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47화 (147/276)

147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9)

쾅! 콰광!!!

기사들의 일격을 막아내며 동굴에 무리가 가지 않게 조절해 쏟아내는 룬의 일격에 기사들이 하나 둘 뒤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룬에게 저런 기사들을 상대하는 일은 쉬웠지만 동굴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면서 뒤에 있는 일행도 보호하며 싸워야 하기에 시간은 예상보다 지체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여섯 명의 기사가 빈틈없이 룬을 감싼 그 순간.

“다 죽어 버려!!”

잠시 조용히 있던 케투아 왕이 피로 물든 손에 검을 들고는 쓰러진 유리엔 왕비와 호안, 아사벨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유리엔 왕비가 쓰러진 이후 어느새 달려와 일행을 감싸고 있던 아한의 실드가 케투아 왕의 검에 의해 깨져버린 순간이었다.

캉!!

케투아 왕의 검과 강하게 부딪힌 아한의 실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애초에 신력이 적고 탐지계열 세츠인 아한으로써는 한 번의 공격을 막는 것도 최선이었다.

“으흑… !”

충돌의 충격으로 뒤로 밀려난 아한의 입안가득 검붉은 선혈의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쓰러진 왕비와 곁에서 울고있는 아사벨. 그리고 뒤로 밀려난 아한.

소란스러운 병장기 소리와 룬의 검에서 쏟아지는 작은 섬광들. 이 모든 장면들이 이내 느리게 한 사람. 호안 왕자의 금안 가득 차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몇 번을 더 그렇게 그 모든 장면들을 눈 안에 담았을까.

“하아… 하악……!”

괴로움에 어깨를 들썩이던 호안 왕자의 입에서 거친 숨이 토해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금안 가득 검붉은 피를 토하며 창백하게 질린 유리엔 왕비의 얼굴이 들어찼다.

“호안… 괜… 찮아… 다… 괜찮을 거야… 그러니…조절…해라…아가, 제발”

호안을 보며 힘겹게 말하는 유리엔 왕비의 목소리가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 뒤로 옅게 흩어졌다.

“허억… 헉……!!”

어머니의 음성이 저편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점점 꽉 죄여오는 듯 한 답답함이 그의 심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가쁘게 들썩이는 가슴과 늘어지는 팔다리. 흐릿해지는 시선과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 불이 붙은 듯 화끈함이 느껴지는 눈가. 호안은 난생처음 느껴지는 생소한 감각들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눈앞에 산재한 모든 것들이 점점 흐려지고 가쁘던 숨소리도 이젠 극에 달해 더 이상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

호안 왕자의 금안이 점점 흐리게 번지고 있었다. 얼핏 그런 호안 왕자를 보던 유리엔 왕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는게 보인 것도 같다.

털썩. 울컥..!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며 호안 왕자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토해졌다.

“헉… 헉… 커흑……우웁!”

다시 한번 피를 토해낸 호안 왕자의 안에서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날뛰는 기분이 든 것도 그때였다.

‘다… 내주고싶어… 힘들어… 이젠… 그만……!!!!’

꿈같은 이 모든 상황을 누군가에게 넘겨주고만 싶었다. 그저 눈을 감고 일어나면 이 모든일이 끝나있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의 안에서는 무엇인가가 난폭하게 들썩였다.

‘편할 거야… 내어주면… 그러면……!!’

그렇게 호안이 알 수 없는 감각에, 제 몸안의 난폭함에, 모든 고삐를 내어주려는 순간.

“\…멈추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아가세요. 그대가 딛는 그곳이 곧 그대의 길이 되는 겁니다.”

며칠 전 그를 향하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크흑… !”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몸 전체 마디마디가 불로 지져지는 듯, 더 난폭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반가운 얼굴을 보고자 향했던 그녀의 방을 나서는 순간 그에게 들려온 뜻 모를 말.

왜 그 말이 지금 생각날까. 호안 왕자의 온몸이 이제는 오한으로 가늘게 떨려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그를 괴롭히던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뒤로 밀린 아한. 힘겨운 듯 무릎을 꿇은 호안. 힘이 빠진 유리엔 왕비와 아사벨.

