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57화 (157/276)

157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29)

“르베나.”

루드바하의 부름에 르베나가 유리엔 왕비를 바라보았다.

검붉은 눈동자가 저를 곧게 향하자 유리엔 왕비는 하얗게 질린 제 손을 꽉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요, 르베나 님. 아버지와 율엔 가문이 있는 한 저희는 지지 않겠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어요.”

그녀의 얼굴과 마주 잡은 두 손은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유리엔 왕비에게의 그 어디에도 망설임만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호안 왕자 역시 그런 유리엔 왕비 옆에 서 르베나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적지 않게 눈물을 흘렸기 때문인지 그에게서도 더 이상 망설임과 죄책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의지를 확인한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스트에게 말했다.

“가스트, 난 곧장 자칸으로 간다. 그대는 아를과 함께 디오니스로 가 주변국 상황을 확인하고 소식을 알려 줘.”

르베나의 말에 가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르베나는 곧바로 이를 반대할 게 분명한 아를에게 돌아서 말했다.

“아를, 자칸과 젠이 공격당했다면 다음은 마를한이나 디오니스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디오니스의 기사로서 네가 지켜야 할 곳을 지켜라.”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미간을 구기며 날카롭게 말했다.

“여러 번 말했지, 내가 지켜야 할 게 누군지. 게다가 자칸은 마법사도 부족한 국가야.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다고! 너 혼자 그 모두를 처리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하지만 르베나는 이를 악물고 아를을 마주 보았다. 그 굳은 시선에 아를은 결국 비겁할지도 모를 말을 입에 담았다.

“게다가… 디오니스가 위험하다면 더더욱 네가 가야지 르베나. 바흐란 그 녀석도 없다면 더더욱.”

어딘가 조급하기까지 한 아를의 말에 르베나의 검붉은 눈이 잠시 어둡게 침잠했다.

아를의 말을 충분히 무시하고 제 맘대로 할 수도 있지만, 최근 바흐란과 비교적 가까워진 아를의 마음을 알기에, 그리고 정말 디오니스가 위험하다면 제가 가야한다는 걸을 알기에 찰나 아를의 말에 잠시 머뭇거림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후우-.”

곧 작게 숨을 내어쉰 르베나가 아를의 금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나를 필요로 하는 건 자칸이다. 그곳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모른 척할 수 없어.”

“하지만 르베나……!”

아를의 다급한 만류가 섞인 부름에 르베나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 자칸에는 그들을 제대로 지켜줄 마법사가 없다. 하지만 디오니스엔 아를, 네가 있겠지.”

흠칫.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다시 한번 르베나를 만류하려다 언제나처럼 단호하고 망설임 한 점 없는 르베나의 눈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삼켰다. 그리고 그런 아를을 보며 르베나가 말을 이었다.

“믿는다. 너는 물론이고 가스트와 후벤, 아벨디온을. 또한 제노스 전하도 그 휘하의 많은 기사들도. 내가 아니라도 그들 모두가 반드시 디오니스를 지킬 거라고.”

반드시 내가 아니어도 그대들이 지키는 디오니가 얼마나 찬란했는지, 그대들의 피가, 검이 또 마법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나는 이미 한 번 보았으니.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았으니.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킨 르베나가 여전히 걱정 어린 눈을 하는 아를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난 그런 그대들이 지치기 전에 반드시… 그곳에 있을 거다.”

르베나가 잠시 떨려오는 아를의 눈을 한번 마주 보고는 돌아서며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전 가 봐야겠습니다. 부디 젠의 피해가 더 커지지 않길 바라며… 루드께서도 조심하십시오.”

곧바로 텔레포트 하려는 듯 마력을 움직이는 르베나를 보고는 루드바하가 제 마음속에 있던 조금의 망설임을 모두 지우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자칸에 저도 함께 갑니다, 르베나.”

“루드!”

