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8)
순간 분노에 가득 찬 호안 왕자의 눈을 스치듯 본 케투아 왕은 큰 한숨을 내어 쉬었다. 그의 한숨이 미련한 제 아들놈을 향하고 있음을 어느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하, 지랄도 병이군. 됐다. 호안, 너는 그래서 안 되는 것이다. 저런 녀석을 후계자랍시고 챙기려던 내가 어리석었지! 그렇게 나약한 마음을 갖고 어찌 일국의 왕이 된다고! 이제껏 아사벨과 같은 공주들이 없었다면 켄느는 진작에 약탈과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지 못했을 것을 모르는 것이냐!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것!! 미련한 네가 어찌 일국의 후계자가 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케투아 왕의 말에 한참 그를 보며 타오르는 금안 가득 눈물을 흘리던 호안 왕자가 이윽고 눈물을 거칠게 닦아 냈다. 그러고는 벌게진 눈을 들어 눈앞의 제 아비에게 말했다.
호안 왕자의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 울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낮게 울렸으며 언제나 조금 숙이고 있던 고개도 처음으로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
“켄느는 절대. 누군가의 희생위에 세워지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있어선 안될 희생이 있었다면. 그 희생을… 당연히 여기지도 않았어야 합니다.
그러니 보여드리겠습니다. 폐하와 선대의 왕들께… 당신들이 잘못했다고.
당신들이 잘못 생각했다고…!!!! 당신들의 생각만큼. 우리 켄느는 약하지 않다고.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호안의 단호한 말에 케투아 왕이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는 곧 코웃음치며 껄껄 웃어대기 시작했다.
“풉. 푸핫. 크하하하하. 뭔 수로!!! 응? 무슨 수로 나를 막을건데!! 어????
니 까짓게 감히 날 용서하지 못하면 뭐!! 뭘 보여준다고? 기가 차는구나. 기가 차.
제 나이에 비해 발육도 쳐지는 몸으로 언제나 남의 눈치나 슬슬 보는 왕자. 그것이 온 왕국에서 수군거리는 너라는 것을 정말 모르는 거냐? 푸하핫!!! 수치가 뭔지도 모르는 놈이 뭘 보여준다고…? 크크큭…!!!”
케투아 왕의 빈정거림에 호안 왕자의 눈이 충격으로 거세게 흔들렸다.
태어나 처음 꺼낸 진심. 태어나 처음 낸 용기. 태어나 처음… 표현한 마음.
이 모든 것이 그의 아비에겐 더없이 우습게만 보인다는 게 호안 왕자의 심장을 세게 짓눌러왔기 때문이다. 반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호안의 떨리는 눈을 본 왕비는 차오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케투아에게 소리쳤다. 소리치는 왕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감히 우리 왕자를 그리 평가하지 말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 아이가…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따듯한 아이인지…!!! 그 아이가 뭘 위해… 그 모든 수모를 견뎠는지… 흑…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구요!!”
왕비의 외침에 그녀와 눈이 마주친 호안 왕자의 금안이 사정없이 요동쳤다.
“어머니가… 어찌… 어찌……!!”
동시에 떨려오는 그의 눈동자에는 차마 새어나오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놀람. 당황. 기쁨. 아픔. 그리고 미안함.
어릴 때부터 호안 왕자는 신력이 없었다. 그런 호안을 항상 한심하다 여기면서도 케투아는 신력이 없는 자신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다며 제 아들에게 짙은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항상 신력이 높은 왕궁 내 세츠들을 질시하고 고깝게 보던 그다웠다.
그래서 호안은 참고 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시하는 근본에는 강대한 마법사 가문인 율엔 공작가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음을 알았기에.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라야 하는 후계자인 그에게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맞는 길이라고 그렇게만 믿었기에. 그의 치부마저 감싸고 함께하는 아들이 되고 싶었다.
‘호안 왕자님은 성장이 너무 느리지 않아? 뭐 문제 있는거 아닐까?’
‘남의 눈치나 보는 덜떨어진 왕자가 후계자라니, 우리 켄느도 참…….’
큰 왕성 내 모든 이들이 그를 모욕해도 대대로 신력이 강한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신력이 없이 태어난 아버지에게 저만은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그 모습이 비록 멋지지 않더라도, 가끔은 초라하더라도.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사랑임을 언젠가는 그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오직 그 단 하나의 마음만을 안고서 버텼다.
