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53화 (153/276)

153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25)

르베나의 작은 부름을 듣지 못한 듯, 한동안 르베나가 고쳐준 제 오른팔에만 시선을 고정하던 아를이 그 시선 그대로 말을 이었다.

“넌 참 나빠, 르베나. 언제나 남의 상처는 이렇게 멀쩡하게 고쳐주면서 네 상처는 돌보지 않으니까.”

겨우 팔에서 시선을 뗀 아를이 르베나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르베나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했다시피, 스친 거다. 아를, 너랑은 달라.”

단호한 르베나의 말에 풉,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아를이 르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쨌든 르베나. 저 말이 가짜일지 진짜일지 모르니까. 한 번 알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왜 갑자기 그 얘기가 나오는 거지.”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찢어낸 옷 안쪽의 연하고 값비싼 옷감을 조심스레 르베나의 이마에 난 상처에 가져다 댔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떨지는 않으며 르베나 이마에 난 피를 톡, 톡 찍어 내는 아를이 여상하게 말했다.

“그런 너니까. 항상 너보다 남이 우선인 너니까. 네가 마음 놓고 널 맡길 수 있는… 너를 제일로 생각해주는 가족을… 하나 더 만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

툭, 툭 조심스럽게 상처의 피를 닦아낸 아를이 르베나와 눈을 맞췄다.

그런 아를의 금안을 한참 바라보던 르베나가 말했다.

“나에겐 너도 그렇다, 아를.”

갑작스런 르베나의 말에, 겨우 그 한 마디에, 최선을 다해 르베나와 닿아 있다는 잡념으로부터 평정을 유지하던 아를의 금안이 세차게 흔들렸다.

휘익. 갑자기 르베나에게서 등을 돌린 아를이 급하게 말했다.

“그, 그러니까… 그런 사람 하나 더 있으면 좋잖아. 르베나 너의 아버지라면… 분명… 아주 분명… 좋은 사람임이 틀림없을 테니까.”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좋은 사람이라… 아이를 가진 여자가 죽을 때까지 얼굴 한번 비추지 않고. 자기 자식이 커 죽을 동안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지만… 좋은 사람일 순 있겠지. 왜냐하면…….”

르베나의 끊긴 말에 아를이 씨익 웃으며 뒤돌아 말했다.

“보토니에가 그 존재를 아니까.”

아를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회귀 전, 르베나가 죽는 순간까지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은 아버지란 사람.

굳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이 날 때마다 되뇌었다.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죽는 그 순간까지. 당신이 살아 있었다는 걸 알면, 내가 당신을… 용서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회귀 후 르베나는 회귀 전에 모르던 수많은 진실에 대해 배워 가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보토니에.

회귀 전에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지만, 사람에게서 생명을 빼앗아 미지의 힘을 창조하고 그 힘을 증폭할 약까지 만드는 조직이라면 분명 회귀 전에도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회귀 전 알지 못했던 보토니에란 조직에서 르베나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 보토니에의 아둘이란 자와 싸우다 그가 작게 한 말 역시 르베나는 잊지 않고 있다.

르베나의 힘이 폭사할 때 아둘은 분명 말했다.

“안돼… 말도 안돼… 그럴 리가… 어떻게 같은 마력이…….”

그때는 이상한 말이라 기억만 해 두었을 뿐이었지만 벌써 두 번째 보토니에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 르베나의 아버지란 이는 보토니에와 큰 관련이 있음이 분명했다.

어느새 검붉은 눈에 확신이 차올랐다. 그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를이 르베나의 눈에 차오른 확신을 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망설이지 마, 르베나. 만약 너의 아버지가 너에게 오지 못할 사정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 내가 그 사정을 벨게. 만약 너의 아버지가 생각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면… 물론 너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그때도 나에게 말해. 그 역시 내가 네 눈에 보이지 않게 해 줄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를은 떨리는 심장을 간신히 붙잡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검을 가진 너는 무엇이든 망설이지 말고 나아가. 그게 내가… 진짜 원하는 거야.”

아를의 말에 르베나의 심장이 쿵쿵 크게 울렸다.

언젠가 회귀 이전의 그곳에서 본 네가, 나와는 반대인 곳에 서 있던 네가 이제는 내 검이 되어주고 내 친구가 되어 준다.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르베나는 작은 망설임조차 물리칠 수 있었고, 또 자신의 강한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한과 룬 일행이 있는 동굴 쪽에서 엄청난 신력이 강하게 퍼져오기 시작했다.

강하고 슬픈, 하지만 더 이상의 망설임이 없는 힘.

르베나가 호안 왕자의 신력을 느끼며 조금은 후련한 얼굴로 말했다.

“기분 좋은 힘이로군.”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제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왔다.

호안의 힘이, 강하면서도 슬픈 그 힘이 르베나는 좋았다.

그래서 르베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앞에 무엇이 있든 난 마주할 각오가 되어 있다.”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앞에 무엇이 있든 그 옆엔 내가 있을 테니까.”

아를의 말에 르베나 역시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르베나의 주위로 따뜻하고 강인한 그녀의 마력이 피어오르고 곧 그녀의 모습이 마력의 잔상과 함께 사라졌다.

어느새 르베나가 사라진 공간, 아주 옅게 느껴지는 르베나의 마력. 아를이 조금 전 르베나의 이마에 대었던 제 손을 들어 제 입술로 조심스레 갖다 대었다.

“다 가져가. 내 옆도, 내 검도… 내… 심장도…….”

그 작은 소리가, 그 짙은 감정이 이미 칸에게로 간 르베나에게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아를은 순간 안도감과 함께 짙은 갈증을 느꼈다. 르베나가 남긴 마력의 잔상이 벌써 보고 싶었다.

헤론과의 전투 이야기를 끝낸 르베나는 다시 조금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르베나의 말을 들은 칸과 루드바하의 사이에서 알 수 없는 긴장과 두려움이 오가는 것을 르베나는 미약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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