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55화 (155/276)

155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27)

소란스럽고 흥분에 찬 말소리들이 쉼 없이 웅웅- 공간으로 가득 퍼지고 있었지만 뭐 하나 귀에 잡히는 큰 소리는 없었다.

정신을 잃은 케투아 왕과 그의 기사들을 끌고 온 아벨디온 기사단과 아한, 그리고 유리엔 왕비 일행을 본 궁인들의 반응이었다.

“모두 물러가 일을 보거라. 또한 방금 본 일에 대해 발설한 이는 용서치 않겠다.”

왕비답지 않게 강하고 단호하게 전하는 명령에 궁인들이 서로 시선을 바삐 옮기며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율엔 가문의 신하들이 케투아 왕과 기사들을 감옥에 구금하는 동안 유리엔 왕비는 일행을 제 궁으로 안내했다.

아벨디온은 케투아 왕을 따를지도 모르는 켄느의 기사들을 대신해 율엔 가문의 마법사들과 함께 감옥을 지켰고, 아한과 아를, 그리고 유리엔 왕비와 아사벨, 호안은 아사드가 함께 자리했다.

어느새 왕비의 시녀가 급히 내온 차와 다과가 한가득 차려졌다.

왕비는 아사벨과 아한 그리고 호안의 앞에는 따로 테이블을 더 추가시켜 궁의 디저트 담당 쉐프에게 최대한 다양한 것들을 내오라 명했고 아사벨에겐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핫초코에 마시멜로우를 띄워 주었다.

“냄새가 맛있어요.”

아사드의 클린 마법으로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아사벨이 부드러운 원단의 옷을 연신 매만지며 핫초코 냄새를 맡았다.

“후후 불어 먹어야 해, 뜨거우니까.”

그런 아사벨을 자상하게 바라보며 호안 왕자가 말하자 아사벨이 크고 흐린 하늘색 눈으로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아주 조심스럽게 잔을 들었다.

“호~호~.”

죽은 이리란이 해 주던 대로 음료를 호호 불어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다 댔다.

“우와… 너무 맛있다. 이게 뭐예요? 너무 맛있어요. 이런 건 처음 먹어 봐요, 오라버니!!”

따뜻하고 다디단 핫초코 한 모금에 눈이 두 배는 커져서 신나게 말하는 아사벨을 보며 호안 왕자가 시린 미소를 지어 보였고 유리엔 왕비는 황급히 나오는 눈물을 훔치느라 고개를 돌렸다.

그런 오라버니와 어머니를 확인한 아사벨이 금방 잔을 내려놓고서는 다급히 말했다.

“머, 먹어 봤어요, 이거! 이리란이 해 줬어요! 그냥 오랜만이라 기뻐서 말한 건데… 울지 마세요, 어마… 마마… 오라버니… 네?”

더 마시고 싶은지 계속 핫초코를 흘끗거리면서도 저의 반응에 슬퍼하는 유리엔 왕비와 호안 왕자가 마음에 걸리는지 아사벨이 안절부절못하자 곧 따뜻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아사벨에게 건네져 왔다.

“기뻐서 그러신 겁니다. 왕비님과 호안 왕자님 두 분 다 말입니다. 그러니 괘념치 마시고 마음껏 드세요.”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을 건넸지만 아사드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어려 있음을 아사벨은 모르지 않았다.

“앞으로 왕비님과 왕자님이… 그리고 또 제가… 우리 아사벨 공주님이 좋아하는 것은 뭐든 먹여드리고 입혀 드릴 테니… 우리… 공주… 님은 그저 기뻐하시고 웃으시면 되는 겁니다.”

아사드의 말에 아사벨이 눈을 껌뻑껌뻑하다가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하지만… 아바… 아니 케투아 전하께서는 나쁜 거라고… 했어요. 무언가를… 바라는 건… 좋지… 않은 거라고…….”

점점 작아지는 아사벨의 목소리에 여기저기 우지끈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계속해 아사벨의 테이블에 부지런히 디저트를 나르던 하녀가 순간의 기색에 다가오지 못하고 사색이 되어 버렸다.

아사벨의 말에 분노한 아를이 금 젓가락을 종잇조각처럼 부러트리고, 아사드와 아한, 그리고 호안 왕자의 신력 또한 분노에 휩싸여 주변에 조금씩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그만하세요. 아사벨도 놀랍니다.”

