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56화 (156/276)

156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28)

루드바하와 르베나의 자리가 새롭게 마련되고 테이블에는 잠시 적막이 흘렀다.

르베나가 편안하게 과일을 먹는 모습을 확인한 루드바하가 이내 안심한 듯 제 시선을 아사드에게 옮기며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아사드 님. 이곳에서 뵙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더 크군요.”

보는 이의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미소로 건네는 루드바하의 말에 아사드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슬픔, 그리고 후회와 기쁨이 차례로 지나쳤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유파시드님. 멋지게 장성하셨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직접 뵈니 부모님의 외모를 모두 빼어 닮으셨군요. 특히 젊은 시절의 루시드를 쉽게 능가하시는군요.”

아사드의 말에 루드바하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버지께서 들으시면 아사드 님께 마석을 날리실 겁니다.”

루드바하의 농담 아닌 농담에 아사드가 크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그런 아사드의 웃음소리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유리엔 왕비였다.

10년동안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큰 웃음소리가 유리엔 왕비의 마음을 간지럽힌 것이다.

“두 분께서 인연이 있으신가 봅니다.”

미소를 머금은 유리엔 왕비의 말에 아사드가 나서며 말했다.

“유파시드님의 아버지인 루시드와는 신마전쟁 시절 함께 싸웠습니다. 대단한 실력의 세츠였음에도 실력보다는 외모로 유명했지만 말입니다, 하하.”

아사드의 말에 자리를 함께하는 모두가 크고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분위기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유리엔이 유일하게 웃지 않는 한 사람, 르베나에게 보기 좋은 미소를 담뿍 담아 인사를 전했다.

“르베나 공주님, 아니 단장님이라 해야 하나요.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아사벨을 구해 주고, 지켜 주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 모두를 구해 주셨으니 말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가득 담긴 유리엔 왕비의 말에 다정한 눈동자 여럿이 르베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친 르베나의 마지막 시선이 향한 곳은 유리엔 왕비의 품이었다.

유리엔 왕비의에게 꼭 안겨 어느새 잠든 아사벨과 그 옆을 지키는 호안 왕자.

이내 붉은 르베나의 입술이 열렸다.

“전 한 게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해낸 것은 이리란을 지키고자 한 어린 아사벨 공주님의 이타심, 자식을 지키고자 한 유리엔 왕비님의 깊은 모정, 그리고 옳은 것을 따르고 그른 것을 처단할 줄 아는 호안 왕자님의 판단력과 용기였으니까요.”

르베나의 담담한 말에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얼핏 듣기엔 겸손해 보이는 말이지만 르베나의 말투와 억양, 그리고 표정을 보면 자연스레 알수 있었다. 저건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담담함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에겐 담백한 사실이라는 것을.

르베나의 말을 들은 호안 왕자가 입을 열었다.

“르베나 님이 아니었다면, 결코 내지 못했을 용기입니다. 르베나 님이 아니었다면… 전 분명 잘못된 힘의 분출로 누군가를 다치게 했을 테니까요.”

미약한 죄책감.

호안 왕자의 말에 담긴 그 미약한 감정을 르베나는 기민하게 알아챘다. 그래서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힘을 개화한 것에 대해.”

르베나의 질문에 호안 왕자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호안 왕자를 보는 유리엔 왕비와 아사드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겼다.

첫 힘을 개화해 공격한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본인의 아버지였다. 항상 마음이 여리고 다정한 호안 왕자에게는 분명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안 왕자를 바라보는 르베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르베나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호안 왕자에게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누구이길 바라십니까, 감옥에 있는 케투아 왕이길 바라십니까?”

르베나의 물음에 호안이 놀라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아버지와 둘이 앉아있는 모습이라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르베나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케투아 왕과 함께 모두가 함께 앉는… 그런 걸 바라십니까?”

이번 질문에는 호안 왕자가 아까처럼 빠르게 대답하지 못했다.

‘모두가 함께 둘러앉은 테이블은 어땠을까?’

순간 호안 왕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은 그럴 듯했다.

하지만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케투아 왕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건 아사벨은 이 자리에 있지 못한다는 뜻임을. 그리고 아사드가 함께하지 못한다는 뜻임을.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호안 왕자가 힘을 개화하지 못했다는 뜻이라는 것을 말이다.