르베나가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놀라 소리를 높이자 아를까지 당황한 눈으로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르베나야 명목상 모든 왕국의 위험을 지켜내는 아벨디온 기사단의 단장이란 신분이라도 있지만, 젠의 황제이자 세츠들의 중심인 그가 젠의 위험을 모른척하다니 제정신인가 하는 눈빛이 분명했다.

그러나 루드바하는 아무 걱정 없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젠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세츠들이, 그리고 성기사들이 결코 몬스터의 입성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자칸은… 아를 경의 말대로 마법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기사들도 아직 아벨디온과 같은 검기를 쓰지 못하니 몬스터를 대항해 피해를 막긴 힘들겁니다.”

의심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는 과연 정의를 실천한다는 세츠의 신념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대와 내가 함께한다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테니 젠에는 그 후에 가도 늦지 않습니다. 그대가 디오니스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믿듯,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르베나. 그러니 그대와 동행하겠습니다.”

가장 강한 베이라와 세츠가 자신의 나라를 제쳐두고 타국을 도우러 가는 아이러니.

무엇보다 디오니스야 아직 멀쩡하지만 이미 공격을 받고 있는 젠을 두고 타국을 도우러 가는 유파시드는 역사상 누구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세츠들은 모두 정의롭고, 악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고 하나, 그들에게 젠은 고향이며, 힘의 성지이고 또 그들이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세츠의 기원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타국을 구하러 가겠다는 유파시드의 아이러니에 단 한 사람, 아사드는 크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하핫. 하하하하하.”

상황에 맞지 않는 아사드의 웃음에 모두가 그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모든 시선에 개의치 않고 하하하 크게 한참을 웃은 아사드가 웃음이 가득 담긴 얼굴 그대로 루드바하를 보며 말했다.

“아, 오해 마십시오. 너무 기뻐서… 너무 꿈 같아서 그럽니다. 언젠가 루시드와 전쟁에서 나눈 말이 생각나 말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그런 꿈같은 일이 생기면 어쩌면… 아주 먼 미래에는… 베이라와 세츠들이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우는 날이 오지 않을까. 서로를 지켜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아사드의 웃음 가득한 얼굴에는 어느새 아련했던 젊은 날의 허항되다 여겼던 꿈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더없이 격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언제나 꿈꾸던 일. 베이라와 세츠들이 서로를 견제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이 부질없고 오랜 전쟁이 끝나기만 한다면.

어린 날, 전쟁으로 인해 죽어 가는 세츠와 베이라, 그리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꿈꾸었던 미래. 하지만 이루어질리 없으리라 생각한 미래.

그 미래가 지금 아사드의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사드의 말에 가스트 역시 감회가 남다른 눈으로 르베나와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곧 아사드가 얼굴에 남아 있는 여러 감정의 잔재들을 지우며 르베나와 루드바하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도 질 수는 없지요! 켄느의 상황은 여력이 충분하니 두 분의 뒤를 따라 곧바로 가문 휘하의 마법사들을 자칸으로 보내겠습니다. 부디 자칸의 무고한 이들을… 지켜 주십시오.”

아사드의 말에 르베나와 루드바하가 그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는 아사드의 얼굴에는 여전히 북받쳐 오르는 어떤 감정들이 가득해 보였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르베나와 루드바하는 곧바로 텔레포트를 시전해 자칸으로 향하기로 했다.

르베나가 힘을 쓰기 전 루드바하가 빠르게 저의 신력을 끌어올렸고, 곧 흰색에 가까운 금빛의 신력이 르베나와 루드바하의 몸을 빈틈없이 감쌌다.

빛과 함께 빠르게 사라지는 둘의 모습을 확인한 가스트 역시 어느새 모인 아벨디온 기사단과 아를, 아한과 함께 회색의 빛무리에 휩싸였다.

화악- 화아악-. 이윽고 두 개의 빛무리가 사라지자 유리엔 왕비의 응접실에는 어느새 켄느의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그럼… 우리도 가지요, 왕비님.”