어느새 감정을 추스른 유리엔 왕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하녀는 초콜릿 푸딩을 나르다 기절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을 뻔했다.

하녀의 안색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유리엔 왕비가 옆에 앉은 아사벨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케투아 왕께서 너에게 한 말은 모두 잊으렴, 아가. 이 엄마가 그리해 줄 것이다. 아이는… 너와 같은 아이는…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소리만 듣고 사랑만 받는 거란다. 그러면 되는 거야.”

유리엔 왕비의 말에 아사벨의 하늘색 눈에는 어느새 말간 눈물이 고였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엄마의 품, 아직도 제 손을 잡고있는 오라버니의 뜨거운 손. 저가 너무 작아 차마 만지지 못하겠다면서도 계속 아사벨만 바라보는 할아버지, 아사드의 눈.

그리고 저를 위해 화내 주는 사람들.

“꿈만… 같아요. 이리란이 죽은 게 너무 싫어서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이게 꿈이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또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저… 이렇게 나쁜 애인데요… 이리란의 죽음이 슬픈 것보다 지금이… 흑… 더 좋아서… 흑흑… 저는 너무 나빠요… 흑…….”

아사벨의 말에 유리엔 왕비가 아무 말도 없이 어린 아사벨을 제 품에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호안은 힘이 들어가는 제 손에 힘을 빼려 노력하고 아사드는 늙으니 눈물만 많아진다며 고개를 돌려 애써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화아악---.

“하지만 이리란은 지금 공주님이 슬퍼하기보다 기뻐하기를 바랄 겁니다. 그게 이리란이 바라던 거니까요”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목소리에 아를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역시나 그녀, 르베나가 있었다.

“르베나… 님……!”

아사벨 역시 그녀를 발견하고는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에 반가움을 듬뿍 담아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르베나는 그런 아사벨을 보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웃으십시오, 아사벨 공주님. 이제 더는 누구도 공주님을 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리란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또 공주님 본인을 위해 웃으십시오. 울고 자신을 탓하는 건…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묵직한 울림이 전해졌다. 그 말을 한 것이 다름 아닌 르베나였기에. 누구보다 고통스러웠고 누구보다 힘든. 또 누구보다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르베나였기에.

사나의 죽음에 울며 자신을 탓해 돌아온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삶이었는지. 자책이란 굴레가 사람을 어디까지 밀어 버릴 수 있는지. 제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사람보다 떠난 사람만 그리워하는 그 삶이… 얼마나 외롭고 처절한 고통인지.

눈을 감는 순간까지 후회한 저이기에 이 말이, 이 진심이, 그때의 자신만큼이나 어린 아사벨에게 잘 전달되기를 르베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바람은 그 어떤 오해나 곡해 없이 아사벨에게로 향했다.

르베나의 삶을 모르는 아사벨임에도 그녀의 말이 제 가슴에 깊숙이 박히는 걸 느끼며 말간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환하고 예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그럴게요, 르베나 님. 모두를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많이 웃을게요.”

아사벨의 다짐에 유리엔 왕비가 르베나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이를 본 르베나 역시 짧게 왕비에게 묵례했다.

왕비의 품에 꼬옥 안겨 있는 아사벨, 그런 아사벨을 바라보면 호안 왕자와 아사드.

모두 르베나에게도 있던 사람들.

어린 르베나를 안아 주던 사나, 그 곁을 지켜 주던 후벤과 가스트, 르베나만을 따르던 아한, 멀리서 언제나 지켜보던 제노스 왕, 그리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던진 아벨디온의 기사들과 아를.

그래서 르베나는 나아갈 수 있었다.

비록 한 번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자 르베나는 다시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 부디 너에게도, 어린 나처럼 작고, 어린 나처럼 순수한 너에게도 그 사람들의 온기가 너의 길을 이끌어 주길.

그리하여 더 많이 웃을 수 있기를, 더 많이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기를.

르베나는 헤헤 웃으며 눈물을 훔치는 아사벨 공주에게 온 마음을 담아 조요한 축복을 빌었다.

회귀 전의 후회도, 자책도, 그리움도, 슬픔도, 단 한 번 안겨 보지 못한 어머니의 품도, 한 번 담아 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도.

