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48화 (148/276)

148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20)

“어, 어떻게… 어떻게… 호안 네가… 너 같은 게 어찌……!!”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도 놀라움에 고통마저 잊은 듯한 케투아. 그가 찬란한 황금빛 힘, 신력을 온 몸에 휘감은 호안 왕자의 모습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너는… 너는 나와 같은… 나와 같아야… 하는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 중얼거리는 케투아 왕을 바라보는 호안 왕자의 금안이 어둡게 침잠되어 갔다.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제 몸 안을 가득 채우는 충만한 기운이 느껴진 것은. 하지만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신성한 힘, 모든 세츠들의 기원, 황금빛으로 스스로를 물들이는 힘, 신력이었다.

보통 율엔 가문 자녀들의 경우 신력을 타고나긴 하지만 케투아 왕이 워낙 신력이 없었기에 호안은 본인에게 신력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웠다.

하지만 그런 저를 보며 동질감을 얻는 케투아를 보면 이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놈은 자기가 세츠라고 감히 내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어도 된다 생각하는가?”

“호안, 신력도 사실 별거 아니다. 그러니 세츠 따위에게 기죽을 필요 없다!”

호안은 신력에 자격지심을 느끼는 케투아 왕의 모습이 단 한 번도 추하다 여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스스로를 괴롭히는 아버님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몸 안 가득 충만한 신력을 느낀 호안 왕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힘을 봉인하는 방법부터 익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가량 두문불출하며 힘을 봉인하는 방법을 터득한 호안은 어느새 제 힘을 제법 봉인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마저 혼인 후 힘을 쓰신 적이 없다. 그러니 이게 맞는 거야’

자신의 힘이 결코 지금의 왕가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호안의 결정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시행한 봉인마법이 완벽하지 않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대가였을까?

봉인마법 이후 그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다. 당연히 개방되어 나오는 신력과 함께 부쩍 성장해야 할 신체가 봉인된 신력의 부작용으로 자라지 않게 된 것이다.

“호안 왕자님 몸에 이상이 있는 거 아닐까? 성장이 멈추셨잖아!”

“들었어? 호안 왕자님이 병에 걸리셨대!”

그즈음부터 시작된 그를 향한 주변의 수군거림과 케투아 왕의 마땅치 않은 시선에 주눅이 든 것도 사실이었으나 괜찮았다. 이런 힘이 없어도 켄느는 언제나 강한 실드에 보호받았고 제 아버지는 그를 보며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테니.

그걸로 충분하다 여겼다. 그걸로 호안 왕자는 다 괜찮다 여겼다. 그래서 몰랐다.

절대로 쓰고 싶지 않던 힘, 아무도 모르는 힘, 불의에만 쓸 수 있다는 힘.

평생 쓸 일이 없을 줄만 알았던 이 힘을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아버지를 향해서,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와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쓰게 될 줄은.

“호… 안… 호안……!!”

호안을 부르며 눈물 흘리는 창백한 얼굴의 유리엔 왕비를 보며 호안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죄송해요… 더… 빨리 더… 일찍 지켜드리지 못해서.”

투둑……!

금안에서 떨어진 눈물에 유리엔 왕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하다. 아가…! 너에게… 너에게 이런 환경을 주어서. 이런 어미가 되어서… 미안… 하고… 또 미안하다… 호안… 내 아가… 미안해. 흑… 이런 일로…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한테… 그 힘을 쓰게 해서… 엄마가… 미안해…….”

흐느끼는 유리엔 왕비의 말을 들은 아사벨의 눈에서도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가끔 느끼는 어머니와 오라버니의 기운은 참 따뜻해서. 참 다정해서.

그래서 그들만은 행복한 줄만 알았는데.

‘우린 모두 떨어져 있어도 참 많이 아팠구나. 참 많이 힘들었구나. 참 많이… 외로웠구나.’

그럼에도 온몸을 통해 차오르는 놀랄 만큼 따뜻하고 순수한 오라버니의 신력이 생각보다 다정해서, 생각보다 조심스러워서, 생각보다 더 따뜻해서.

또 그만큼 분노하고 있어서… 아사벨은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 못했다.

그런 아사벨과 유리엔 왕비. 그리고 룬과 아한에게 한 번 씩 웃어 보인 호안 왕자의 금안이 이제는 놀라 미친 사람처럼 연신 중얼대는 케투아 왕을 향했다.

케투아 왕의 탁한 눈이 멍하니 호안의 금안을 마주보자 호안이 슬픈 얼굴로 말했다.

