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23)
“아를, 이번엔 쓸데없이 나서지 마라.”
싸늘한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 르베나의 신형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헤론은 그저 그들이 가소롭다는 듯 빈정거렸다.
“그래봐야 니들이 뭘 할 수 있다… 으아악!!!”
하지만 미처 그 말을 끝내기도 전 르베나의 늘씬한 몸이 공중으로 날며 은빛의 검날로 헤론의 눈을 그어버렸다.
겨우 재생된 눈이 다시 그어지자 헤론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르베나가 제게로 다시 다가오지 못하게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가만두지 않겠다, 절대로!!”
헤론의 무차별적인 마법으로 주변은 또다시 모래와 먼지 등으로 뿌옇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마치 어린애 장난을 피하듯 날쌔게 헤론의 공격들을 피하며 팔, 다리, 뺨 할 것 없이 그의 몸을 가벼운 몸놀림으로 그어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허공에 뜬 채로 분노에 차 마구잡이로 던져지는 그의 마법을 피하며 유유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구잡이로 마법을 날리며 계속해 고함을 내지르는 헤론은 마치 그를 끝낼 것처럼 달려들던 르베나가 왜 그 이상의 공격을 하지 않는지, 또 조금 전까지 그의 마법에 한 박자씩 늦던 그녀가 어떻게 이토록 여유롭게 헤론의 공격을 피하고 있는지 따위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더 이상 재생이 되지 않네?”
싸늘하게 비웃는 듯한 아를의 말에 놀란 건 그 누구도 아닌 헤론이었다.
“분명 각성에는 제한 시간이 있을 거예요. 제가 얼핏 들은 부작용이 육체 붕괴였거든요. 순수한 신력이나 마력의 대량 주입으로도 그들의 육체를 붕괴시킬 수 있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도 진행돼요.”
“만약 그들의 재생 시간이나 육체 붕괴 시간의 한계를 알아낸다면 그들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더 유리할 수도 있겠죠”
마르한에 나타난 보토니에를 쫓느라 르베나의 스무 한살 생일 데뷔탕트에 오지 못한 레턴이 며칠 후 텔레포트로 르베나를 만나러 와 새롭게 전한 소식이었다.
히죽 웃으며 말하는 레턴을 보고 그의 말을 잠시 곱씹던 르베나가 말했다.
“수고했어. 그건 그들과 마주치는 사람들이 최우선 과제로 알아보도록 해야겠군.”
그리고 르베나의 말을 들은 레턴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궁금한 듯 순수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선홍빛 머리가 그 바람에 스르륵 오른쪽을 향해 기울어졌다.
“근데 왜 르베나 님이 제 상사인 것 같죠? 나 왕인데 왜 보고하는 느낌인 거죠? 그리고 왜 아직 내게 반말인거죠? 난 마르한의 왕이고 이제는 르베나 님 편인데!”
정말 궁금하다는 듯, 하지만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레턴을 잠시 바라본 르베나가 그대로 그에게서 몸을 돌리며 걸어 나갔다. 그리고 이에 당황한 레턴이 르베나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따라 급히 걸음을 옮겨 징징댔다.
“존댓말 해 줘요, 나도 전하라고 해 달라고요, 나도! 아, 나도 왕 해 달라고! 어? 아닌데? 나 이미 왕인데? 아, 르베나 니이이임!!”
레턴의 징징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걸고 걷는 르베나와 그 옆에서 쫑알쫑알 징징대는 래턴의 모습은 디오니스에서 아직까지 화자되는 일화이기도 했다.
르베나의 검붉은 눈이 과거로부터 돌아와 다시 눈앞의 헤론에게로 향했다.
“무슨 소리… ! 아니야… 아니… 야!!”
아를의 말을 부정하듯 제 눈을 더듬더듬 만지던 헤론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르베나에게 그어진 부위들을 떨리는 손으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아… 니… 아니야… 아닌데… 아닌데… 왜…….”
울컥울컥.
계속해서 선혈이 뿜어지는 상처부위들을 보며 헤론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보토니에의 약은 분명 약효가 유지될 동안 재생효과 역시 유지된다고 들었다.
그 말은 헤론의 모습이 아직 인간처럼 변하지 않은 지금, 재생효과 역시 유지되어야 한단 말이었다.
하지만 아를의 말에 제 상처들을 다시 확인한 헤론은 급하게 르베나에게 다친 상처부위들에 힐링 마법을 쏟아부었다. 상처들이 더이상 재생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곧 그와 함께 엄청난 고통들이 그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으악! 안… 크흑… 돼… 헉! 왜… 왜 이러는거지… 왜……!! 으악!!”
제가 부은 힐링 마법에조차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헤론은 계속해서 상처에 힐링 마법을 퍼부었고 그럴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헤론을 바라보던 르베나가 이내 공중에서 내려와 아를의 옆에 착지하며 물었다.
“시간은?”
그러자 아를 역시 무감각한 눈으로 연신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헤론을 보며 말했다.
“재생 유지 시간, 약 1시간. 특이사항, 반복적인 상처가 생긴 부위는 재생 시간이 배로 늘어남. 물리적인 공격보다는 마법으로 인한 공격의 경우 재생 시간이 더 소요됨. 그리고…….”
순간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아를과 르베나의 대화를 들은 헤론이 순간 제 고통도 잊은 듯 기괴한 두 눈에 핏발이 가득 선 상태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징그러운 눈은 경악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헤론의 머리에서 툭, 투둑 진득하고 뜨뜻한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아를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재생 시간이 끝나는 시점에 육체 붕괴가 시작됨…….”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은 아를의 말이 천둥과 같이 헤론의 귀를 강타했다.
