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45화 (145/276)

145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7)

“이런……!”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르베나를 쳐다본 헤론이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왕녀 전하께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율엔 공작가는 대대로 뛰어난 마법사들을 수도 없이 배출해낸 가문입니다.

아마도 온 제국을 통틀어 유파시드의 가문과 함께 가장 강한 가문이라고 해도 허언이 아니겠죠.

켄느의 왕들이 항상 왕비들을 율엔 공작가의 직계, 방계 등에서 구한 것도, 켄느 왕국이 왕국실드 이전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저 유리엔 왕비의 가문인 율엔공작가 때문이죠. 그렇기에… 율엔 가문까지 적으로 돌리면 ‘보토니에’ 안에서 제 입장은 많이… 아주 많이… 곤란해집니다.”

정말이지 듣기 싫은 쇳소리로 말을 잇던 헤론이 다시 무저갱처럼 어두운 눈을 들어 유리엔 왕비를 보았다.

어떻게 죽여야 할까를 고민 하는 듯 유리엔 왕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짚은 어둠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를 본 왕비와 그녀의 뒤에 있는 아사벨의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왔다.

하지만 곧 그의 눈은 불타오르듯 격정적인 검붉은 빛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다.

“‘보토니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나보군.”

휙.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 깜짝할 새 헤론의 앞에 나타난 르베나가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말이란건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거라고.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르베나의 말에 헤론이 미처 답하기도 전, 퍽 소리와 함께 헤론이 뒤로 쓰러졌다. 헉,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쓰러진 그의 주위로 검붉은 마력의 잔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너같은 쥐새끼 교육은 내 전문이라고.”

헤론은 놀란 얼굴을 서둘러 지우고서는 재빠르게 제 몸에 실드마법을 쳤다. 하지만 그런 헤론이 우습기라도 하다는 듯 르베나는 그의 마법실드를 가볍게 뚫고 한 손으로 헤론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 찰나의 순간, 르베나에게 들린 헤론이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르베나를 보았다.

“나는 마법사이기 전에 기사다. 그리고…….”

퍽.

“흐악!!!”

마법실드를 뚫고 들어온 순수한 물리력, 주먹으로 복부를 세게 얻어맞은 헤론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고통과 함께 헛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너도 ‘보토니에’니까… 그들이 좋아하던 건 좋아하겠지?”

헤론이 고통스러운 배를 부여잡은 와중에도 무슨 헛소리냐는 듯 경악에 찬 눈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르베나가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상황과 장소, 때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만큼 환한 미소. 그건 헤론이 순간 제 아픔도 잊고 멍하니 바라볼 만큼 아찔한 미소였다.

동시에 헤론은 제 등골이 서늘할만큼 기분나쁜 직감이 들기 시작했다.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눈앞의 르베나에게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보토니에’ 훈육시간.”

“…뭐라고? 윽!!”

헤론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 르베나에게서 나온 검붉은 마력은 헤론과 그녀의 주위를 둘러쌌다.

뭘 해볼 엄두가 나지않을만큼 강력하고 단단한, 그러면서도 온 공간을 가득 채우는 순수한 마력.

이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가운데 룬이 다급하게 르베나에게 소리쳤다.

“다, 단장님!”

룬의 목소리는 애절하게 떨리는 소리로 동굴 속을 진동했다.

“여, 여기 보호할 인력이 너무 많은데요!!!”

울음기 가득한 소리로 룬이 제 옆의 아한과 왕비, 그리고 힘이 빠진 아사벨과 호안 왕자를 번갈아 보았다.

마치 룬은 르베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람들 다 누가 보호해요! 저한테는 아한만 맡으라고 하셨잖아요!

옆에서 그런 룬의 눈빛을 본 아를은 그와는 다른 의미로 르베나에게 불편한 눈빛을 보냈다.

정확히 말하면 아를의 눈은 르베나에게 잡혀있는 헤론의 멱살과 그런 헤론에게 닿아있는 르베나의 손에 강하게 박혀있었지만.

