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42화 (142/276)

142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4)

“오, 오해요, 왕비! 아사벨은… 그 아이는 이미 죽었소. 알 수 없는 병에 의해 죽은 걸 그대도 알지 않소! 단지 이전에는… 이, 이전에는 공주들이 그리 쓰였다는 걸 말하는 것일 뿐이오!!”

케투아 왕은 열심히 왕비에게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언제나 왕비의 의견을 무시하는 그였지만 이 상황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케투아 왕비의 친정은 켄느 왕국 최대의 공신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다른 왕족을 내 자리에 앉히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

지금 떠오른 생각이 결코 거짓이 아니기에 언제나 케투아 왕은 왕비의 기를 꺾으려 애쓰면서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었다.

그랬기에 절대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바로 아사벨이었다.

반면 왕비를 향한 케투아 왕의 말을 들은 르베나와 아를 일행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사람의 입에서 사람 같지 않은 말만 나오니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대신 르베나는 제 등 뒤에서 연신 떨고 있는 아사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검붉은 눈동자가 저를 향하자 움찔 놀란 아사벨이 눈물 가득한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 순간 다른 사람의 눈에 아사벨을 향하고 있었다. 연신 눈물을 흘리면서 작은 손으로 르베나를 붙잡고 있는 아이를 향해 힘겹게 눈길을 돌린 건 바로 켄느의 왕비였다.

“아가, 네가 말해 보거라. 너는 누구니?”

떨려오는 왕비의 목소리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르베나의 뒤에 숨어있어 잘 보이지 않는 아이는 멀리서 언뜻 보기에도 형편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왕비의 목소리는 생각보다도 더한 진동을 타고 떨려왔다.

더없는 간절함으로 그 아이가 자신의 아사벨이기를 바라다가도 더없는 처참함으로 그 아이가 살았을 인생이 부디 아사벨의 것이 아니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윽고 아사벨에게 많은 시선이 모이자 작은 손을 덜덜 떨던 아사벨이 희게 변한 옅은 하늘색 눈으로 케투아 왕을 한번 바라봤다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저, 저는 아사벨… 아사벨이… 아… 아니에요.”

그리고 나온 아사벨의 말에 왕비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것이 자신의 아이가 고된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다는 안도감인지, 잠깐이라도 만나길 바라던 아사벨이 아니어서 느껴지는 실망감인지 그녀조차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사벨의 정체를 아는 르베나와 아를, 룬과 아한은 그런 아사벨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아직은 작은 아아의 선택을 좀 더 존중하며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면 아사벨은 차가운 동굴 바닥에 주저앉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리란이 설명했던 그대로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 그 여인이 아사벨을 위해 울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금발 금안의 멋진 오라버니, 그는 아사벨을 위해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금안이 어두운 기운으로 일렁거리는 모습이 선명했다.

그러니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자길 사랑한다는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 아사벨은 더 이상 욕심 내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실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지킬 것이다. 그러니 괜히 자신의 고된 인생을 알려 고운 그들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리란은 언제나 말했다.

사랑은 베푸는 거라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즐거운 게 사랑이라고.

그러니 언젠가 아사벨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거든 그 사람은 아사벨이 아프지 않도록, 언제나 웃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러니 아사벨도 그럴 것이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지만 언제나 그리던 어머니와 오라버니.

그들을 위해 그들이 아프지 않도록. 언제나 웃을 수 있도록.

아사벨은 그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맞는데… 왜 자꾸 이렇게 뜨거운 걸까.’

찬 바닥에 앉아있는 어머니의 고운 손을 한 번만 잡아 보고 싶었다. 분노한 눈으로 케투아 왕을 노려보면서도 떨리는 금안으로 저를 바라보는 오라버니에게 다가가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왜 이제 왔냐고.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는지 아느냐고.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팠는지 아느냐고.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느냐고. 새하얘지는 머리카락을 볼 때마 얼마나 두려웠는지 아느냐고.

울고불고 매달리며 모두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리란과의 이야기를, 이리란의 죽음을, 그들과 나누며 함께 웃고 울고 싶었다.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런데 그 생각들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뜨거운 눈물이 되어 아사벨의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뚝, 뚜둑.

서럽게도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동굴 안을 간간이 울려오는 물방울 소리보다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가 흘리는 눈물에 망연자실하던 왕비의 하늘색 눈이 떨리듯 고정되었다.

“아… 아흑… 아… 아아……!!”

아사벨을 바라보는 왕비의 눈이 더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올랐다.

