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2)
“근데… 유모는 왜 죽은 거야……?”
조심스러운 아한의 물음에 아사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사벨이 문득 르베나 일행에 의해 고이 모셔진 유모의 시신을 바라보고는 옅게 바랜 눈 가득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예로부터 ‘금지된 숲’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요… 공주들의 비밀을… 들키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아주 간혹… 정말 간혹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죽었어요…….”
아사벨은 작은 몸을 힘껏 웅크리고 제 두 팔로 감싸안으며 말했다. 다들 그런 아사벨을 가여운 듯 바라보았지만 르베나는 평소와 같이 무심하다 싶을 정도의 어투로 물었다.
“그들은 죽인 건 너인가?”
르베나의 질문에 모두들 놀란 숨을 들이마셨지만 좀 전의 상황을 떠올린 일행의 얼굴은 곧 하얗게 질려 갔다. 그런 사람들의 낯빛을 보던 아사벨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켄느의 공주들은 결계를 지키는 힘을 발휘하는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켄느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게 돼요. 누군가 이곳에 나타나면… 다음엔 반드시… 아버… 지께서 나타나셨고 그 뒤에 정신을 차려보면 제가 항상… 제… 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아사벨을 보고 르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 동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 보면 그 역시도 흑마법의 일종이군. 켄느가 도대체 왜 이렇게 흑마법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르겠는데…….”
르베나의 중얼거림에 잠시 말을 멈추었던 아사벨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은 비가 내렸어요… 유모는 따뜻한 걸 주겠다고 밖에서 딴 말린 찻잎을 넣고 물을 끓이고 있었어요…….”
뚝 뚜둑.
동굴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소리와 함께 아사벨의 잔혹한 동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 * *
“차 내음이 좋아, 유모.”
말갛게 웃는 아사벨을 보는 유모, 이리란은 마음이 아팠다.
비린 맛만 가득한, 거짓으로도 차라 할 수 없는 것을 마시면서도 단 한 번 불평도 하지 않은 어린 공주님.
언제나 말간 웃음을 내어 보이면서도 왕궁에 대한 이야기만 해 드리면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이 제 가슴을 참 많이도 아프게 했다.
열 살.
한참 부모의 너른 품에 얼굴을 비비며 애정을 갈구할 어린 공주는 어느새 많이도 새어 버린 흰 머리와 엷은 눈으로 그녀 이리란을 바라본다.
얼마 남지 않았을 공주의 삶이 느껴질수록 이리란은 케투아 왕에 대한 분노와 화를 참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아사벨을 데리고 도망가다 케투아 왕에게 #붙잡혔고, 그때마다 고초를 겪어야 했던 건 본인이 아니라 어린 아사벨이었기에.
치미는 분노를 손안에 꾸욱 눌러 담은 이리란이 아사벨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비 오는 날에는 차 맛이 더욱 좋으니까요. 왕비님께서도 비 오는 날 마시는 차를 참 좋아하셨어요. 우리 공주님은 왕비 마마를 참 많이 닮으셨어요…….”
유모 이리란의 말에 얼굴을 붉히는 아사벨은 사랑스러웠다.
유약했기에 언제나 케투아 왕에게 자신의 의견 한번 제대로 피력하지 못했던 왕비였지만 그녀는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너무 사랑스럽지 않니, 이리란. 하지만… 우리 왕국에서 오래 살아남은 공주가 없다니…흑…….”
갓 태어난 아사벨을 안고 공주를 잃을까 고통스러워하던 왕비의 눈빛이 아직도 이리란의 머릿속에 생생했다.
아래 사람들에게 자애롭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왕비. 하지만 그녀는 보이는 것과는 달리 욕심 많은 케투아 왕의 성정과 여자를 자신의 아래로 보았던 그의 생각 때문에 조금씩 지쳐 갔고, 마음 만큼이나 몸도 약해져 갔다.
만약 이리 가까이에 그녀의 아기가 사랑스럽게 살아있다는 걸 아신다면 분명 그녀는 편안하고 화려한 왕궁 생활을 모두 버리고서라도 이곳에서 자신의 가여운 아이와 모든 걸 함께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리란은 그것을 알기에 더욱 왕비에게 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리도 고통스러운 공주님의 모습을 보는 건 나 하나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
이리란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리고 자신의 상전이었던 왕비 마마를 그리워하며 아사벨을 바라보았다.
