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5)
동굴 안에는 한참 동안 두 모녀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이내 제 품 안에 안긴 가녀린 아사벨의 몸이 본인을 그 무엇보다 따뜻하게 채워주었다는 것을 깨달은 왕비가 조심스레 아사벨을 품에서 떼어놓고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왕비의 손길에 아사벨이 물기 어린 옅은 하늘색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왕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언젠가 이리란이 말해준 것처럼 보는 이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감싸 안는 온화하고 맑은 미소였다.
“아가, 아가가 가족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라 이 어미가 약속하마. 그 누구도 나를 지나지 않고서는 너를 해칠 수 없을 것이고, 나를 짓밟지 않고서는 너를 외롭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 목숨을 바래지 않고서는 너를 울릴 수 없을 것이라… 내 약속하마.”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을 담은 작지만 또렷한 선언이 동굴을 울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온 그녀의 소망이 다시 한번 아사벨의 가슴에 가 닿았다.
“그러니 아가, 오랜만에 본… 이 어미한테… 한 번만 웃어… 줄래?”
왕비의 말을 들은 아사벨의 옅은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수백, 수만 번을 그렸던 엄마의 품.
그저 닿아 있기만 해도 따뜻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아사벨의 엄마라는 눈앞의 아름다운 여성은 아사벨이 수없이 꿈꾸었던 말을 들려 준다.
제 눈에 흐르는 눈물보다 제 얼굴에 닿은 왕비, 엄마의 손길이 더 뜨거움을 느낀 아사벨이 눈을 꼬옥 감았다.
‘꿈이… 아니야… 이렇게… 뜨거운걸…….’
곧 아사벨이 눈을 뜨자 고여있던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얼굴에 닿아있는 왕비의 손에 얼굴을 살포시 기댄 아사벨이 말갛게 웃어 보였다.
“네, 네. 웃을게요. 어머니가 그리웠던 만큼, 더 많이 웃을게요. 어머니가 보고팠던 만큼, 그리고… 이리란이 바라던… 딱 그만큼… 더 많이 웃을게요.”
곧 말간 미소가 더욱 진하게 번진 아사벨의 눈가에서 다시 한번 투명하고 맑은 눈물이 떨어졌다.
‘마지막이야… 이게 내가 흘릴 마지막… 눈물이야.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나만 행복해서… 그래서 미안해, 이리란.’
이내 아사벨은 태어나 가장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자신의 앞에서 아직 눈물을 거두지 못한 엄마가 부디 더 이상은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이 순간 모두가 뿌듯하게 바라보는 모든 모습을 한 편의 촌극이라 생각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 비극을 만들어낸 당사자인 케투아 왕이었다.
그는 이내 두 모녀에게서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왕비도 아사벨과 함께 세뇌를 시키거나 묻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대대손손 켄느의 왕들이 지켜낸 왕국의 비밀이 온 세상에 까발려지고, 켄느는 더 이상 그 어떤 적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왕비를 죽이면 뒤가 복잡할 테니…….’
잠시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가 케투아 왕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그래도 그에겐 켄느의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저들에게 결박되어 있지만, 그에겐 그들이 있었다.
‘보토니에’.
어느 날 갑자기 케투아 왕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그만을 영원히 지킬 실드를 약속했다.
켄느 왕국은 공주들의 희생이 뒷받침된 실드가 보호해 주지만 켄느 왕 하나만을 보호해 주진 못했다.
힘이 분산되면 제 개인의 안위가 위험해질 때 완벽한 안전을 보장받지는 못하는 법.
게다가 역대 왕들과 다르게 신력이 없이 태어난 왕인 그는 안전에 대한 집착이 더 심한 편이었다.
또한 젠픽스에서 보았던 유파시드와 르베나의 힘은 마법사의 경지를 넘은 그 어딘가에 있어 보였다.
만약 그들이 켄느 땅을 노린다면 공주의 실드가 버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왕인 나 하나라도 안전해야하지 않을까 싶었던 왕은 오랜 고민 끝에 ‘보토니에’에게 긍정의 답을 전했다.