하지만 어머니가 알고 계신다.
그의 모든 것을. 그의 모든 비밀을.
호안 왕자의 눈시울이 한층 더 붉게 물들었다. 이것은 자신이 사랑하기에 더 지키고 싶었던.
그렇지만 방법을 몰라 지켜주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고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밀스럽고도 배려가 가득한 이들의 마음은 여전히 단 사람에게만은 닿지 못했다.
아프게 질러지는 왕비의 외침과 그런 왕비를 보고 눈시울을 붉히는 호안 왕자를 보던 케투아 왕이 곧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기사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말을 뱉는 그의 음성에는 한 톨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치워라. 기절을 시키든 뭐든 일단 감옥에 처넣어!! 호안 또한 그들의 세뇌에 먹힌 모양이다.
한심하기 그지 없는 것들…!! 쯧쯧.”
케투아 왕의 말에 기사들이 곧장 호안에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착. 차착.
어느새 망설임이 사라진 기사들의 날카로운 검이 호안 왕자의 하얀 목덜이에 닿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의지가 누군가의 눈에 새겨진 것도 순식간이었다.
“건드리지마!!!”
환한 신력의 빛이 순간 호안 왕자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어, 어머니……!!”
어느새 아사벨을 데리고 호안에게 다가온 유리엔 왕비가 아이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케투아 왕에게 소리친 것이다. 그녀의 손에서는 새하얀 신력이 뻗어나와 그녀의 뒤에 있는 두 아이를 빈틈없이 보호하고 있었다. 이에 기사들 역시 갑작스러운 신력의 힘에 의해 튕겨나가 차가운 동굴바닥을 굴렀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동시에 파란 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왕비의 눈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어미의 강한 의지가 새겨졌다.
“더이상 내 자식들에게 손대지 마!!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절대로……!!!”
왕비의 흔들림없는 외침과 맑은 신력. 그것들을 제 귀와 눈에 담은 케투아 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신력에 대한 케투아의 자격지심을 알아 본 왕비는 결혼 후 단 한번도 율엔 가문의 순수한 신력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감히 그의 앞에서. 새하얀 신력으로 그를 가로막았다.
이내 케투아 왕의 눈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뒤집혔다. 왕비의 신력이 그의 오랜 치부와 자격지심을 그대로 건드린 것이 틀림 없었다.
“감히… 감히 내 앞에서 신력을 보여? 감히 그딴 힘으로 나를 막아?! 보아라! 이는 역모가 틀림없음이다. 모두 들어라! 왕비와 호안 그리고 저 여자아이를 가차없이 잡아들여라. 다쳐도 상관없다. 불구가 되어도 상관없어!! 당장… 당장 붙잡아! 어서!!”
케투아 왕의 분노어린 명에 왕비의 뒤에 있던 호안 왕자가 뛰쳐나왔다. 처자식을 제 손으로 저버리는 아버지의 만행에 그의 오랜 분노와 설움이 한 마디의 말로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아버지!!”
철이 들어서는 한 번도 그를 아버지가 부르지 않던 호안의 외침. 그 절규와도 같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케투아 왕은 호안과 왕비 그리고 아사벨을 노려보며 직접 앞에 있는 기사의 손에서 검을 빼어 들고야 말았다.
스릉!
“됐다! 저 괘씸한 것들을 내 직접 잡아 죽일 것이다!!”
그 모습에 호안의 얼굴이 괴로움과 실망으로 짓이겨졌다. 그리고 분노에 찬 얼굴로 검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케투아를 본 유리엔 왕비의 하얗고 여린 손에도 푸른 핏줄이 투둑, 도드라졌다.
‘아이들을… 아이들을 지켜야 해!!’
순간 유리엔 왕비와 호안, 아사벨의 주위로 연한 하늘색의 실드가 발동되었다.
그녀의 온몸이 생명보다 소중한 제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모든 신력을 짜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혼인한 뒤 벌써 십수 년 동안 그녀는 신력을 쓰지 않았다.
타고난 힘이라 하여도 갈고 닦지 않으면 무뎌지는 법.