매일같이 더 해 달라 요청하는 공주의 유일한 청은 어머니와 오라버니에 대한 이야기들.
처음에는 어린 아사벨에게 상처가 될까 이야기를 주저하던 유모는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아사벨을 위해 하나라도 더 많은 기억을 들춰 내어 들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저벅저벅 누군가가 동굴로 걸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아사벨과 이리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이곳을 찾은 소리 중에 반가운 소리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주 가끔 공주의 생사를 확인하러 오는 케투아 왕 또는 금지된 숲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들어왔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는 가엾은 백성들일 뿐이니.
#게다가 그 백성들의 존재를 불안해한 케투아 왕은 그들을 죽이는 걸로 모자라 그들의 마을을 전부 불태우기도 했다.
백성을 가엾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기던 왕비의 마음을 곁에서 본 이리란은 아사벨 공주에게 언제나 이에 대해 교육했고, 그 결과 아사벨은 이곳에 들어와 죽음을 맞는 백성들의 모습에 많이도 아파하고 힘들어했다.
게다가 기억은 없지만, 그 죽음을 선사한 것이 본인이라는 생각에 아사벨은 언제부터인가 심각한 악몽에 자주 시달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사벨의 고통에 반응하듯 켄느의 실드가 약해졌고, 왕국 안에 몬스터가 침입해 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매섭게 동굴로 들어와 울먹이는 아사벨을 혼내고 윽박지르는 케투아 왕의 방문이 이어졌다.
그러니 동굴에서 울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그녀 둘 모두에게 공포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발걸음 소리가 가깝게 다가올수록 이리란은 얼른 아사벨의 앞으로 가서 어린 공주를 제 뒤로 숨겼다.
공주라도 보지 않는다면, 그들이 공주의 비밀이라도 눈에 담지 않는다면.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이번에는 가엾은 생명을 구할지도 모르기에.
하지만 들어온 낯선 이의 모습은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젊은 외모에 까만 망토를 두르고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의 남자는 그들을 보고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듣기 매우 껄끄러운 목소리로 놀라운 말을 던질 뿐이었다.
“공주는 뒤에 숨은 건가?”
움찔.
귀에 거슬릴 만큼 거칠고 듣기 싫은 남자의 목소리에 아사벨의 작은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남자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사벨 공주, 거대한 신력으로 켄느를 보호하는 가엾은 인생. 나는 너의 그 가엾은 인생을 끝내주러 온 이다.”
난데없는 이의 등장과 함께 들려온 말에 놀란 이리란이 그에게 소리쳤다.
“헛소리 말고 당장 꺼지거라! 어찌 있지도 않은 이 나라의 공주님을 이곳에서 찾는단 말이냐! 곧 있으면 켄느의 군대가 너의 목을 치러 올 것이다! 그것이 두렵거든 당장 숲을 나가거라!!”
평소에 동굴로 들어왔던 사람들과는 다른 꺼림칙한 모습에 이리란은 사뭇 긴장했지만 애써 태연함을 가장해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이리란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아사벨을 향해 계속 말했다.
“원망하지 않느냐, 케투아 왕을? 자신의 어린 딸을 이런 동굴에 처박아 놓고 희희낙락 왕 놀이나 하는 어리석은 아비를!! 얼마나 복수하고 싶을까. 얼마나 무너뜨리고 싶을까. 너는 머리와 눈이 다 하얘지도록 목숨을 바쳐 모두를 구원하는데 너의 존재조차 아는 이가 없다니!”
마치 연극을 하듯 과장스럽게 떠드는 상대방의 말에 아사벨은 이를 악물었다.
왜 없을까.
원망하지 않은 적이, 모두가 밉다고 생각한 적이.
하지만 그건 모두 지나버린 일일 뿐이다.
분명 자신의 존재를 알면 사랑해 줄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살아있는 이 땅은,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삶을 이어나갈 이리란이 살 땅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아사벨에겐 지켜 마땅한 땅이었기에.
