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44화 (144/276)

144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6)

갑작스러운 켄느 기사들과 함께 온 누군가의 등장에 동굴 안에는 사람들의 긴장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타닷.

그때 작은 발걸음 소리가 소란스럽게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아사벨……!”

제 품에서 벗어나 어느새 왕비의 앞으로 달려가서는 작고 가는 두 팔을 양옆으로 힘껏 벌린 아사벨이었다.

“어머님. 뒤로 물러나세요. 저자는… 저자가 바로 ‘보토니에’예요! 이리란을 죽이고… 저를 죽이려던 자라고요! 위험해요. 어서 물러나세요, 어서!!”

겁에 잔뜩 질려 온몸을 덜덜 떨면서도 이제 갓 만난 어미를 지키겠다고 작은 두 팔을 양쪽으로 힘껏 벌린 어린 딸의 모습에 왕비는 다시금 눈시울이 발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왕비는 얼른 감정을 추스르고는 아사벨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제 등 뒤로 숨기며 기사들의 앞에서 검은 망토를 눌러쓴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를 바라보는 왕비는 눈에 더 이상 어린 딸을 바라보는 부드러움은 결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네 놈이 이리란을 죽이고 내 어린 딸의 목숨마저 앗아 가려던 놈이냐! 내 칸느의 왕비인 내 모든 것을 걸고 결단코 네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분노에 찬 왕비의 외침이 온 동굴 안을 메아리쳤다.

평생 잃은 줄 알았던 어린 딸과 그 어린 딸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생명을 내어준 이리란을 생각하니 왕비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태어나 느낄 모든 분노가 오늘 하루로 몰려든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왕비를 바라본 ‘보토니에’의 마법사는 그저 피식 웃으며 성의 없는 답을 할 뿐이었다.

“여인은 지아비의 뜻을 따라야지요. 그게 혼인한 여성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왕비님. 부군께서는 이미 저희와 손을 잡았는데 그의 여인인 당신이 저를 죽이겠다니… 이거야 무서워서 원, 크크큭.”

성의 없이 내뱉는 그의 말에서도 왕비는 처음으로 알게 된 경악할 뜻에 고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왕비가 그의 말을 듣고는 구석에 있는 케투아 왕을 향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외쳤다.

“‘보토니에’와 손을 잡다니… 사실입니까? 이게 진짜란 말입니까? 정녕… 미치신 겁니까? 어린 딸의 희생을 짓밟고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젠 제국과 다른 왕국들이 적으로 지명한 단체와 손을 잡다니요! 그러면 켄느 왕국이 어찌 될지 뻔히 알면서……!”

그녀의 눈에는 이제 분노를 넘어서 경멸과 혐오의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당신이 어린 딸을 학대하면서까지 지켜려 한 게 이 켄느 왕국조차도 아니란 말입니까!!”

왕비의 말에 어느새 마법사에 의해 풀린 손을 툭툭 돌리던 케투아 왕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조소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왕비의 말대로 그 왕국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니 그런 가문을 등에 업고도 매일 제게 무시나 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무척이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몸을 쭉 폈다.

“‘보토니에’는 아주 큰 힘을 가진 단체입니다. 이들과 손을 잡으면 우리는 영원히 살고 영원히 보호받을 수 있어요. 제가 직접 봤습니다. 죽은 자도 되살리는 저들의 힘을……! 그러니 왕인 제가 영원히 살면 이 켄느 왕국이 어찌 되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우리 왕국의 번영도 영원히 지속될 거란 말입니다!!”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말을 내뱉는 케투아 왕의 안광이 묘하게 반짝였다. 그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 왕비가 아사벨을 제 등 뒤로 더욱 깊숙이 숨겼다.

비록 어질고 지혜로운 성군은 아니었으나 이리도 사리 분별이 없을 줄은 몰랐다.

뻔뻔한 얼굴 뒤로 자신의 친딸을 모질게 학대하고 그도 모자라 불온한 단체와 손을 잡다니.

케투아 왕은 더 이상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 작은 아이의 신력을 탐내는 쥐새끼가 너였나?”

낮고 고요한, 그러면서도 소름이 돋을 만큼 매력적인 음색에 ‘보토니에’의 마법사, 헤론이 고개를 돌렸다.

“호오… 말로만 듣던 르베나 공주, 아니 이제는 왕녀 전하라 해야 할까요? 하핫. 이렇게 뵙는군요.”

무저갱 같은 안광을 빛내며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를 낸 헤론은 흥미롭다는 듯 르베나를 살폈다.

“흠… 과연 ‘보토니에’의 마법사들이 갑작스레 비명횡사를 당할 만한… 황홀한 마력이군요.”

마법사의 태평한 말을 듣던 케투아가 이제 이 동굴이 지겹다는 듯 그에게 소리쳤다.

“뭘 꾸물대는 거야! 어서 저 마녀 같은 년을 죽이지 않고! 생각보다 실력 있는 년이니까 어서 저년을 죽이고 아사벨에게 풀린 금제를 다시 걸어 줘, 어서!!”

헤론에게 르베나의 살해를 명한 케투아 왕이 켄느의 기사들에게도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너희는 또 뭣들 하는 거냐! 왕국의 질서를 어지럽힌 저 아벨디온인가 뭔가를 잡아들여라, 당장!! 왕명이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기사들이 잠잠하자 케투아 왕이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며 다시 소리 쳤다.

