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54화 (154/276)

154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26)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칸 님, 보토니에가 과거에 제… 아버… 지라고 추정되는 이와 연관된 적이 있는지 말입니다.”

르베나의 시선이 곧게 칸을 향했다. 르베나를 향하는 칸의 갈색 눈은 아무런 흔들림도, 또 망설임도 없었다.

곧 칸이 르베나의 검붉은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뜻밖의 이야기군요, 정말. 르베나 님의 아버지께서 보토니에의 마법사들에게 거론되다니… 흠… 하지만 저 역시 정확히 추정되는 인물은 없습니다.”

르베나의 눈동자에 잠시 실망의 빛이 떠올랐지만, 이내 이어진 말에 그 빛은 금세 사라졌다.

“다만, 보토니에는 과거 신마전쟁 시기에 힘이 강한 베이라나 세츠들을 쫓은 전적이 있습니다. 단체로 무리를 지어 말입니다.”

칸의 말에 르베나가 약간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단체로 강한 마법사들을 쫓았다… 그것도 전쟁 당시에 말입니까?”

르베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칸이 르베나의 찻잔에 뜨거운 차를 다시 부어 주며 말했다.

“예. 그들은 아마 그때부터 다른 마법사의 힘을 취할 계획이나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 중 수차례 힘이 강하다고 알려진 베이라나 세츠가 불시에 공격을 당하고는 했으니까요.”

“그게 보토니에의 소행이었군요. 저도 아버님께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유 모를 공격을 당한 마법사들이 있었다고요.”

루드바하가 차가운 분노를 담아 말을 이어갔다.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의 계획은 실패한 모양이군요. 최근 목표를 힘없는 일반인들로 바꾸게 된걸 보면 말입니다.”

서늘한 그의 말에 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찻물로 입술을 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네. 하지만 모두 저의 추측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공격을 받은 걸로 알려진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신마전쟁 이후 자취를 감췄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힘 있는 마법사들을 공격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다니던 그들이 최근 들어 개조한 약으로 괄목할 만한 힘을 지니게 된 것을 보면… 신마전쟁 당시 시체를 찾지 못한 마법사의 상당수가 보토니에게 이용당했으리라…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칸은 고개를 돌려 르베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분명… 르베나 님의 아버님은 강한 힘을 가진 베이라였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들의 표적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칸의 말에 찻잔을 쥔 르베나의 손에도 꽈악 힘이 들어갔다.

그런 르베나를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본 칸이 말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그분의 생사와 관련된 정확한 내용은 당시 보토니에에 몸담던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이윽고 칸의 이야기가 끝나자 차분히 르베나의 안색을 살피던 루드바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바라봤다가는 여전히 르베나를 바라보는 칸을 향해 제 눈을 돌렸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루드바하의 깊은 푸른빛 눈을 마주친 칸이 조금의 망설임 끝에 이내 르베나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아쉽지만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들에게 쫓긴 마법사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중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들이 누구인지…르베나 님이 궁금하시다면 제가 한번 알아 보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터라 기대는 안 하시는 것이 좋겠지만요.”

모락모락.

어느 틈엔가 세 사람의 찻잔에 다시 차오른 찻물이 뜨거운 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뜨거운 차에 선뜻 손을 가져다 대는 사람은 없었다.

찻잔에서 피어나는 수증기 외에는 오직 침묵만이 그들 사이를 맴돌 뿐이었다. 르베나는 가만히 수증기의 어느 지점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그리고 뜨거운 차가 어느새 조금은 미지근해져 버린 그때, 르베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르베나, 그대가 알고 싶다 한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모든 이를 동원해서라도 그대의 아버님 행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루드바하가 르베나와 눈을 맞추며 사르륵 웃어 보였다.

주위가 환해졌다고 느껴질 만큼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 누가 이것을 남자의 미소라고 생각할까. 아니, 설령 여자래도 저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수는 있는 것일까.

