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3)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아요… 그냥 일어나 보니 여러분이 계셨고… 그는 사라졌어요…….”
아사벨의 말이 끝나자 동굴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아마 어떤 방법을 통해 켄느의 비밀을 알게 된 ‘보토니에’는 아사벨 공주의 막대한 신력을 차지하러 왔을 것이다. 신력만 있을 뿐 스스로의 의지로 공격을 하지 못하는 공주는 남의 힘을 탐내는 그들에게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을 테니.
단지 이곳에 온 ‘보토니에’의 마법사의 실수는 그가 한 일이 아사벨 스스로 자신에게 걸린 금제 대부분을 풀어 버릴 정도로 절망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마 죽진 않았을 거다. ‘보토니에’의 일원이 죽으면 주변에 그의 기운들이 흩어져 있었을 텐데 기운이 옅은 걸로 봐서는 부상을 입고 도망친 정도인 거 같아.”
르베나의 말에 아사벨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유모 이리란을 죽인 그가 살아 있다는 게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누군가를 더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안도 되는 마음이 뒤섞였기 때문이다.
르베나가 아사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는 말했다.
“넌 이제 자유다, 아사벨. 더 이상 너를 이곳에 묶어둘 수 있는 금제는 없어. 조금 전 케투아 왕의 말에 반응했던 건 아직 잔재로 남아있던 흑마법의 영향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조차 내가 없앴다. 이제 너 스스로를 희생하며 사람들을 지킬 이유도 사라졌다는 말이야.”
마지막 말을 위해 르베나는 조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는… 자유다.”
르베나의 말을 들은 아사벨은 순간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없이 바라고 바라왔던 미래.
자유.
이곳을 나갈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주 조금은 더 남들만큼 살수만 있다면.
이리란과 매일같이 바라고 바라던 그것이 지금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사벨의 곁에는 이제 자기 일만큼 기뻐하고 함께 눈물지어 줄 그녀, 이리란이 없었다.
기쁨, 환희, 고통, 허무, 두려움 모든 감정이 뒤섞인 아사벨의 눈이 때늦게 절망으로 다시 한번 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때, 동굴 속에는 이 순간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유? 누구 맘대로 자유란 말이냐!!”
이제껏 기절해있던 케투아 왕이 깨어나 발작하듯 르베나에게 소리친 것이다.
아사벨은 그 소리에 놀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본능적으로 르베나의 뒤에 숨어 버렸다.
그런 아사벨을 보던 케투아 왕이 소리쳤다.
“이런 모자란 것! 그년의 뒤에 숨으면 어쩌자는 거야! 켄느 왕의 이름으로 명하니, 당장 그년을 죽여!!”
묶인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며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는 동굴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소리는 오직 침묵뿐이었다. 그가 소리쳤을 때 아사벨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하긴 했지만 아사벨조차 신기하게 그녀의 몸은 더 이상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상한 감각에 아사벨의 온몸 가득 알 수 없는 전율이 일었다.
그러자 케투아 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 그럴 리가 없어! 공주에게 걸린 마법은 풀릴 수가 없다고! 이제껏 단 한 번도 풀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어떻게……!!”
본인의 명을 따르지 않고 르베나의 뒤에 서 있는 아사벨을 보며 케투아 왕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자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럼 이번이 그 처음이 되겠군. 그리고 빌어먹을 켄느 실드도 마지막이 될 거고.”
르베나의 말에 케투아 왕의 눈이 경악으로 치켜 떠졌다.
마지막, 마지막이라니.
대대손손 켄느가 이렇게 풍요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왕국 전체를 감싸는 실드 덕분이었다. 실드가 없다면 풍요로운 켄느의 땅은 언제나 크고 작은 약탈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이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절대!! 난… 우린 절대 틀리지 않았어! 실드가 없다면 켄느 땅은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어야 했고 백성들은 피폐해지고 죽었을 것이다!”
악을 쓰는 케투아 왕에게서는 얼핏 광기가 뿜어지는 듯했다.
“우린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왕족이라면… 반드시 그래야 하니까! 그 역할을 단지 공주들이 해왔던 것뿐이라고! 근데 마지막이라고…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마지막이란 거야!!”
케투아 왕의 발악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를이 스릉 소리를 내며 롱소드를 빼 들었다.
“듣기 싫은데 죽일까?”
마치 날파리 하나 처리할까를 묻는듯 평온한 아를의 어조에 아한과 아사벨은 무척이나 놀랐지만 르베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글쎄… 고민이 되네.”
마치 저녁 식사 메뉴를 고민하는 듯한 르베나의 말에 이번엔 케투아 왕이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하하하. 네년이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일국의 왕을 함부로 죽일 순 없지. 하지만 난 내 나라의 법을 어긴 너희들을 처단할 권리가 있다!!”
켄느 왕의 눈에서는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져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안전해졌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빌어도 늦었어. 만약 내가 정해진 시간 내에 왕궁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궁에 있는 모든 기사들이 이곳 금지된 숲으로 오기로 했으니 흐흐흐. 내 딸의 희생?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하나뿐인 딸까지 희생했다는 걸 알면 오히려 다른 이들이 나를 우러러볼 일이지!”
덜덜덜.