“잊으시면 안 되죠. 저 또한 어머님의 피를 이어받은… 어머님의… 자식이라는 것을요.”

이내 금안을 타고 흘러내리는 마지막 눈물과 함께 호안의 모든 힘이 개방되었다.

화아악---! 누군가에겐 가차 없이 냉정한 형벌이, 누군가에겐 더없이 따듯한 온기가 되는 그 빛은 곧 큰 동굴 안을 빈틈없이 채워나갔다. 호안의 몸 가득 따뜻하고 충만한 힘이 느껴졌다. 난폭하고 어설프게 봉인된 힘의 고삐에 자신마저 내어 줄 생각을 했던 찰나 생각난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던 그의 힘이었다.

“고마워요… 르베나… 왕녀님.”

호안 왕자가 찬란한 금빛 신력 안에서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 순간은 훗날 유파시드 다음으로 거대한 신력을 소유한 자, 온 제국을 선한 힘으로 도우며 많은 세츠들의 길이 될 세츠 호안의 신력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기분 좋은 힘이군.”

낮게 울리는 르베나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동굴 밖 어느 땅 위에서 작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를의 발아래 짓뭉개져 있는 검은 망토의 누군가가 보였다. 그날은 참 많은 이들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난… 그런 날이었다.

* * *

저벅저벅.

동굴 안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아직 그가 누구인지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얼굴이 환해지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한과 룬이었다.

“부단! 보고 싶었어요!!”

그답지 않게 다다다 달려가 아를을 껴안으려던 룬은 몸을 살짝 비틀며 피하는 아를로 인해 갸우뚱 중심이 쏠리며 넘어질 뻔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아한이 작게 미소 짓다 아를과 시선이 부딪혔다. 아를은 아무런 말도 없이 아한을 머리부터 발까지 쭈욱 훑어보고는 그대로 지나쳐 호안 왕자에게 걸음을 옮겼다. 서운할 만도 하건만 아한은 저를 말없이 지나치는 아를을 보며 안 그런 척 삐죽 솟아오르는 입가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들어서자마자 제 몸부터 확인한 아를만의 무뚝뚝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려 했으나 사나이의 자존심으로 애써 누른 것이었다.

“멋진 세츠로서의 각성, 축하드립니다.”

축하한다고는 하지만 더없이 무뚝뚝한 아를의 말에 호안 왕자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내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너무… 늦었는걸요.”

호안 왕자의 얼굴에는 후련함보다는 죄책감, 미안함, 두려움 같은 희미한 감정의 조각들이 더 많이 보였다. 그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던 아를이 그에게 말했다.

“스스로 딛는 첫걸음은 생각처럼 좋지만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내딛는 첫걸음만큼 용기 있는 걸음은 없습니다.”

말수 적은 아를의 입에서 긴 말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그 걸음이 기쁨과 환희로만 가득 찬 사람은 자칫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쉽습니다. 만약 왕자님의 첫걸음에 기쁨과 환희보다 걱정과 두려움이 앞선다면 왕자님은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걷고 계신 겁니다.”

아를의 말에 호안 왕자의 눈이 놀란 듯 치켜 떠졌다. 딱히 교류가 없는 아벨디온의 부단장이 제게 이렇게 좋은 말을 해 준다는 게 놀라서이기도 하고, 또 그 말이 너무나 지금 저의 심정을 콕 찍은 듯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어진 아를의 말에 호안 왕자는 더 놀라고야 말았다.

“라고 르베나 단장이 전해 주라더군요.”

말을 덧붙인 아를은 잠시 무엇인가를 탐지하듯 호안 왕자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호안은 아를의 뒷말에 놀랐다가는 곧 아련하고 뜻 모를 미소를 깊이 지어 보였다.

“참… 감사한… 좋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직이 내뱉은 호안의 말에 아를의 미간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 번 꿈틀거렸다. 아를은 그대로 휙 뒤로 돌아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 너무 많아.”

하지만 작게 나온 혼잣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아한과 룬에게 다가간 아를이 널브러진 기사들과 케투아 왕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

“다들 힘이 없는 것 같으니 룬 네가 켄느의 왕궁으로 가서 나머지 아벨디온을 불러와라. 가능하면 저들을 옮길 켄느의 기사들도 함께.”

아를의 말에 룬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부단! 지금 제 등이 안 보입니까? 왕자님 덕에 많이 아물었지만, 이 피를 좀 보십시오! 제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도저히 왕궁까지 뛰어갈 수가 없지 말입니다.”

룬의 울음기 섞인 말에 아를의 매서운 눈이 그를 향할 찰나, 옆쪽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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