루드바하의 미소를 본 칸은 놀란 듯 잠시 움찔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르베나는 이미 조금은 익숙해진 미소와 아까부터 줄곧 조금씩 전해지는 따뜻하고 다정한 그의 신력에 작은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그녀의 화답을 확인한 루드바하는 더없이 애정 어린 눈빛으로 르베나와 눈을 마주쳤고 오직 한 사람, 칸만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큰 동요를 남몰래 갈색 눈동자 안에 간직할 뿐이었다.

그렇게 조금을 루드바하의 따뜻한 미소와 말 없는 격려를 받은 르베나가 곧 고개를 테이블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분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도록 하죠. 두 분 다 더는 알아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르베나의 단호한 말에 루드바하가 안타깝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르베나, 나는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가 필요한 게 있다면,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망설이지 마세요. 그대는 무엇이든 해도 되는 사람입니다.”

다정한 목소리는 오직 단 한 사람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럴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참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그게 어디든… 말입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누구든 원하는 것을 모두 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루드. 당장 루드만 하더라도 원하는 모든 것을 하고 살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르베나 그대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저는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특히 저는 사람에 대한 욕심이 많아 제가 만나고 싶은 이는 반드시 만나고야 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드바하의 벽안이 순간 깊게 침잠하며 깊은 심해의 색을 띠었다.

그의 눈은 차갑고 깊은 바다같으면서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붉은 용암 같기도 해 보는 이의 시선을 오래 붙잡아 두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눈이 르베나를 향했을 때 순간 르베나는 온몸이 긴장되는 듯한, 적을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생소하고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버렸다.

“전 욕심에 의해 아둔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원하는 단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제 주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릴… 준비 또한 되어 있으니까요.”

뜻을 알 수 없는 말. 하지만 루드바하의 그 말에는 열정이 담겨 있었다.

아니, 열정을 넘어선 어떤 것. 더 깊고, 더 뜨거우며 더… 농밀한 어떤 것.

르베나로서는 아직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말이다.

루드바하를 빤히 바라보는 르베나에게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그때.

“크흠…….”

칸의 헛기침 소리에 루드바하의 입이 다시 굳게 닫혔다.

그리고 이내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르베나의 붉은 눈이 아쉬워, 루드바하는 원망하듯, 그러나 조금은 미안한 듯,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엉킨 눈으로 칸을 바라보았다.

칸은 그런 루드바하의 시선을 애써 모른척하며 얘기했다.

“유파시드께는 신분의 차이에 관계 없이 좋은 전우가 있나 보군요. 역시 젊은 마법사들의 우정이란 뜨거워 좋습니다. 하하.”

칸의 말에 루드바하는 순간 그답지 않게 조금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왜 제 말이 그렇게 해석되지는 전혀 모르겠다는 당황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르베나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아……! 그렇군요. 같이 전투를 하는 동료라면 그럴 수 있겠군요. 루드께서 그렇게까지… 흠… 함께 목숨을 거는 동료라면 주위에서 이를 두고 뭐라 하든 신분의 차이가 어떤 문제가 되겠습니까. 무엇보다 루드께서 이렇게까지 갈망하는 동료라니 상당히 강한 마법사인가 보군요. 언젠가 저도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조금 전까지 루드바하의 말이 누구를 가르키는지 고민하고 생각하던 르베나는 없었다.

다만 이곳엔 굉장히 강한 마법사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조금 설레는 듯한 르베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루드바하가 칸을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칸은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루드바하의 눈빛을 피하며 르베나에게 말했다.

“르베나 님, 유파시드의 말씀처럼 정말 찾지 않으셔도… 괜찮습니까?”

칸의 말에 르베나가 아까와는 달리 조금은 후련해진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분은 제 생부이기 전에 루아나… 공주가 죽는 순간까지 후회하지 않았던 그녀의 남자이고 또 그만의 인생이 있는 한 사람이 아닙니까. 제 앞에 나타나지 못했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만 생각하고 싶습니다.”