이리란의 뒤에 숨어 있던 아사벨이 모습을 드러내며 남자에게 소리쳤다.
“나의 신력은 오직 이 켄느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사특한 힘을 가진 너와 나눌 이야기는 없으니 얼른 가 버려라!!”
아사벨이 있는 힘껏 내지르는 소리에 남자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평생 실드만 치고 산다기에 모지리인 줄 알았더니 보는 눈이 있네? 그럼 좀 서둘러야겠다.”
서둘러 말을 마친 남자의 손에서 보기만 해도 불길한 검은 힘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발끝에서부터 미끌미끌 차가운 뱀이 기어오르는 것처럼 끔찍하고 불쾌한 감각이 아사벨의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손에서 뻗어 나온 그 힘이 아사벨을 향할수록 아사벨의 본능이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아사벨은 그보다 더 강압적인 힘에 의해 도망치지 못했다.
실드를 지키기로 한 그녀에게 주어진 제약.
그녀의 신력은 켄느의 실드를 위한 것 이외에 어떠한 것에도 쓰이지 못한다.
그녀의 신력은 자의로 공격 의사를 가질 수 없다. 오직 켄느의 왕에 의해서만 공격적으로 쓰일 수 있다.
그리고 아사벨은 그녀를 제약하는 그 마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서서히 다가오는 검은 힘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몸속에서 나가겠다 아우성치는 신력의 한 자락조차 어린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쓰여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검은 힘이 사악한 의도를 품고 아사벨의 심장께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콰악……!!
마치 독이 잔뜩 오른 독사처럼 빠르고 날카롭게 뻗어오는 무형의 힘에 아사벨은 큰 눈을 꼬옥 감았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검은 힘은 아사벨의 신력을 모두 빨아들이고 그녀의 숨을 거두리라.
모든 머리와 눈이 흰색으로 변해버린 아사벨의 시신을 들고 눈물 흘릴 유모 이리란의 모습만이 어린 머리 가득 걱정되었다.
“윽……!”
하지만 앞에서 들려오는 생각과는 다른 소리에 놀란 아사벨이 그만 두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툭. 투툭.
검붉은 피가 흥건히 바닥을 적시고 급속도로 미이라처럼 말라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그 순간조차 바짝 말라버린 손으로 작은 아사벨을 제 등 뒤로 감추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 모… 이… 이리란……!!”
억눌린 목소리로 겨우 뱉어낸 소리에 천천히 돌려진 유모의 얼굴은 순식간에 늙은 할머니처럼 변해버렸다.
그 모습에 두 눈을 잘게 떠는 아사벨을 보고 이리란의 뼈마디 앙상한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다가왔다.
“아사벨… 공주님… 사랑스러운… 사랑, 받아야… 마땅할… 나의… 우리… 의… 공, 주…….”
털썩.
아사벨의 창백하고 마른 볼에 겨우 닿은 유모의 손이 바짝 마른 몸과 함께 털썩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그 모습에 덜덜 떨리던 아사벨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샘솟기 시작했다.
“아, 재수 없게 신력도 별로 없는 게.”
그리고 들려온 남자의 소리에 아사벨의 눈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
나의 하늘, 나의 땅, 나의 이불, 나의 품, 나의 사랑.
아사벨에게 있어 그 시작과 끝은 오직 한 사람, 이리란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리란을 고통스럽게 죽인 남자가 감히 그녀를 모욕했다.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아사벨의 온몸 가득 요동쳤다.
그것들을 내뱉지 않고는 이대로 온몸이 활활 타버릴 것만 같은 뜨겁고 강렬한 감정이 아사벨의 전신을 옥죄어왔고 그 감정은 곧 아사벨을 억제하던 족쇄의 힘을 하나하나 끊어놓기 시작했다.
화아아아--- 동굴 안에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거친 맨발에 다 헤진 흰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하얗게 바랜 눈에서는 어느 때보다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내렸고 그녀의 색바랜 머리카락은 서럽게 우는 바람에 흩날려 나부꼈다.
“용서… 못 해…….”
억눌린 소리로 작게 읊조린 말과 함께 작은 소녀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