‘겨우 실드 하나로 이렇게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약한 몸을 느끼며 유리엔 왕비는 제 의지와는 다르게 벌써 신력이 다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사벨 또한 겨우 기력을 차렸을 뿐 세뇌가 끝난 이상 당장 스스로의 힘을 쓰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호안은……!’
이내 이를 악 문 왕비의 앞으로 어느새 다가온 케투아 왕의 검이 거칠게 휘둘러졌다.
“다 꺼져버려!! 전부 다!! 이 세상의 세츠들따윈!! 다 꺼져버리란 말이다!!!”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마구잡이로 검을 흔드는 케투아 왕의 칼날이 유리엔 왕비의 실드와 부딪혔다.
치지직……! 꽝, 꽈광!
갑작스러운 검과 실드의 충돌에 순간 케투아 왕은 손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검을 떨어트렸고 동시에 같은 타격을 받은 왕비의 입에서도 울컥. 선혈이 터져 나왔다.
“어머니!!”
“어머니!”
아사벨과 호안의 비명이 어두운 동굴 안을 메아리쳤다. 하지만 유리엔 왕비는 한 번 더 두 다리에 온 힘을 주어 버티며 입가의 피를 닦고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오랜만이라… 그래서 그러니 염려 말거라. 너희들은… 내 아이들은… 내가… 내가 지킬 거야!”
호리호리한 몸으로 힘들게 실드를 지탱하는 유리엔 왕비를 보며 아사벨이 온몸의 신력을 끌어냈지만 아사벨의 목숨만은 지키겠다는 듯 얼마 남지 않은 신력은 전혀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제발… 흑… 제발… 으흑……!”
자신의 신력에게 애원하는 아사벨의 절박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칼이 튕겨나가며 손에 부상을 입은 케투아가 눈가가 벌게진 채 벌떡 일어나 다른 기사의 검을 빼어들었다.
그의 광기어린 눈은 어느새 유리엔 왕비의 신력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번에도… 이번에도… 큭 막을 수 있나 보자!!! 아아악!!!”
미친 사람처럼 검을 들고 달려오는 그의 모습에 왕비의 입에서 또다시 울컥. 선혈이 쏟아지며 그들을 감싼 실드가 더욱 빛났다.
‘절대… 절대… 힘을 빼서는 안 돼. 죽을 각오로… 아니, 죽어도 되니까… 그러니까 내 아이들만은……지켜줘!!’
달려오는 케투아를 보며 아사벨과 호안 왕자를 감싼 유리엔 왕비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제 생명이 바스러져도 좋으니 지금 이 순간 제게 아이들을 지킬 마지막 힘이 남아 있기만을 바라며 그녀가 질끈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유리엔 왕비의 실드를 향해 케투아 왕의 검이 사정없이 내려쳤다.
콰쾅!!
엄청난 굉음과 진동이 긴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동시에 그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은 케투아 왕의 신형이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이를 본 기사들은 재빨리 멀리 쓰러진 왕에게 다가가 그들의 왕 주위를 빈틈없이 둘러쌌다.
“더 이상은 봐주기가 힘들어졌다. 이 새끼야!!”
분노 가득 찬 음성이 눈가가 벌게진 채 바닥을 나뒹구는 케투아 왕을 향한 순간이었다.
그를 믿으라는 르베나의 말을 듣고 모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룬은 결국 목숨을 담보로 제 아이들을 지키는 유리엔 왕비를 보고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그냥 쏟아 버렸다.
“모든 일에는 정도가 있는 거야! 제 가족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너 같은 새끼한테는 이들이 너무 과하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냐!!”
룬의 말을 들으며 나동그라진 제 몸을 보던 케투아가 곧 기사들에게 광폭하게 소리쳤다.
“다 죽여! 저 기사고 뭐고 다 죽이라고!! 어느 한 놈도 살지 못하게… 그냥 다 죽여 버려!!”
케투아 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힘겹게 버티던 유리엔 왕비의 실드가 희미해지다가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털썩.
“…어머니!!”
힘없이 쓰러져버린 유리엔 왕비에게 다가가며 아사벨이 울부짖었고 마치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케투아 왕을 감싸던 기사들이 룬과 그 뒤에 자리한 아이들에게 돌격하기 시작했다. 룬의 눈이 차디찬 분노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