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52화 (152/276)

152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24)

헤론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기 시작하고 그의 눈이 갈피를 잃은 듯 이리저리를 정처 없이 헤매자 이를 본 아를이 작게 말했다.

“머리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나 보네.”

아를의 말에 화들짝 놀란 헤론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차가운 금안이 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헉… 헉…….”

헤론이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되어 거친 숨을 몰아쉰 그때, 르베나의 손이 헤론으로부터 멀어졌다.

툭.

그와 동시에 저도 모르게 떨어진 눈물의 뜨거운 온기로 헤론은 드디어 스스로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알았다.

하지만 육체가 붕괴되는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도 없이 그를 잠식한 건 스스로 흘러버린 눈물처럼 두려움과 공포로 떨리는 몸뚱이뿐이었다.

“사… 살려 줘.”

헤론이 덜덜 떨리는 제 손을 꽈악 잡고는 앞에 선 르베나와 아를을 향해 말했다.

이들이 왜 저를 인간으로 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죽이지 않을 것은 알았다. 그래서 저를 점령한 짙은 공포 속에서도 피어오르는 단 하나의 희망을 그는 놓지 않은 것이다.

“제, 제발…….”

헤론이 마르고 핏기없는 제 손을 르베나를 향해 뻗으며 애원했다.

악인이건만, 그 손에도 절실함과 공포 그리고 희망이 고스란히 읽힌다는 생각에 르베나가 제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탓.

르베나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헤론의 손을 거침없이 발로 차 버렸다.

그러고는 두려움에 몸을 떠는 그를 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몇 명이지? 너에게 이처럼 간절하게 목숨을 구걸한 자들이. 아무 죄도 없이 너에게 고통과 공포만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빼앗긴 자들이! 그리고 너는… 그중에 몇 명이나 살려 주었나.”

르베나의 말에 헤론이 생각하듯 눈을 굴렸다.

수없이 많은 이들을 사로잡았다. 성인 남자와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잡아 그들의 생명을 이루는 마력과 신력을 흡입했다.

살려달라 애원하는 남자, 제 목숨을 줄 테니 어린 자식만은 살려달라 울며 매달리던 여자, 마을을 대표해 늙은이 하나만 데려가라며 그의 앞을 막던 노인.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유들로 그에게 목숨을 애원했다.

그리고 그중에 그가 살려둔 이는… 헤론이 저도 모르게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한 명 도 없 었 다.

그리고 그 순간 헤론의 머릿속을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을 읽기라도 한 듯이 르베나가 다시 한번 제 입술을 악물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방금 헤론이 저도 모르게 지은 그 미소 하나가 르베나에게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처참하고도 슬픈 이야기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살려달라고, 지켜달라고, 이 고통과 공포에서 아무런 힘도 부여받지 못한 무력한 우리를 왜 지켜 주지 않느냐고.

곧 르베나의 감정에 반응하듯 르베나의 마력이 들썩였다.

힘을 가진 당신들이 지켜 주지 않으면 힘이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주변의 공기가 르베나의 마력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힘이 있는 이유는, 이런 우리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냐고.

이윽고 르베나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력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느낀 헤론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는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듣던 것 이상이다. 아니, 처음이다. 이렇게 강하고 주저 없는 그리고… 어……?’

헤론의 눈에 작은 놀라움이 솟아오를 찰나, 르베나가 그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마르한으로 이동될 것이다. 그곳에서 너는 네가 아는 모든 것을 토해 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르베나의 눈동자에 맹렬하게 감도는 마력은 그녀의 인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니… 네가 고통스러울 때, 더없는 공포에 휩싸일 때, 절대 잊지 말아라.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애원하던 그 사람에게…….”

르베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르베나의 손에 폭발적인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법사인 헤론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법사의 의식을 강제로 잠재우고 모든 힘을 억압으로 묻어 버리는 마법.

마력이나 신력이 상대방의 열 배 이상 차이 나지 않으면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최강의 베이라와 세츠만이 시전할 수 있는.

“트… 랩… 마법?”

헤론의 작은 혼잣말에 르베나는 시선을 한 번 짧게 주고는 손에 아까보다 더 큰 힘의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에서 윙-윙- 공명음이 날 정도의 힘을 가진 마력이 그녀의 손에 응집되어갔다.

그리고 르베나는 순식간에 제 손안에 구체화된 마력을 헤론을 향해 던지며 말했다.

“넌 용서받지 못했음을.”

그리고 제 몸을 감싸는 르베나의 마력을 느낀 헤론은 공포 그 이전에 마법사가 갖을 수 있는 최상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트랩 마법.

시전이 어려워 잘 시도하지 않는 마법. 하지만 발동에 성공한다면 상대는 무저갱 같은 어둠에 평생을 갇혀 있을 수도 있다.