케투아 왕의 잔인한 말에 르베나의 뒤에 서 있는 작은 아사벨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느낀 르베나가 싸늘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그냥 죽여 버릴까…….”
르베나의 검붉은 눈동자에 서서히 살기가 피어나고 동굴 안의 공기가 무거워진 그때,
“이, 이게 다… 무슨 말인가요……?”
여리고 가는 여성의 목소리가 난데없이 들려왔다.
이미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르베나와 아를, 룬은 태연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놀란 사람은 단연 케투아 왕이었다.
“왕, 왕비… 그대가 어째서……!”
케투아 왕의 목소리에 담긴 알 수 없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동굴 안 누구도 그의 심경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아사벨만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떨리는 눈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아름다운 금발에 옅은 하늘색 눈.
더없이 청초하고 화려하지만 어딘가 흐릿한 느낌의 미녀는 떨리는 몸을 겨우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지탱하며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을 지탱하는 아들, 호안 왕자마저 다스려지지 않는 분노로 인해 떨리는 제 몸을 쉬이 가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에요… 공주라니… 공주라니요! 우리 공주는, 우리 아사벨은 죽었는데… 태어나자마자… 분명 죽었는데… 어째서……? 어째서!!”
그녀가 떨리는 몸에 힘을 주고서는 손에 붙든 헝겊을 꼭 쥐었다. 그 헝겊 안에서 삐져나온 것은 옅은 하늘색 보석이 동그랗게 박혀있고 가는 금으로 정성스럽게 세공된 작은 목걸이었다.
“이리란, 공주의 눈을 꼭 닮은 아쿠아마린을 구해 목걸이를 제작하고 싶구나. 실력이 좋은 이에게 의뢰해 주겠니?”
그녀의 눈을 꼭 닮은 아사벨의 탄생을 보자마자 왕비는 기쁜 마음에 목걸이를 제작하라 말했다.
왕비는 눈동자 색의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하면 오래 산다는 켄느의 미신을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걸이가 완성되는 날,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아사벨은 그녀의 곁을 떠났다.
“알 수 없는 병에 의해 돌아가셔서… 전염병도 의심해야 합니다, 왕비님.”
궁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어린 딸의 시신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이리란 시녀께서 왕궁 기사와… 도망가셨대요, 왕비님.”
그리고 그날 왕비는 어릴 때부터 줄곧 그녀의 곁을 지키던 친구이자 시녀였던 이리란마저 잃었다.
그게 시작이었을까.
케투아 왕의 성정에도 언제나 꼿꼿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던 왕비는 점점 시들어 갔다.
작고 소중한 어린 딸의 온기가 없어지고 그 곁을 지켜줄 이리란마저 사라져 버린 왕비궁에는 우울한 그림지와 구슬픈 눈물만이 그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하지만 며칠 전, 왕비는 매일같이 향하던 산책로에서 더러운 헝겊을 발견했다.
왕비궁에 떨어질 만한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칠 만도 하건만 그녀의 손은 저절로 그 헝겊으로 향했다.
그리고 헝겊을 펼쳐 든 순간, 그녀의 옅은 하늘색 눈에 순식간에 물기가 어렸다.
이리란이 가지고 있을 목걸이.
아사벨에게 주려 했지만 아사벨이 죽어 버려 이리란에게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했던 그 목걸이.
그것이 낡고 헤진 헝겊에 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펼친 헝겊 안쪽에는 작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금지된 숲]
헝겊을 보는 왕비의 눈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절대 못 알아볼 수 없는 이리란의 필체였다.
이리란은 절대 그녀를 두고 도망갈 사람이 아니었다. 기사와 사랑에 빠졌다면 전폭적으로 응원해 줄 왕비라는 걸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이리란임을 알기에 왕비는 정신을 차리고 나서부터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이리란은 마치 증발이라도 된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눈앞에 이리란의 흔적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이리란과 자주 향하던 산책로에서.
두 사람이 은밀히 즐겨 찾던 이 산책로는 샛길을 통해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리란은 처녀 때 왕비가 즐겨 먹던 제과점의 과자를 이 샛길을 통해 자주 사 오곤 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냥 지나치기엔 모든 것이 왕비에게 새로운 사실을 말해 주는 듯했다.
“아사벨……!”
헝겊을 든 왕비의 손이 속절없이 떨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금지된 숲’으로 갈 기회만 엿보던 그녀는 케투아 왕이 오래 자리를 비운 오늘, 이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케투아 왕이 공주들의 희생으로 실드가 유지되었다 소리치던 그 순간, 그녀는 동굴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왕비의 눈이 밧줄에 묶여 있는 케투아 왕을 향했다. 언제나 힘없는 우울감에 휩싸여 있던 왕비의 눈이 더없는 분노로 번득이고 있었다.
옅은 하늘색의 눈에 비친 경멸과 분노는 쉬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케투아 왕에게 다가서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소리쳤다.
“말해! 당장 말하란 말야!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했어! 아사벨을 어떻게 한 거냐고! 그 가여운 아이를… 내 아기를 실드를 위해 어떻게 희생시켰는지 당장 말해!!”
온몸을 짓이기듯 소리치는 왕비의 절규가 동굴 안을 찢어놓을 듯 울리고 있었다.
동시에 왕비의 찢어지는 절규를 들은 아사벨의 작은 온몸이 더없이 생경한 감정으로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