룬과 아를을 한번씩 본 르베나가 점점 더 크게 번지는 검붉은 마력에 휩싸이며 말했다.

“걱정마라. 이 곳엔 그가 있으니.”

말을 끝냄과 동시에 폭사하는 검붉은 빛과 함께 사라지는 르베나의 눈길이 아주 잠시 누군가의 떨리는 눈동자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리고 재빠른 그림자 하나가 눈 깜빡할 새 서서히 사라지는 르베나의 마력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내 르베나와 헤론이 있던 자리에는 잔잔한 마력만이 감돌 뿐 둘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동굴 안에서 싸울 경우 비전투 인원의 안전을 걱정한 르베나가 헤론을 데리고 동굴 밖으로 향한 것이리라.

그 모습에 룬은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부단까지… 나를 두고… 하아……!”

텔레포트 하는 르베나를 앞뒤 없이 따라간 아를의 빈자리를 보며 룬은 울상이 되어 연신 중얼거렸고 그런 룬을 위로하듯 아한이 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성의 없이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 유일하게 당황을 넘어 초조해진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케투아 왕이었다.

유일하게 믿었던 헤론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 만큼, 딱 그만큼 당황스럽고 두려운 그의 심정이 떨리는 음성을 따라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뭐,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어서 나를 보호해라! 아니면 내 이곳을 나가 너의 가족들에게 그 죄를 물을 것이다! 너희 가족들이 대신 벌 받기 전에 어서, 어서 나를 보호하란 말야!!”

소리를 지른 케투아 왕의 말에 기사들이 흠칫 정신을 차린 듯 그의 주위를 둘러싸 엉거주춤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맞는 건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모두 마음을 정한 듯 이내 표정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케투아 왕은 상에는 인색했지만 벌에는 강한 인물이었다.

이전에도 케투아 왕의 심기를 어지럽혀 본인의 가족들이 대신 형벌을 받은 끔찍했던 순간들을 기사들은 이 순간 절대로 잊지 못했다.

물론 유리엔 왕비의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찌 됐든 기사들의 주군은 케투아 왕이었다.

곧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케투아 왕이 잠시 그들을 둘러보며 든든함에 미소 지었다가는 서둘러 동굴 밖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가장 강한 계집애가 없으니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군.’

아사벨과 왕비는 후에 ‘보토니에’의 힘을 빌려 세뇌를 시키거나 그 처분을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그따위 생각을 하며 바삐 발길을 놀리는 케투아 왕을 본 룬은 이상하게도 그 순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한 역시 그런 룬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빠져나가는 케투아 왕을 보며 유리엔 왕비와 아사벨만이 사색이 되어 룬과 아한에게 도움의 눈길을 향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곧 모두의 눈이 한 사람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가장 존재감이 옅었던 이. 언제나 기가 죽어 고개조차 들지 못하던, 부끄러움과 창피함으로 가득 차 미소 한번 시원하게 짓지 못했던 그.

호안 왕자가 금빛 눈동자를 똑바로 들고 케투아 왕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를 본 유리엔 왕비의 하늘색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아사벨은 손까지 덜덜 떠는 왕비를 보며 제 작은 손을 뻗어 그녀의 차가운 손을 꼬옥 잡았다.

“오라버니는… 걱정 마세요, 어머니.”

아사벨의 작은 목소리에 왕비의 놀란 눈이 아사벨을 향해왔다.

곧 아사벨과 눈을 맞추고 겨우 작게 미소를 지어보인 왕비가 다시 떨리는 눈을 들어 호안 왕자와 케투아 왕을 바라보았다.

“와, 왕자! 에잇, 어서 이리 오너라! 내 저것들은 괘씸하지만 후계자인 너만은 내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지체시키지 말고 어서 이리로!!”