"다들 왕명을 무시하다니 죽고 싶은 게냐!!"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반대 방향에서 그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들어라! 케투아 왕은 이 시간부로 왕의 자격을 박탈하고 지하 감옥에 구금한다. 그는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왕실을 욕보이고 기망했으며, 절대로 잡아선 안 될 단체와 협력해 우리 켄느 왕국과 백성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다. 내 엄중히 그의 죄를 물을 것이니 그대들은 어서… 죄인을 포박하라!”

여리지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강단이 묻어나는 목소리.

이제 갓 태어난 제 아이를 한순간에 잃고 케투아에 의해 하루하루 작아져만 가던 여인.

하지만 소중한 이가 마지막을 걸고 지킨, 그렇게 다시 만난 어린 제 딸을 지키기 위해 모든 두려움을 물리쳐 낸 여인.

누군가는 말했다. 제 아이를 지키는 어미만큼 강한 존재는 없다고.

오랜 시간 숨죽여 지내던 켄느의 왕비가 왕비로서 처음으로 크게 목소리를 낸 순간이었다.

동굴에 한차례 적막이 깔리고 다소 혼란스러운 기사들의 눈이 케투아 왕과 왕비를 향해 두리번거렸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도 본인이 오지 않으면 비밀의 숲으로 전원 무장한 채 오라는 왕의 명령에 따르기는 했지만, 기사들은 이곳에서 마주친 진실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갑자기 나타난 ‘보토니에’의 마법사, 잔악하다고 알려진 그들과 손을 잡았다는 자신들의 왕, 그리고 오래전 죽었던 공주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때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던 왕비의 말만 믿고 갑작스레 자신들의 왕을 포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사들의 혼란스러움을 눈치챈 케투아 왕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왕비에게 소리쳤다.

“어디서 감히… 어디서 감히 왕인 나를 죄인이라 부르는 것이오! 왕비라고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지, 내 정녕 당신의 가문과 당신 모두를 칼질해야만 정신을 차리겠소!”

왕의 품격을 뽐내기라도 하듯 케투아 왕은 커다란 목소리로 한껏 팔을 휘두르며 다시 한번 명령했다.

“모두 들어라! 왕비께서 광증에 걸리셨다. 내가 ‘보토니에’란 조직과 손을 잡았다 믿고 죽은 딸이 살아 있다 믿고 계시다! 모두 저 사악한 르베나 공주 일당이 마력으로 왕비를 조종한 탓이다! 그러니 켄느의 기사들은 모두 저 공주 일당과 왕비를 잡아들여라, 어서!!”

다시금 떨어진 왕의 명령에 기사 중 몇 명이 왕비를 향해 움직이려 했다.

일단은 왕의 기사들이기에 그의 명을 따르는 게 더 옳은 선택이라 여긴 것이리라.

그리고 그 순간 단단한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금 동굴 안을 가득 채워 들려왔다.

“나 율엔 공작가의 여식이며 켄느의 왕비인 유리엔이 그대들 아벨디온에게 정식으로 의뢰합니다. 그대들은 약자들을 괴롭히고 왕국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이들을 왕국과 유파시드의 청에 의해 처단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켄느 왕국을 어지럽히는 저 켄느의 왕 케투아와 ‘보토니에’의 마법사를 처단해 주시오.”(@정식 의뢰인 만큼 단순한 명령어로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왕비가 이내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에 대한 대가로 왕실은 그대들의 켄느 왕국 내 활동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할 것이며, 더불어… 율엔 공작가에 속한 모든 힘을 동원해 그대들을 도와 ‘보토니에’ 조직의 말살을 지원하겠습니다. 르베나 단장, 나의 의뢰를 받아 주겠나요?”

아사벨을 감싼 여리고 흰 손은 분노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지만 르베나를 직시하는 하늘빛 눈에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가득 차 있었다.

반드시 자신의 아이들을 지켜 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왕국을 지키겠다는 왕비의 굳은 의지가 그녀의 눈을 타고 르베나에게 단단히 전해진 것이다.

이를 본 르베나가 유리엔 왕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그녀의 검을 꺼내 들었다.

얇고 반짝이는 은빛의 검이 르베나의 검집에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스릉.

“정식으로 청하지 않으셨어도 꼭 해야만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담은 갖지 마십시오.”

처음 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르베나의 눈을 보며 유리엔 왕비가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날카롭게 쇄도하는 빛이 유리엔 왕비를 향해 쏘아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누구도 대응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쏘아진 마법에 아사벨조차 놀라 대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차갑게 쏘아진 마법은 이내 유리엔 왕비의 눈동자에 닿았다.

아니, 닿으려 했다.

휘익……!

하지만 얇지만 적당한 무게를 가진 은빛의 검은 날카롭게 쏘아진 마법을 가볍게 튕겨낼 만큼 빠르고 강했다.

이 모든 모습을 순식간에 강제로 보게 된 유리엔 왕비의 눈이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놀라움과 경외의 빛을 차례로 띠며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눈으로 겨우 고개를 돌린 유리엔 왕비의 하늘빛 눈동자에 이내 한 사람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왔다.

르베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또한 몸의 미동조차 없이 빛처럼 빠르게 발도한 그녀의 검이 헤론의 마법을 가볍게 튕겨 낸 것이다. 유리엔 왕비가 이에 감탄할 틈도 없이 르베나의 검붉은 눈동자에도 작은 빛이 날카롭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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