이 모든 것을 확인한 케투아 왕이 다시 검을 치켜들며 그 틈을 타 그들, 정확히는 아사벨과 왕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멀리서 룬의 눈이 그의 위치를 확인함과 동시에 싸우던 기사들에게 자신의 등을 내어줬다.

촤악……!

“…크윽!”

한 기사가 그은 검에 선뜻 등을 내어준 룬은 그대로 빠르게 일행에게 달려갔다.

기사가 적에게 등을 내보이는 것은 수치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뒤를 내어주고서라도 비전투 인원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아벨디온 기사들이 지켜야하는 그들만의 덕목이었다.

그리고 룬은 누구보다 스스로 아벨디온임을 자신하는 기사였다.

등 뒤로 뜨거운 피가 흐르고 화끈한 통증이 몰려들었으나 룬은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제발… 제발!!’

모든 힘을 다리에 쏟아 힘껏 뛰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야속해 룬이 채 그들에게 도달하기도 전, 케투아 왕의 피가 베인 검은 사정없이 아사벨과 유리엔 왕비에게 향하고 말았다.

“안 돼!!”

룬의 간절한 바람이 소리가 되어 온 동굴을 처절하게 울리는 그 순간.

화아악--! 찬란한 금빛의 물결이 폭발적으로 온 동굴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으아악!”

제일 먼저 금빛 물결에 몸이 닿은 케투아가 검을 떨어뜨리고는 비명을 질러대며 쓰러졌다. 이어 등 뒤가 온통 피로 젖어 달리는 룬을 바로 뒤에서 쫓던 기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하나 둘졸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아악---!! 따뜻한 기운이 순식간에 일행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기운에 왕비의 선혈이 멈추었고 아한과 아사벨의 내상이 치료되기 시작했으며 룬의 등에 난 큰 검상도 빠르게 치유되기 시작했다.

“호… 안… 내… 아가……!”

하늘빛 눈 가득 눈물이 차오른 유리엔 왕비의 목소리가 순간 자신의 아들, 호안 왕자를 보며 가늘게 떨려오고 있었다.

흠칫.

칸의 앞에 앉아 찻잔을 들던 루드바하의 손이 얼핏 떨려왔다. 동시에 그의 벽안이 잔잔하게 요동쳤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그에게 칸이 물어왔다.

“불편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칸의 물음에 그의 갈색 눈을 한동안 빤히 쳐다보던 루드바하가 이내 잔잔한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기뻐서… 기뻐서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성장하는 일은. 누군가가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는 일은. 언제나 벅찰만큼 대견하고 기쁜… 순간이라서요.”

말을 마치고 자신의 감정을 금방 가라앉힌 루드바하가 다시 찻잔을 들어 여유롭게 한 모금 마셨다.

“호안 왕자님께서… 힘을 개방하신 겁니까.”

칸의 물음에 루드바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난 아비라도 아비라고 그렇게 감싸더니… 결국은 힘을 개방한 모양입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칸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세츠의 힘이라고는 하나 아시다시피 마르한의 왕은 세츠임에도 사사로이 힘을 쓰지 않습니까. 혹여라도 오래 잠재운 힘의 개방에 죄없는 이들이 다칠까 걱정입니다.”

칸의 걱정에 루드바하가 그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가는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그곳에는 르베나… 그녀가 있지 않습니까.”

멈칫. 루드바하의 말에 잠시 움찔한 칸이 곧 눈가를 부드럽게 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렇지요… 르베나 님이 계시지요.”

그 짤막한 칸의 말에 루드바하가 다시금 눈을 들어 제 눈앞의 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려한 얼굴과는 대비되는 단정한 색의 눈은 조용히 미소를 그리며 제 눈 앞의 찻잔을 향했다. 동시에 그런 칸을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눈빛에는 수많은 물결이 쏟아졌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곧 그런 루드바하의 침묵을 이상하게 여긴 칸이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깊은 벽안과 평범한 갈색의 눈이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칸,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그대도 그때… 이렇게 기뻤나요? 21년 전 그때… 말입니다.”

루드바하의 물음이 잔잔했던 수면에 작은 파동이 되어 번져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앞에 앉아있던 칸이 들고 있던 찻잔 속 붉은 차가 작지만 큰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순간 평범한 갈색의 눈빛 사이로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빛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을 루드바하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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