고민이 사라진 눈동자는 맑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이미 죽었다면 어차피 보토니에를 소탕하며 알게 될 일. 루아나 공주… 의 옆에 묻어 주는 거면… 충분하겠죠.”

루드바하가 진지한 얼굴로 르베나에게 물었다.

“만약… 살아 계시다면요?”

루드바하의 물음에 르베나가 늦지 않게 답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음에도 그분의 여인을, 자식을… 찾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그리고 사람이 아주 단순한 이유만으로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 저는 이제야 조금씩 배워 가는 중이거든요.”

르베나는 가만히 찻잔 속을 응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렇기에 그분을 굳이 찾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제겐 이미 저를 존중하고 마음으로 대해 주는 아주 좋은 가족들이… 있습니다.”

사나와 후벤, 가스트가 들었으면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만한, 아한은 좋아하면서도 가족이라는 말에 흠칫할 만한 말을 하며 뜻을 굳힌 듯 미련없는 르베나의 말투에 루드바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가 그리 생각하면 저도 그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주저 없이 이야기해 주세요. 전 언제나 르베나, 그대의 편입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둘을 조금은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칸이 화제를 전환하듯 밝은 표정으로 르베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르베나 님, 오늘 힘들진 않으셨습니까? 최근 보토니에와의 마찰이 잦아 걱정입니다. 저는 이렇다 할 도움도 되어 드리지 못하니…….”

칸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모두의 도움이 아주 큽니다. 애초에 전투 중에는 아를 녀석이 도와 주니 힘든 것은 없었습니다.”

움찔.

르베나의 말에 찻잔을 쥐려던 손을 움찔한 루드바하가 그 여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안이 있었다면 심기가 상할 때 더 환하게 웃는 이상한 황제라고 말할 만한 미소였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들로 그대를 많이 돕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르베나. 하지만 언제나 그대의 옆자리에 서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크다는 것을… 꼭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칸에게 말한 것인데 왜 루드바하가 끼어든 거지? 게다가 옆자리라니.

잠시 갸우뚱한 모습을 보이던 르베나가 곧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 루드께서는 전우를 좋아하시죠. 그러니 전투 또한 좋아하시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다음에 옆에서 싸울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말을 끝낸 르베나는 언제 아버지를 찾고 싶었냐는 듯 후련하고 가벼운 얼굴로 칸이 내민 접시의 쿠키와 과일들을 부지런히 먹었다.

먹으면서도 제 안에 남은 생각과 감정의 찌꺼기들을 정리하려는 듯 가끔 검붉은 눈동자가 깊어지긴 했지만, 그도 잠시일 뿐 르베나는 의연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하는 듯 보였다.

그런 르베나를 보며 루드바하는 누구한테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입을 뻐끔뻐끔할 따름이었고, 칸은 그런 루드바하를 보고 한번 소리 없이 풋, 웃은 뒤 쿠키와 과일을 맛있게 먹는 르베나를 누구보다 깊은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여인. 저를 향한 누군가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순수하고 어린 공주, 르베나.

하지만 그 어린 공주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이토록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매끄럽게 차단할 수 있는지. 하나뿐일 생부에 대한 미련마저 쉽게 털어 낼 수 있는지.

르베나의 앞에는 왜 공주와 소녀같은 여리고 예쁜 수식어보다 베이라, 아벨디온의 단장, 기사와 같은 거친 수식어들이 더 많은지.

거기까지 생각에 다다른 칸과 루드바하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밖은 그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이 세상을 모두 태울 듯 붉게 번지는 석양의 빛이 창가를 통해 세 사람의 얼굴에도 비추었다.

루드에게는 더없이 붉고 뜨겁게, 칸에게는 더없이 부드럽지만 슬프면서도 비밀스럽게.

그리고 그런 둘의 시선을 하염없이 빼앗은 르베나에게는…….

더없이 따듯하고 평온하며, 강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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