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21)
“그건 제가 해결하지요.”
유리엔 왕비였다. 하지만 이미 오랜만의 신력 방출로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그녀였기에 아사벨과 호안은 안된다는 듯 그녀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아들과 딸을 한 번씩 다정히 바라본 유리엔 왕비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힘을 쓰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렴.”
말을 끝낸 유리엔 왕비가 어느새 땅에 떨어져 있던 목걸이를 주워 들었다.
어린 아사벨에게 주려 아쿠아마린을 박아 만든 작은 목걸이. 곧 그 목걸이의 보석에 한 번 입을 맞춘 유리엔 왕비가 적은 양의 신력을 흘려보내며 작게 읊조렸다.
“율엔 아르쉘.”
그녀의 작은 속삭임이 끝나자 손안에 있던 보석이 작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쩌저적 소리와 함께 보석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모두가 이 모습을 의아해하는 순간이었다.
흠칫. 갑자기 동굴 안 모든 이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놀란 듯 긴장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그러고는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호안 왕자와 아한은 유리엔과 아사벨의 앞에, 아를과 룬은 일행 모두의 앞에 선 채 날카로운 검을 뽑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위화감에 모두가 긴장으로 몸을 굳혔지만 단 사람, 유리엔 왕비만은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화악--! 순간 동굴 안이 삽시간에 밝아지며 엄청난 힘의 파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츠의 힘. 본래라면 선한 그 힘을 두고 모두가 안심했겠지만 레턴과 ‘보토니에’의 정체를 안 이상 세츠라고 해도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게다가.
“엄청난… 힘이야.”
아한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릴 즈음 그들의 눈앞에 다섯 명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를이 제 검을 힘주어 꽉 쥐자 르베나 덕에 겨우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터지며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룬 역시 환한 검기를 뿜는 제 검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호안은 이미 힘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실드를 펼쳤고 아사벨 역시 호안 왕자에게 제게 남은 조금의 신력마저 나눠 주고 있었다.
그때, 모두의 긴장을 깨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식으로… 이런 때… 도움을 청해… 너… 무… 흑… 죄송해요…….”
모두의 시선이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머금은 유리엔 왕비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목소리의 주인인 유리엔 왕비는 잔뜩 고여 앞이 보이지 않을 만도 하건만 눈앞에 나타난 한 마법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왕비님께서 부른 겁니까? 아군입니까?"
딱딱하고 낮게 울려오는 아를의 말에 일행의 긴장감이 한층 더 고조될 찰나였다.
“울지 말거라, 내 딸… 나의 유리엔아……!”
일행의 앞에 나타난 마법사에게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동시에 일행 모두 몸의 긴장을 서서히 풀며 천천히 후드를 벗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흠칫. 호안 왕자가 마법사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 눈을 치켜떴다. 더없이 떨리는 하늘색 눈에 물기가 가득한 노인, 최근 10여 년 동안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마법사, 제국을 통틀어 루드바하의 가문과 유일하게 힘을 견줄 만한 세츠들의 성지.
율엔 가문의 수장이라 불리는, 아사드 드 율엔. 그가 그의 딸과 손자들을 지키러 10여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 * *
잠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은 칸이 자신의 눈을 들어 건너편에 앉아있는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다정해 보이지만 언제나 냉정하게 주위를 바라보던 그의 짙은 벽안이 부드럽게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칸은 뒤늦게 알아보았다. 그렇게 두 눈이 서로를 마주보며 수없는 이야기가 오가고 마침내 칸이 입을 뗄 찰나, 화악-!- 방 안에서 번지는 기운과 함께 루드바하와 칸 모두가 놀란듯한 표정 반, 기분 좋은 표정 반으로 새롭게 등장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르베나 님!”
“르베나……!”
둘의 부름에 문득 시선을 돌린 르베나가 잠시 놀란 듯 머뭇거리다 말했다.
“방으로 바로 오려던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칸 님. 루드바하께서 이 곳에 계신줄도 몰랐군요.”
칸에게는 미안하고 루드바하에게는 놀란 마음이겠지만 슬쩍 봐서는 여전히 무표정한 르베나의 얼굴에 두 남자의 얼굴에도 티없는 미소가 번져왔다.
“루드바하께서 오실 때 상회 내 다른 공간의 텔레포드를 모두 막아놓았습니다. 그러니 개념치 마십시오, 전하.”
“일이 있어 왔으나 그대를 보니 더욱 좋습니다, 르베나.”
