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30)
몇 시간 전, 마법학원에 있던 스릴은 젠의 공격과 더불어 뜻하지 않은 소식을 듣고 말았다.
“스릴, 큰일 났어! 지금 자칸, 너희 나라에도 몬스터들이 들이닥쳤대!”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동기가 전해 주는 자칸의 소식에 스릴은 떨리는 제 손을 꽈악 붙잡았다.
그가 전한 말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세츠들의 성지인 젠도 아니고 강력한 실드의 보호를 받는 켄느도 아니었다. 강력한 왕과 공주가 보호하는 마를한과 디오니스도 아니었다.
자칸, 제국과 함께 모든 왕국을 통틀어 오직 기사들의 나라가 되어 버린 자신의 나라.
그 자칸에 몬스터라니.
신마전쟁이후 자칸에 남아 있던 조금의 세츠는 모두 지원이 좋은 젠으로 떠났고, 알려진 베이라라고는 오직 스릴 하나였다.
“자칸에… 우리나라에 몬스터라니……!”
모든 소식을 전해 들은 스릴의 사지가 사정없이 떨려리다가는 이내 온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버렸다.
기사들만으로 몬스터를 막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사들 중 태생적으로 마력을 가진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오직 성기사들이나 아벨디온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힘이 없는 수많은 백성들을 보호하며 치러야 하는 전투라니.
지금 이 시간에도 수없이 많은 사상자가 자칸에 뿌려지고 있으리란 걸 스릴은 직감했다.
그래서 스릴은 뻣뻣하게 굳어 버린 제 손을, 제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새 붉어진 눈시울에도 힘을 주어 버텼다.
‘울지 않아, 나는… 나는 결코 울지 않을 거야!’
지금 이 시간에도 자칸에서 백성들을 보호하고자 선두에 서서 검을 휘두를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있다.
그리고 스릴 또한 백성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자칸의 공주.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를 내며 스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휘청거리는 듯한 다리에 힘을 주고 스릴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동기들에게 애써 웃어 주며 스릴은 조금씩, 그리고 좀 더 빠르게 제 발을 움직였다.
아직 할 수 있는 마법은 고작 몇 명을 보호할 작은 실드뿐이라 해도, 그 몇 명의 목숨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이제 알기 때문에.
르베나에게 배운 그 깨우침을 스릴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고 있기에. 빠르게 달려 마법학원에서 자칸으로 바로 통하게끔 열어 준 텔레포트의 앞에 스릴은 망설임없이 섰다. 몇 안 남은 고대의 마법진으로 새겨진 텔레포트.
누구나 일정량의 신력이나 마력만 주입하면 발동하는 이 텔레포트는 전투 시 학생들의 안전한 도피를 위해 남겨진 것이었다)
덜덜덜. 제 뜻과는 다르게 어디서 소리라도 나는 것처럼 계속해 떨리는 손을 스릴은 힘주어 맞잡았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도망치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릴은 그럴 수 없었다.
더 이상은 도망치지 않겠다고. 언젠가는… 그녀도 훌륭한 베이라가 되어 반드시 르베나의 옆에 당당하게 서고 말거라 결심했기 때문에.
곧 마음을 다잡은 스릴이 텔레포트를 열어 준 마법학원의 교수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스릴을 바라보는 교수의 마음 역시 복잡했다.
[젠으로의 습격 발생시, 모든 교직원은 마법학원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학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마법학원 교직원들이 지켜야 할 첫 번째 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제자를 혼자 몬스터들과 사투를 벌이는 고국으로 보내 주면서도 따라갈 수 없는 미안함에, 안쓰러움에 그는 차마 텔레포트를 빠르게 시전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조금 더 천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 텔레포트의 수식이 완성되기 직전.
다다다다. 타타닥. 타타닷.
수많은 발소리가 스릴과 그의 귀에 들려왔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교수님!!”
“엘포트 교수, 잠깐만 기다리게!”
많은 사람의 외침에 교수 엘포트는 잠시 수식을 중단했다. 그리고 스릴 역시 갑작스러운 소란에 문을 바라보았다.
곧 벌컥, 문이 열리며 수십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마법학원의 수많은 교수들과 스릴의 동기들이 함께 서 있었다.
“다 무슨 일이십니까?”
엘포트 교수의 물음에 자칸의 소식을 전해 준 동기가 말했다.
“저희도요! 저희도 스릴과 함께 보내 주세요.”
“뭐??”
뜻하지 않은 동기의 말에 놀라 되물은 건 오히려 스릴이었다.
그리고 그런 스릴의 동기들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한 건 엘포트 교수였다.
“이건 실습이 아니다.
이건 실전이야.
스릴도 자칸의 공주 신분이 아니었다면.
절대… 절대로… 보내지 않았을거다.”
엘포트 교수의 완강한 거절에도, 또 고개를 저으며 동기들을 만류하는 스릴의 모습에도 동기들은 씨익 웃으며 당황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곧 스릴의 동기들과 함께 온 교수 중 한 사람이 엘포트에게 말했다.
“저희가 허락했습니다, 엘포트 교수님. 안전한 곳에서 실드를 쳐서 백성들만 구하기로 약속하고 말입니다.”