어느새 자신의 뒤에서 우는 아사벨을 느낀 르베나가 옆으로 비껴서 왕비가 아사벨을 온전히 볼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아주 작은 여자아이는 큰 눈에서 연신 맑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온통 상처투성이인 가냘픈 몸과 거친 맨발은 그냥 보기만해도 가슴이 미어졌고 다 헤진 원피스는 거적때기만도 못 했다.

그럼에도 왕비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반 이상이 하얗게 바래버린 아이의 머리는 분명 그녀를 닮은 금발이었고, 이미 많이 옅어져 버린 아이의 눈에서는 아주 옅긴 했지만 분명 하늘색이 보였기 때문이다.

옅은 하늘색 눈동자.

그건 이 켄느에서 오직 왕비 가문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눈동자 색이었고 오직 모계를 통해서만 유전되는 특징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녀의 가문에 열 살 딸 아이를 가 있을 만한 사람은 오직 자신밖에 없었다.

작은 두 손을 꼬옥 잡으며 눈물짓는 아사벨을 본 왕비가 힘겹게 눈물을 멈추고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끝없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리란이 말해주었니? 너의 이름이 아사벨이라고……?”

왕비의 말에 아사벨이 울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아사벨이… 흡… 아니에요!”

그러자 왕비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이리란이 꿰매 준 거니, 그 옷은?”

그러자 아사벨이 제 넝마 같은 옷을 꽉 쥐며 더 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모, 몰라요… 그런 사람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아사벨에게 한 발자국 다가간 왕비가 물었다.

“이리란과 많이도 힘들었겠구나, 우리 아가…….”

그러자 아사벨이 겁에 질린 눈으로 소리쳤다.

“아, 아니에요! 저, 저는 아사벨이… 아사벨이 아니……!”

와락.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왕비가 작고 볼품없는 아이를 제 품에 꼬옥 안았다.

그러고는 더없이 다정한 손길로 아이의 거친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미는 자식을 절대 잊을 수 없단다, 아사벨. 어미는 자식을… 절대… 못 알아볼 수가 없단다. 늦어서 미안해… 몰라서 미안해… 엄마한테 화가 나서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화를 내고 떼를 쓰렴… 엄마가… 더 빨리 오지 못해… 더 빨리 알아보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흐윽…….”

좋은 향기가 난다.

이리란에게서 나는 포근한 향처럼 제 온몸을 감싸는 낯설고도 다정한 향이 아사벨의 작은 몸을 감싸 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언제나 추위가 오면 이리란과 나누었던 작은 온기처럼 따뜻한 무엇인가가 그녀의 눈물을 타고 작은 아사벨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곱고 예쁜 손이 저의 머리를 쓰다듬고, 고운 목소리로 아사벨을 아가라 부른다.

“아… 아… 흡……!!”

더 이상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 온기를, 이 따뜻함을 느껴버린 이상 열 살의 어린 아사벨은 더 이상 그녀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막을 수 없었다. 이제 나오는 말들이 그들에게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어떤 상처를 줄지 잘 알면서도 아사벨은 나오려는 말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막고 싶지 않았다.

“잘… 잘 지냈어요… 이리란이 잘 먹여 줬고… 흡… 사랑해 줬어요… 흐윽… 그러니까 제가 아사벨이라해도… 제발… 제발 슬퍼하지 말아요… 어… 머니…….”

겨우내 꺼낸 아사벨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왕비는 온 힘이 다 빠진 듯 울어 버렸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제 품을 떠난 어린아이가 10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찾아왔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왕비는 힘주어 아사벨을 세게 제 품에 안았다.

살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가늘고 약한 뼈마디가 그녀의 품에 남도록 안겨 왔다.

아사벨의 앙상한 몸을 느끼자 왕비는 더욱 서럽게 울어버렸다.

‘이리란… 이리란… 이렇게 너는 끝까지 나와 아이를 지켜주는 구나… 이리란…….’

두 모녀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 케투아 왕만이 다른 이들과 달리 낭패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아사벨 하나만 조종했으면 쉽게 풀렸을 모든 일들이 저 르베나라는 계집애 때문에 틀어지게 생겼어, 젠장!’

케투아 왕은 지금 이 시점에조차 누구를 버리고 누구를 취해야 자신에게 유리할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했다.

그래서 그는 알지 못했다.

언제나 유약한 모습이었던 호안 왕자가 오싹할 만큼 분노 어린 눈으로 그런 케투아 왕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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