제 앞에 있는 호안 왕자를 본 케투아 왕이 선심 쓴다는 듯 외쳤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얼른 나와 호안을 위해 길을 터라.”

그는 동시에 기사들에게 길을 터라 명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왕비는 아사벨에 의해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항상 온순한 왕자만은 아비인 제가 챙기는 것이 맞다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그전까지는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왕자를 보자 이와 같은 생각들이 원래 제 것처럼 나기 시작했다.

그런 케투아 왕을 보며 호안 왕자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질 법한 슬픈 미소를 보였다.

“폐하… 항상… 어마마마를 업신여기시고, 저를 항상 무시하여도 폐하를 존경하려 애썼습니다. 어쩔 수… 없으셨을 거라. 그만큼… 국사가 힘든 것이리라 헤아리고 또 헤아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제 잘못이었습니다. 참으면 안 됐습니다.”

천천히, 작은 목소리지만 깊은 회한을 담은 말이 단정한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죄 없는 어머니를 업신여기실 때, 죄 없는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처지에 맞지도 않은 엄한 벌로 고통스러워할 때… 그때… 그때부터 참으면 안 됐습니다. 그랬다면 어쩌면…….”

속절없이 흔들리는 호안 왕자의 금안이 제 어미 뒤에 간신히 서 가늘고 약한 몸을 지탱하는 한 아이에게 향했다.

“제, 제 동생이… 저렇게… 외롭고 힘들게 오랜 시간을… 살진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요.”

여기에 언제나 주눅 들어 끝말을 맺지 못했던 호안 왕자는 없었다.

그는 눈을 똑바로 들어 케투아 왕을 바라보았고 흔들림없이 그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비록 아직도 나이에 비해 작은 그의 몸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의해 떨리고 있었고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져나왔지만.

머릿속에서는 이제 그만 하라 외치는 습관적인 두려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호안은 이를 물리치며 떨리는 제 발을 바닥에 단단히 묶어두었다.

동생.

그에겐 평생 있는지도 몰랐던 동생이 있었다. 일국의 공주로 태어나 평생을 외로움과 그리움 속에 갇혀 있었을.

한눈에 보기에도 가늘고 어린 몸으로 저를 평생 지켜 준 유모의 죽음에 분노했던, 작은 몸으로 차마 운용하기 힘든 큰 힘을 알 수 없는 세뇌에 의해 써 가며 하얗게 바랜 머리카락과 눈을 지닌.

그러면서도 평생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그리워했다는 아이.

처음 본 제 어미를 지키려 덜덜 떨리는 다리에도 힘껏 힘을 주고 가늘고 얇은 두 팔로 어머니를 보호하려는… 어린 동생이 있었다.

호안 왕자의 눈에서 툭, 투욱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 어리고 처절한 동생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 그럼에도 강하고 용기 있는 동생의 모습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좋은 옷과 좋은 환경에도 언제나 눈치만 보던 제 스스로가 비참하고 한심해 용서할 수가 없었다.

케투아 왕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아야 어머니가 그만 우실 거라 생각했다.

저 하나 아버님께 고개를 조아리고 순하게 웃어 드리면 그것이 곧 가족의 행복이라 생각했다. 백성들의 아픔을, 비명을 모른 척하는 것이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케투아 왕을 자극하지 않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짓밟힌 누군가의 어린 희생으로 보호받으며 사는 줄도 모르고 호안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고 모자란 오라버니이며 아들이었던가.

호안 왕자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툭, 툭, 흘러내렸다.

“저는 생각보다 더 형편없는 아들인가 봅니다. 도저히 폐하를… 용서할 수가 없는 걸 보면요.”

호안 왕자의 금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때까지도 동굴을 무사히 빠져나갈 생각에만 빠져있는 케투아 왕은 미처 보지 못했다.

언제나 다정함과 배려, 그리고 수줍음으로 잔잔히 흐르던 호안 왕자의 여린 금안이 마치 용광로에 녹아드는 황금처럼 누구보다 격정적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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