강제로 의식이 잠재워져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에 극한의 공포와 어둠을 마주한다고도 알려져 있는 마법이 점점 그를 옥죄어오고 있었다.

“너, 너와… 큭… 비슷… 한 마력의 사람을… 헉헉… 알고 있다 그러니 제발 살려 줘.”

멈칫.

헤론의 말에 그에게 마법을 쏜 다음 마지막을 완성해가던 르베나도, 르베나의 옆에 있던 아를도 놀란 눈으로 헤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헤론은 속으로 안도를 삼키며 다시 말했다.

“말, 말했듯이… 흑… 너와 같은… 마력을… 가진 사람을 안다… 내, 내가… 알려 줄 테니… 제, 제발… 트랩 마법만은… 흐으윽…….”

울먹이며 말을 뱉는 헤론을 본 르베나가 조금은 떨리는 제 손에 힘을 주며 그의 몸에 새겨진 마법의 구체화를 단숨에 끝내 버렸다.

화악--!

“너의 그 애원은, 죄없이 너에게 희생당한 그 소중하고… 찬란한… 이들에게 해라 … 너의 어둠 속에서…….”

검붉은 마력이 헤론의 온몸 곳곳에 들어가 마법의 기원이 되는 마력을 가시넝쿨처럼 감싸 얽매기 시작하고 그의 머리로 들어간 마력은 수많은 그의 신경 세포들을 건드려 그의 의식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르베나의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제 마력이 헤론의 힘들을 강하게 붙들어 매고 제약하는 그 모든 과정이 생생하게 온몸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털썩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은, 하지만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은 느낄 수는 있는 헤론이 온몸의 힘을 잃은 채 쓰러졌다.

“르베나…….”

헤론의 모습을 확인한 아를이 재빨리 고개를 돌려 르베나를 향했다.

르베나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꾸며낸 얼굴로 평이하게 아를을 돌아볼 뿐이었다.

“하아…….”

그런 르베나를 보고 나직이 한숨을 쉬어낸 아를이 르베나를 향해 조금 더 다가갔다.

“너와 같은 마력이래…….”

아를의 한숨 같은 말에도 르베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정확히는 열지 못했다.

이 세상에 같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의 아이에게 제 힘의 성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이, 즉 부모뿐이었다.

루아나 공주는 마력이 전혀 없었으므로 르베나에게 마력을 줄 수 있는 건 아버지뿐이란… 소리였다.

“생각해 본 적 없다. 아버… 그런 존재에 대해선. 무엇보다 죽기 싫어 발악한 자의 말이 아닌가. 신경 쓸 가치가 없다.”

싸늘하게 말하고는 뒤로 돌아 저벅버적 걸어가는 르베나의 뒷모습을 아를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작게 숨을 내쉬고는 어느새 멈춘 르베나의 앞으로 걸어가 섰다.

곧 아를이 조심스럽게 제 손을 르베나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움찔.

자신의 손길에 르베나가 놀라며 무슨 짓이냐는 듯 바라보자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아를이 제 시선을 르베나의 이마에 두며 말했다.

“다쳤잖아, 르베나…….”

아를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조금 긁힌 거다. 그러고 보니 너도 쓸데없는 짓을 하다 다쳤었지. 검사가… 그것도 오른팔을 말이다.”

르베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아를의 오른팔을 보았다.

전투 중이라 대충 제 옷을 찢어 여민 천에는 그의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르베나가 그의 팔에 제 손을 가져다 대자 르베나의 손에서 검붉은 마력이 피어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를의 상처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르베나가 말했다.

“이제부터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아를.”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제 팔에만 시선을 고정한 르베나를 한참 바라보다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프지 않아. 그리고 말했잖아, 너를 지키는 게 내 일이라고.”

아를의 말에 어느새 아를의 상처를 치유한 르베나가 고개를 들었다.

슬픈 미소.

언젠가부터 아를은 종종 저런 얼굴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왜 저렇게 웃지, 하고 별뜻 없이 넘기던 르베나는 어느 날 마물과의 전투에서 입은 제 팔의 작은 상처를 보던 제노스의 미소가 아를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슬픈, 미소지요. 공주님의 상처가 아픈데… 참 아픈데… 그럼에도 티를 내실 순 없는 제노스 전하의… 마음입니다.”

언젠가 스치며 저건 도대체 무슨 표정이냐고 묻는 르베나의 말에 제노스 왕의 시종, 크론이 웃으며 한 말이었다.

그 말을 한 그의 표정도 같은 표정이라 르베나는 왠지 모를 당시의 찝찝함이 생생했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명. 언제나 내가 다치면 그 슬픈 미소라는 걸 짓는 너란 녀석이 있다,

“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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