이제는 다 제 것이 아닌 그것들을 아사벨의 눈물과 함께 모두 흘려보내며 르베나는 천천히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하지만 르베나가 다가올수록 그녀를 누구보다 반겨야 할 아를과 아한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저건… 뭐야?”

아한의 작은 말소리에 아를이 수려한 자신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답했다.

“그러게. 저건 뭘까?”

그리고 아한과 아를의 말에 대한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젠의 중심이며 세츠의 중심이신 유파시드에게 언제나 신의 안배가 함께하시길.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파시드님.”

아사드의 정중한 인사에 르베나의 옆에 서 있던 이, 루드바하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쩐지 후련해 보이는 르베나와 그런 르베나의 옆을 지키는 루드바하.

두 사람이 함께 켄느에 도착한 것이다.

* * *

“괜찮으십니까.”

두 사람이 떠난 테이블에 계속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긴 칸에게 루안이 다가서며 말했다.

“무엇이 말인가.”

점잖은 칸의 말에 루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르베나 님 말입니다. 아버지… 를 찾는다고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루안의 말에 제 목걸이의 펜던트를 가만히 매만지던 칸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누구보다 강하고 선한 아이로 잘 자랐더군. 부모가… 지켜 주지 못했는데도… 말이야.”

칸의 말에 루안이 답답한 듯 약간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왜 지켜주지 못했습니까! 칸 님이 무엇을 걸고……!”

“그만.”

루안의 말을 막은 칸이 루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루안의 어깨를 톡톡, 다독이고는 선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의 마음을 다 안다, 루안. 하지만… 난 그 아이를 더한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그저 지금 르베나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감사하다. 그저 그 아이가 먹는 모습을 보고.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얻는 기분이야. 그걸로 족해.”

(그 순간 칸이 문득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돌렸다.

“아차, 그러고 보니……!”

곧 칸이 그답지 않게 저벅저벅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겨 문을 열며 소리쳤다.

“해마! 해마, 있나!!”

그의 부름이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한 사내가 나타나 고개를 숙이니 칸이 그에게 서둘러 말했다.

“체리와 호두파이 그리고 시나몬롤! 또 또… 애플망고와 그레이풀도!!”

칸의 말에 해마라 불린 이가 멍하니 되물었다.

“네?”

해마의 되물음에 이번엔 칸이 조급하게 다시 말했다.

“체리와 호두파이, 시나몬롤, 애플망고와 그레이풀 말일세!”

칸의 두서없는 말에 해마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문 안쪽의 루안을 바라보자 그도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곧 칸이 드디어 뒷말을 이어 말했다.

“주문 좀 넣어 주게. 아주 많이. 특히 체리와 그레이풀은 아주 넉넉하게 주문해서 디오니스의 르베나 공주님께 보내고, 일부는 보존 마법을 걸어 이곳에 두게.”

칸의 말을 그제야 이해한 주문 담당 해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그레이풀은 얼마나 구해 놓을까요? 아시다시피 그레이풀 요정의 숲에서만 나는 과일이 아닙니까. 구하기가 어려울뿐더러 가격이 상당합니다. ”

해마의 말에 칸이 단호하게 답했다.

“전부.”

“예?”

칸의 말에 해마가 놀라 되묻자 칸이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거래 나온 거라면 전부 다 사 놓게. 이럴 때 쓰려고 벌어 놓은 돈이 아닌가. 온 대륙에서 발견되는 그레이풀은 전부 사들이게, 하하.”

호탕하게 웃은 칸이 르베나가 앉았던 자리를 한번 보고는 줄줄이 다른 과일과 디저트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해마는 갑작스러운 주문에 손을 바삐 움직였고, 루안은 그런 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군… 하지만 하나는 알겠어. 이래서 무섭다는 거군, 딸바보가…….”

그날 저녁 대륙에는 아름아름 아네벨 상회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들이 과일과 디저트류를 젠에서 열리는 가장 큰 파티에 필요한 양의 열 배이상 구입해 보존 마법을 건 채로 디오니스의 성으로 보냈다고.

난데없이 엄청난 양의 디저트류와 과일 특히 누구도 일생에 한 번 보기도 힘들다는 그레이풀이 궤짝으로 실려 온 디오니스의 궁 안이 발칵 뒤집힌 이야기와 함께.

하지만 이건, 누군가가 그의 딸을 위해 써재끼는 소비의 아주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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