곧 마음을 굳힌 호안이 금안 가득 굳은 신념을 담아 답했다.

“아니오,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지금입니다. 지금이… 맞습니다.”

호안 왕자의 말에 르베나가 잠시 시간을 두었다 말했다. 다만, 이번 르베나의 목소리는 아까 질문을 던질 때처럼 차분하지만은 않았다.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 제 옆에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려주는 것. 그들이 제 앞에서 소리를 내어 웃고 울고 또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전 그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것을 위해 싸우리라 다짐했습니다.”

어딘가 재촉하는 듯한, 강제하는 듯한 목소리가 고요한 방에 울려퍼졌다.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왕자님께서는 무얼 위해 싸우신 겁니까?”

르베나의 얘기에 호안 왕자의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무얼 위해 싸웠냐고? 무얼 위해 아버지를 향해 힘을 개화했냐고?

문득 제 눈가가 화악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호안 왕자가 재빨리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며 대답했다.

“지금… 을… 위해서요… 지금… 이 순간… 어머니와 아사벨, 그리고 오랜만에 뵌 할아버님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요.”

대답을 뱉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서, 가슴에서 곧바로 내뱉어진 말이었다.

그리고 순간, 본인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 호안 왕자는 본인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스르륵 녹아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를 향해 힘을 겨누었다는 아주 작은 죄책감, 그 작고도 무거운 이름표 하나가 순간 제게서 영원히 떠났음을 느낀 것이다.

“…흐윽…….”

잘게 떨려오는 작은 어깨. 그보다 작게 새어 나오는 억눌린 흐느낌.

열아홉 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열다섯 살의 아한보다도 작은 그의 몸이 흐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 누구 하나 그를 애써 위로하거나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

지금 흘리는 그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케투아 왕을 향한 죄책감을, 그리움을, 미안함을 씻겨주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기에.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호안 왕자의 눈물이 멈추고 그가 약간은 부끄러움을 느낄 때쯤, 아한이 슬며시 르베나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부터 하고 싶던 말인데 여러 분위기에 말할 타이밍을 놓쳐오다 호안 왕자의 어색함을 무마시켜 줄 지금이 적기라 생각한 것이다.

“누나, 다친 곳은 없어? 걱정했어… 누나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냥…….”

맑은 녹안에 서려 있는 걱정을 본 르베나가 아한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친 데는 없으니 걱정하지 마. 그보다 실드를 쳐 냈다고 하던데 멋지네, 우리 아한.”

“…우리…….”

작게 르베나의 ‘우리’를 곱씹던 아한이 말갛게 웃으며 답했다.

“더 노력할 거야. 누나의 옆에 설 수 있을 때까지.”

아한의 말에 르베나가 짙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순간 테이블 내의 모든 사람들이 르베나의 미소에 시선을 고정했다.

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 흐드러진 듯 풍성하고 새까만 머리카락, 검붉은 보석처럼 빛나는 눈매와 도도하고 매혹적인 얼굴,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미소는 모두의 시선과 더불어 몇 사람의 심정을 꽈악 움켜쥐기에 충분한 것이었디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르베나의 옆에서 그녀가 다치지 않게 도울 것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아한.”

루드바하의 목소리와 환한 미소가 문득 아한을 향했다.

‘르베나의 옆자리라니.’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꼬마 베이라가 당당히 르베나의 옆자리를 말하는 게 거슬렸다.

그래서 아주 유치한 줄 알면서도 뱉은 말에 점점 구겨지는 아한의 표정을 보니 뭔가 조금 후련하기도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아한이 귀엽기도 했다. 아마 라웅이 봤다면 배를 잡고 깔깔 웃었겠지만 말이다.

순간 루드바하의 말에 아한이 르베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작고 세밀한, 그리고 아주 따가운 마력을 그에게 쏘아 냈다.

따끔.

아프지는 않은 하지만 매우 신경질 나게 따가운 아한의 마력에 루드바하의 푸른 벽안이 아한에게 한 번 향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피식 웃어 버렸다.

꼬마 베이라의 성격이 보통은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르베나에게 그녀가 좋아하는 밀크 푸딩을 건네주었다.

탁.

하지만 그 순간 들린 둔탁한 마찰음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문득 제 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구겨 버렸다.

두 개의 밀크 푸딩이 르베나의 앞에서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다.