함께 나온 둘의 말에 르베나가 살짝 당황한 듯 둘을 번갈아 보자 서로 다시 눈을 맞춘 칸과 루드바하가 시원하게 웃어 버렸다.
‘…갑자기 이 둘의 느낌이… 상당히 낯설군.’
이곳에서 영문 모를 둘의 친근감에 당황스러운 건 급히 텔레포트를 통해 아네벨 상회로 이동해 온 르베나뿐이었다.
탁.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르베나가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현재까지 ‘보토니에’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수집하신 게 칸 님이실 것 같아 연락도 없이 바로 왔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칸이 웃으며 테이블 위의 쿠키와 과일을 르베나 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가장 많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그들을 오랫동안 주시한 것은 맞습니다. 부디 제가 르베나 님의 질문에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칸의 말에도 르베나는 아무 대답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르베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그 순간 르베나가 마치 상념에 잠겨 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칸이 내어준 과일을 하나 먹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런……!”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칸이 르베나의 오른쪽 뺨에 난 상처를 보더니 얼른 뒤쪽에 자리한 제 책상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화아-! 루드바하의 차가운 손이 르베나의 뺨에 닿으며 순식간에 상처를 치유했다.
“아……!”
아를도 부쩍 신경 쓰는 것 같아 대충 머리로 가려 놓았던 게 드러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마저 이상한 게 있었으니, 르베나를 신력으로 치유해 준 루드바하의 시선이 이상하게도 칸에게 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상한 점이라면 어느새 손에 수십 개의 작은 약통을 쥔 칸은 잠시 멈칫했다가 루드바하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르베나의 뺨을 한번 보고, 루드바하와 눈을 맞추더니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는 것일까.
“두 분이 부쩍… 가까워지신 것 같아 보기 좋군요.”
르베나의 말에 놀란 듯 루드바하와 칸이 서로에게서 서둘러 시선을 떼었다. 마치 비밀연애를 하는 연인 사이에 낀 느낌이었다.
르베나는 언젠가 루에게 들었던 시녀, 시종 간의 비밀연애 이야기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엉뚱한 생각은 얼른 접어 두고 인사부터 전했다.
“이런 자잘한 상처까지 살피실 필요는 없는데… 감사합니다.”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다른 사람의 상처는 아주 작은 것도 잘 보면서 그대의 상처에는 유독 무디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 하나 정도 그대의 상처를 보는 것은 괜찮다 생각해 주십시오.”
루드바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르베나는 갑자기 제 앞에서 아픈 표정으로 상처를 어루만지던 아를이 떠올라 고개를 잠시 갸우뚱하게 되었다.
‘여기서 왜 갑자기 그 녀석 얼굴이… 다 맡기고 와서 미안해서 그런가.’
하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르베나의 앞에 이번에는 칸이 수십 개의 연고를 놓으며 말했다.
“가시는 편에 함께 보낼 테니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이걸 쓰십시오.”
보통은 누군가가 이런 호의를 베풀면 사양부터 할 르베나지만 왜인지 항상 칸에게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아 르베나가 감사하단 말과 함께 연고 하나를 집어 열어 보았다.
움찔.
“포션… 이 아닙니까?”
연고를 보고 놀란 르베나의 말에 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치유 세츠님들의 신력을 듬뿍 담은 것이니 효과가 나쁘진 않을 겁니다.”
해맑은 칸의 말에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르베나도 잠시 멈칫하였다. 그냥 세츠의 신력이 담긴 연고 하나에도 공작가의 마차 한 대 값을 훌쩍 넘는데.
‘치유 세츠의 신력이 담긴 포션 연고가… 수십 개라…….’
르베나가 잠시 손에 든 물건을 보며 받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지를 고민할 때 루드바하가 그녀의 생각을 부드럽게 끊어 놓았다.
“르베나 그대가 급하게 온 것이라면 ‘보토니에’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곧 연고를 제자리에 놓고는 생각의 흐름을 전환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포션 연고를 받을지 말지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사이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쉰 칸이 루드바하에게 눈으로 감사 인사를 표현한 것을 르베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르베나는 칸과 루드바하 사이에 모종의 무엇인가가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의 눈인사를 모르는 르베나는 제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헤론의 말을 다시 한번 되뇌고 있었다.
“너와… 큭… 비슷… 한 마력의 사람을… 헉헉… 알고 있다.”
헤론의 무저갱 같은 목소리를 떠올리며 르베나의 눈은 몇 시간 전 헤론을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온 그때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