그들이 보여준 힘에는 약속을 지킬 만한 여유가 있어 보였고 그들이 약속한 대가에 비하면 조건은 시시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저희 쪽 사람 하나를 젠픽스 때 켄느의 기사로 위장시켜 주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 하나로 본인의 안전을 영원히 보장받을 수 있다면 이건 너무도 쉽고 이득이 큰 거래였다.
물론 그들이 그 기회를 틈타 드록 왕자를 죽이고 르베나 공주를 노릴 줄은 몰랐지만, 여태껏 아무도 케투아 왕의 개입을 의심하진 못하니 상관없었다.
이번에 아사벨의 말을 들으니 그 몰래 아사벨의 신력을 탐낸 것 같아 처음엔 화도 났지만, 르베나가 개입하는 바람에 왕국의 실드보다는 제 한 몸의 안위가 더 중요해진 지금, 그 분노조차도 옅어졌다.
게다가 그에겐 숨겨둔 묘수가 있었다.
잠시 불안하게 르베나와 아를, 그리고 아사벨을 보던 케투아 왕은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으득.
‘젠장, 피가 필요한데 손, 발이 결박되어 있으니 도리가 없군.’
여기서 저것들에게 개죽음을 당하느니 혀끝에 나는 작은 상처 하나가 백배 나았다.
순간적으로 찌릿하고 아린 통증과 함께 엄청난 쓰라림이 몸부림쳐오며 입 안 가득 비릿한 향이 퍼져 나갔지만 상관없었다.
이런 가벼운 상처쯤은 그들이 고쳐줄 테니.
“아르쉘, ‘보토니에’.”
케투아 왕은 아주 작은 소리를 내어 그들이 알려 준 주문을 외웠다.
드디어 왕비와 아사벨의 촌극을 끝낼 시간이었다.
차차착, 착착.
순간 질서정연한 수많은 사람들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촤착, 착착착.
동굴 안이기에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그 걸음 소리들이 지척이 닿았을 때 케투아 왕은 소리 없이 환호를 내질렀다.
약한 불빛에 비친 녹색의 제복.
켄느의 정예기사들이 왕을 구하러 드디어 이곳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그토록 그가 기다리던 그, ‘보토니에’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씨익.
짙게 미소 지은 케투아 왕의 입가에 검붉은 선혈이 낭자했다.
* * *
“금지된 숲?”
루드바하의 고요한 음성에 앞에 부복한 이가 계속해 말했다.
“네! 르베나 님과 아벨디온 기사들이 켄느 왕국의 금지된 숲에 들어가 이틀째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케투아 왕 역시 기사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유파시드의 벽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잠시간 말이 없자 그의 앞에 부복했던 성기사는 익숙한 듯 정중히 목례를 한 후 방을 벗어났다.
그리고도 한참을 더 유파시드가 고요에 휩싸인 그때,
“오늘은 안 됩니다. 할 일이 태산입니다. 르베나 공주, 아니 왕녀는 누구에게도 다치지 않을 사람이 아닙니까. 차라리 일에 치여 다칠 저를 먼저 생각해 주십시오.”
차가운 말투로 우는 소리를 잘도 하는 유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루드바하가 그를 한 번 쓱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옅은 미소르 지으며 말했다.
“난 항상 너를 더 생각한다, 유안. 그게 당연하지 않나.”
절대 루드바하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것 같은 말이 나오자 유안이 작은 외알 안경을 내려놓고 그를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루드바하가 갑자기 더 크게 미소지으며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더 좋은 재상이 되어라, 유안. 이건 그러기 위한 훈련이다.”
그렇게 부드러운 미소를 남긴 루드바하의 자리는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루드바하의 정갈한 신력들이 자잘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득.
방 안에 홀로 남은 유안의 손안에서 애꿎은 펜이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젠의 중심이며 세츠의 중심이신 유파시드에게 언제나 신의 안배가 함께하시길.”
고개를 숙인 이의 정중한 인사에 루드바하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례를 무릅쓰고 텔레포트로 왔습니다.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맞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고개를 든 이, 칸의 얼굴에 사람좋은 미소가 어렸다.
그 순간 루드바하의 새파란 벽안과 칸의 흔한 갈색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이윽고 칸의 입이 열렸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젠의 유파시드여.”
칸의 말에 루드바하의 벽안에서 새파란 안광이 스치듯 지나갔다.
루드바하와 칸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