건너편에 앉은 아를의 손에 제 손에 들린 것과 분명 똑같은 푸딩이 들려 있었다.

그것도 한 사람을 향해.

파바박.

마치 스파크가 튀듯 형형한 금안과 짙고 푸른 벽안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견제했다.

언제나 전투에서 르베나의 곁을 지키는 아를, 언제나 르베나의 상처를 누구보다 먼저 말끔하게 치유하는 루드바하.

서로가 서로를 마땅치 않게 바라보는 그 순간.

사삭, 르베나가 빠르고 간결하게 두 개의 푸딩을 받아 제 앞에 두었다.

“둘 다 고맙군요.”

짤막한 감사 인사와 함께 르베나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푸딩을 떠 먹었다. 하지만 아직도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루드바하와 아를 앞에서 테이블의 다른 일행들은 조심스럽게 침을 꿀꺽 삼켰다. 둘의 시선 사이에서 곧 스파크가 튀어 오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테이블을 팽팽히 조이는 긴장감은 오래가지 않아 깨지고야 말았다.

타다다닥, 탁.

순간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유리엔 왕비의 궁을 소란스럽게 울린 탓이었다.

그 소리가 이내 지척에 이르자 아를이 천천히 루드바하의 벽안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낮게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룬?”

“헉!”

“......헉?”

룬의 숨소리에 아를이 못마땅하다는 듯 따라 읊자, 룬이 제 고개를 절레절레 털어내며 차렷 자세로 말했다.

“부단의 주위에 검은 기운이 보여 그랬습니다!”

룬의 말에 아를의 금안이 시리게 빛나자 룬이 다시 헉,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 큰일 났습니다! 케투아 왕을 가둔 감옥에 켄느의 귀족들이 마법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났습니다. 저희보고 반란의 무리라고 하면서 당장 왕을 풀라고 합니다.”

룬의 말에 유리엔 왕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너무 빠르군요.”

루드바하의 말에 아사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엔 왕비의 안색을 살폈다.

케투아 왕을 가둘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아무리 부덕한 왕이라도 지금의 정세가 바뀌지 않길 바라는 이들은 있길 마련이고 더군다나 아사벨의 일을 모르는 귀족들은 지금의 사태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으니.

게다가… 아사벨의 일을 안다 해도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이를 무마시키려 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유리엔 왕비의 손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리고 그 순간.

화악---. 회색의 마력이 공간에 퍼지며 누군가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사드를 비롯한 루드바하와 르베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는지 당황한 기색 없이 모습을 드러낸 이를 바라보았다.

“할아… 버지?”

아한의 부름에 모습을 나타낸 이, 가스트가 유리엔 왕비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르베나를 향해 말했다.

갑자기 가스트의 마력을 느낀 순간부터 르베나의 심장 고동은 이미 조금 빨라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귀를 기울였다

“르베나 님, 루드바하 님, 큰일입니다! 현재 젠 제국과 자칸에 수백의 몬스터 떼가 출현했다는 소식입니다!”

난데없이 케투아 왕의 석방을 요구하는 켄느 마법사들의 출현에 이어 이런 급보라니. 하지만 루드바하는 당황하지 않고 가스트에게 물었다.

“젠에 습격이 가해졌다면 내가 모를 리 없습니다. 정보의 출처가 어딥니까?”

루드바하의 말에 가스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르베나가 가스트를 바라보자 그가 힘들게 말을 이었다.

“칸 님께서 급하게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루드바하 님께서 여기 계시니 함께 알려 달라고 말입니다.”

가스트는 지독한 비감이 서려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젠은 제국에 펼쳐져 있는 여러 실드 덕분에 내부 진입이 힘들어 국경에서 전투가 벌어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유파시드께서 아직 느끼지 못하신 것 같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칸에는…….”

가스트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르베나가 제 손을 힘주어 꽈악 쥐며 그를 바라보았다.

르베나의 시선을 마주본 가스트가 이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이곳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감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자칸의 궁 바로 위로 몬스터들의 순간이동 게이트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젠 제국에서는 15인, 자칸에서는… 67인의 사망자가 나왔고, 바흐란 왕자님께서… 전투 중 사망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쿵, 쿵쿵.

누구인지 모를 이의 심장 소리가 바닥을 뚫듯 거칠게 박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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