 자칸의 곳곳에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한 것이다.

콰콰광!! 쾅쾅! 콰과과광……!!

자비 없이 몰아치는 번개 같은 마력에 모두가 싸우던 것도 잊고 그 빛에, 그 힘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 스릴만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오는 제 몸에 꽈악 힘을 주며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았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눈물이 스릴을 채웠다. 꽉 막힌 목, 뜨거운 덩어리들이 자꾸만 넘어오는 그 좁은 목으로 스릴은 가까스로 소리 내어 외쳤다.

그녀에게 닿길. 그녀에게 들리길. 나의 이 작은 소리가 부디…….

“르… 베나… 언니… 흑.”

그리고 그 순간, 마치 스릴의 소리에 반응하듯 하늘에서는 더 강한 마력의 폭풍우가 모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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