동시에 헤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재빨리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후드득, 후득 자꾸만 물 먹은 진흙처럼 흘러내리는 제 얼굴에 이어 이번엔 르베나에게 공격당한 팔, 다리 등에서 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 야. 이럴 리가… 없어… 아니… 야.”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몸을 더듬거리며 다시 힐링 마법을 걸고 또다시 고통스러워하는 헤론을 바라보던 아를이 평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아를의 말에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로 가득 찬 헤론의 기괴한 눈이 아를을 향했다.
아를은 그런 헤론과 눈을 맞추며 그에게 일러주듯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재생 시간이 끝나면 동시에 몸 안의 기분 나쁜 힘도 변질되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는 거. 알아둬, 네 몸이잖아.”
마치 친한 동료한테 말해 주듯, 얼핏 들으면 다정하기까지 한 아를의 말에 헤론의 눈이 서서히 커지더니 이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헤론은 발광하면서도 아를과 르베나를 향해 마법을 쏘고 싶은 듯 몸을 꿈틀댔지만 그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녹아가는 제 몸을 보고 더 고통스럽게 소리 지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르베나가 헤론에게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더 늦기 전에 해야겠군. 죽이고 싶어도 아직… 죽일 순 없으니.”
그녀답지 않게 아주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헤론에게 다가간 르베나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자신의 마력을 헤론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맺힌 검붉은 마력이 헤론에게로 흘러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너무 많이 주입하면 붕괴하지만 적절히 그 힘을 몰아낼 정도만 주입하면 인간의 형태로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거예요.”
“알아 내야 할 게 많잖아요, 하핫. 힘 조절이 워낙 정교해야 해서 어렵겠지만 르베나 님이라면 쉽게 할 겁니다.”
“아, 근데 왜 나는 자꾸 르베나 님한테 존대가 나오지? 나이도 위치도 내가 더 높은데? 그러니까 나도 왕 대접해 줘요, 나도!!”
굳이 시끄럽게 설명을 이어가던 레턴의 말을 다시 떠올리며 르베나가 그에게 조금 더 마력을 주입하자 헤론이 지금까지보다 더한 괴로움에 게거품을 물고는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가여울 만도 하건만 르베나는 그를 변함없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제 마력을 계속 주입할 뿐이었다.
“제… 큽… 발, 그만… 아악… 제발! 차라리 죽게 해 줘! 아악!! 너무… 고통스러워… 싫어!!”
고통에 차 절규하며 숨이 넘어갈 듯 헐떡대는 그에게 르베나가 여전히 제 마력을 주입하며 말했다.
말은 언뜻 듣기에 평온하게 들렸지만, 그 안에 스며든 분노와 떨림이 바로 앞에 자리한 헤론에게는 흔들림 없이 전해져 왔다.
“200명이라 했나. 거기엔 우리 디오니스의 백성도 있다 했나.”
르베나의 입에서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기억해 둬라. 이 고통이 2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네가, 그리고 감히 내 백성을 고통으로 몰고간 네가 치러야 할 고통의 아주 작은 시작점일 뿐이라는 것을.”
르베나의 말을 듣고 문득 다가올 미래를 예감한 헤론이 그녀에게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으나 이미 르베나의 마력에 온몸이 붙잡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끄… 윽… 끅.”
잠시의 발버둥으로 인해 더한 고통이 그를 침식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르메나의 마력이 헤론의 안에 있던 힘을 조금씩 몰아냄에 따라 무너지고 있던 그의 기괴한 몸은 점점 인간의 것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고통으로만 점철된 감각들도 서서히 무딘 본래의 것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기괴했던 눈이 인간의 두 눈으로 돌아오고 갈퀴 같던 손발역시 인간의 손가락 발가락으로 돌아왔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괴물로 변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헤론의 머리도 곧 고통을 떠나 순수한 의문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 떻게.”
보토니에의 일원이었던 그조차 알지 못했던 재생 시간의 한계. 그걸 어떻게 보토니에도 아닌 저 녀석들이 알 수 있었던 것인지.
끔찍한 고통이 서서히 거두어지고 저의 운명이 르베나에게 붙잡혔다고 생각하니 가장 먼저 든 의문이었이다.
분명 르베나가 그를 동굴에서 데리고 나오고 그 틈에 아를이란 자가 르베나를 따라나섰다.
그것을 두고 둘이 실랑이를 하던 틈을 타 헤론은 약을 먹었고, 그 둘은 변해 버린 자신의 공격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겨우 아를이란 자가 제 몸 곳곳을 그어 댔지만 재생이 되면서 그딴 상처는 그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그 뒤로 쏟아낸 그의 공격에 아를과 르베나는 피하기에 급급했고, 그가 르베나를 향해 쏜 구속구 공격에는 르베나도 당황했을뿐더러 그녀를 지키던 아를이란 자 역시 크게 다치지 않았던가.
만약 마지막에 르베나가 아를이 벤 곳을 다시 베지만 않았다면 재생 시간에도 문제가 없었을……!
왜 하필… 왜 하필 르베나는… 아를이 벤 곳만을 골라 다시 벤 것일까? 왜 르베나는… 듣던 것처럼 강한 마법을 제게 쓰지 않은 것일까……?
싸울 때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이 꼬리의 꼬리를 문 것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이내, 헤론이 갑작스레 무엇인가에 감전된 사람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건 어떤 깨달음이 주는 감각 이전에 약자가 강자 앞에 설 때만 느낄 수 있는 아주 강하고 원초적인… 공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