유리엔 왕비를 보고 씨익 웃는 아사드의 말에 유리엔 왕비도 제 두 발에 단단히 힘을 주고는 어느새 잠에서 깬 아사벨 공주와 호안 왕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질 수 없지. 가서 보여주자꾸나. 우리 켄느가 바른길을 통해서도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 왕국인지 말이다.”

유리엔 왕비가 휙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어느새 깊어진 밤의 달빛이 유리엔 왕비의 얼굴에 가득 들어찼다.

곧게 편 어깨, 앞을 직시하는 흔들림 없는 얼굴. 어느 때보다 맑고 밝게 빛나는 하늘색 눈.

켄느의 역사상 길이 남을 긴 밤이 이제 시작되고 있었다.

* * *

“보호해라! 백성들을 보호해!!”

“으아악!! 내, 내 다리!!”

“궁, 궁을 사수하라!! 모두 궁을 사수해!!”

“사, 살려줘!! 으아악--!!!!”

수백의 몬스터들이 자칸 궁의 상공에 나타났다는 말이 사실이듯 장엄한 자태로 자칸만의 고급스러운 멋을 한 껏 뽐내던 궁은 이미 반 이상이 부서져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궁 이곳저곳을 무너뜨리며 날뛰는 몬스터들과 그런 몬스터들에 용맹하게 맞서는 사막의 자칼, 자칸의 기사들이 뿌연 자칸의 모래사막속에서도 또렷했다.

그리고 또다른 몬스터 떼는 어느새 궁을 지나 그 근처에 위치한 귀족들의 화려하고 큰 집들도 사정없이 때려부수고 있었다.

비명과 고함소리.

비릿한 혈향과 몬스터들의 역겨운 냄새.

살려달라는 외침과 함께 처절하게 울리는 극한의 울음소리.

그리고 그 속에서 아직은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힘껏 울려퍼졌다.

“노인들과 여자, 아이들은 모두 이리로 와요!!!!

어서 데리고 오라구요!! 흑… 어서!!”

처절한 아비규환 속 비명을 지르듯 내질러지는 소리.

두려움과 공포로 울음기가 가득하지만 절대 그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 꽉 막힌 목소리.

녹색의 마력이 형성한 단단한 실드의 밖에서 노약자들을 목이 터져라 불러모으는 소리.

그 작은 소리는 여기저기 뜯기고 찢겨져 나간 옷을 입고 온몸에 누구인지 모를 이들의 피를 묻히고서는 궁의 외곽에 형성한 실드로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모든 노약자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아앗! 으아앙— 무서워어엉”

그러다 실드로 달려오며 넘어져 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인파의 비명에 섞여 들려왔다. 순간 허겁지겁 달려가 아이를 안고 실드로 돌아오는 소녀, 스릴공주의 얼굴 가득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음성으로 계속해 소리쳤다.

“모두 이쪽으로 피해요!!

모두… 흑… 제발… 이리로 와요!!!”

아무리 소리를 쳐도, 비명처럼 소리를 내어보아도 제 앞에서 죽어나가는 수많은 백성은 줄지 않았다. 흩어지는 연약한 이들의 무고한 울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반 이상 무너져내린 궁.

스러져가는 기사들.

서로를 지키고자 몬스터의 앞에 작은 무기를 들고 선 무력한 자칸의 백성들.

비릿한 혈향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 또한 멈추지 않았다.

자국의 소식을 듣고 젠의 마법학원에서 제공해준 텔레포트로 바로 달려왔건만 제가 할 수 있는건 십여명을 보호할 이 작은 실드가 전부였다.

그것도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흑… 흑… 울지… 않아… 절대… 흑……!!”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스릴은 다시 한번 있는 힘껏 소리쳤다.

“제발 이리로 오라고. 제발 그것들에게 맞서지 말고 이리 와서 더 이상 죽지 말라고!!”

그리고 스릴의 귀에 절망스러운 소리 하나가 더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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