한 교수의 말에 엘포트 교수가 놀라 소리쳤다.
“그래도 안 됩니다! 자칫!!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가 보호해 주지도 못하는 상황에 아이들만 보내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엘포트 교수의 말에 스릴의 동기 중 한 명이 나서 말했다.
“저희는 유파시드의 가르침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니 교수님,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의 말에 엘포트 교수의 얼굴이 곤혹과 당황, 그리고 대견함으로 물들어 갔다.
[모든 마법사들은 약자들을 구함에 있어 나이와 나라, 힘의 근원을 따지지 않고 하나가 된다. 그것이 가장 명예로운 마법사가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정의이다.]
루드바하가 새롭게 내세운 교칙은 이미 모두의 머릿속에 하나가 되어 있었다.
곧 뒤따라온 교수들이 저마다 하나둘씩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그중 몇 명은 스릴에게 다가와 본인들의 손에 들린 걸 전해 주었다.
“이건…….”
손안에 들어온 물건을 본 스릴의 눈이 하염없이 떨려왔다.
여러사람 중 떨리는 스릴의 손을 꼬옥 잡은 한 여교수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마석과 마법 도구들이다. 위급한 상황에 도움이 될 거란다. 그리고 이거…….”
이번엔 여교수가 내민 또다른 종이를 본 스릴의 녹안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교, 교수님 이건…….”
스릴과 눈을 맞춘 여교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의 것을 모아 놓으니 너희들에게 하나씩 줄 개수는 되더구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스릴. 망설이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이걸 쓰렴. 그리고 부디… 함께 가지 못하는 우리에게 돌아와 주렴. 부탁한다.”
점점 더 떨리는 제 손과 그 안에 든 물건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스릴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투, 투둑.
손에 들린 두꺼운 양피지에 맑은 물방울이 닿아 흐르고 있었다.
텔레포트 카드.
찢으면 곧바로 텔레포트가 가능한, 오직 아네벨 상회에서만 판매하는 물건으로 이 카드는 처음 출시되었을 때 모든 마법사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함께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텔레포트는 고위의 마법이기에 가능한 마법사 자체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크지 않은 마력으로도 증폭을 통해 텔레포트를 가능하게 하는 카드라니.
처음에는 모두가 사기라며 믿지 못했지만 곧 진짜 텔레포트가 가능하단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자 단 한 장에 젠의 수도 저택 한 채 값을 훨씬 웃도는 고가임에도 모든 마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구매에 혈안이 되었었다.
어떤 이들은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 또 어떤 이들은 카드의 수식을 풀어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하고자.
덕분에 카드는 고가임에도 곧잘 품절이 걸리는 아네벨 상회의 인기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귀한 카드를 스릴과 모든 학생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위하는 마음만으로 모두 모아 아낌없이 내어 준 교수님들의 마음에, 그리고 어떤 위험이 있는지 뻔히 아는데도 스릴을 따라나서겠다는 동기들의 마음에 스릴은 그만 눈물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그런 스릴의 옆에 비장한 표정의 동기들이 위치하자 모든 교수들이 저마다의 신력과 마력으로 교내에 설치된 텔레포트 수식에 힘을 불어 넣었다.
화악---.
아까와는 달리 빠르게 완성된 수식이 발하는 빛 속에서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가 번져갔다. 그리고 그곳에 저마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 아이들을 바라보는 교수님들의 얼굴이 보였다.
“절대… 절대 잊지 않을게요.”
스릴의 작은 말이 환한 빛과 함께 사라졌다.
“부디… 부디 저희 아이들을 지켜주세요…….”
간절한 교수들의 바람도 함께 실려.
* * *
“스릴!!”
자칸의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저마다 둘, 셋씩 짝을 지어 큰 실드를 만들고 백성들을 보호하던 스릴의 동기들. 그 중 누군가가 스릴을 불렀다.
“젠장… 이쪽은 다 찼어! 이제 우리 쪽 실드엔… 여유가 없어!”
쿵.
쿠쿵.
들려오는 동기의 절망스런 소리에 더 크게 박동하기 시작하는 제 심장박동을 느끼며 스릴이 고개를 돌렸다.
“흑… 젠장… 흐윽…….”
빽빽하게 자리한 수 십개의 실드.
그 실드들은 누가 보더라도 더 이상 틈이 없을 만큼 수많은 자칸의 백성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 온 힘을 다해 실드를 치고 자칸의 백성들을 구하려 노력하는 동기들을 보며 스릴의 눈가에는 다시 한번 눈물이 고여왔다.
이곳에서 보호할 여분의 자리는 점점 없어지는데 자칸을 피로 물들이는 몬스터들은 여전히 많았다. 그리고,
“아… 바… 마마… 흑.”
멀리서 기사들의 선두에서 검을 들고 몬스터 떼를 상대하는 자칸의 왕, 아버지가 보였다.
여기저기 상처가 가득한 몸으로 전투의 최전방에 나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그가, 목숨이 위험한 백성들을 보호하려 온몸으로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아내는 그가, 그럼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 표정이, 그 자세가.
스릴 공주의 맑은 녹안에 가득 담겨 왔다.
스륵.
그리고 그때, 마치 한계를 알리듯 스릴 공주의 코로 피가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