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39화 (139/276)

139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1)

“폐하……? 폐하라면 저놈이 네 아빠라는 거야?”

못마땅한 표정으로 묻는 아를의 말에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마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요. 저 같은게 어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소녀의 말에 아를이 고개를 끄덕하며 말했다.

“그러게. 저런 놈한테 너 같은 딸은 너무 아깝지.”

“네! 당연히 폐하께 저 같은 딸은 아깝… 네??”

생각 없이 아를의 말을 따라하던 소녀가 문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의 아를이 태연하게 말했다.

“나라도 저런 놈이 아비면 창피하겠다고.”

곧 아를의 말을 곱씹듯 생각하던 소녀가 옅은 금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요? 전 이렇게나 더, 더럽고… 못 배워먹었고… 쓸, 쓸모도 없는 아이인데…….”

표정 없는 아를마저 조금 놀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 작은 아이의 자존감이란 게 저 땅 밑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는 것에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를 그렇게까지 만든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조금은 짐작이 되기도 해 금방 씁쓸함이 밀려왔다.

조용히 아를과 소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르베나 역시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어느 추운 날 본궁에서 빵을 훔쳐 나오다 마주친 시녀, 사나에게 더러워서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때리지만 말라고 애원하던 어린 르베나가 생각난 이유에서였다.

소녀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찝찝함과 불쾌감의 기원은 아마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곧 르베나가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소녀는 제 앞에 얼굴을 드리운 채 질문을 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불타오르는 듯한 검붉은 눈동자는 황홀하리만치 매혹적이었고, 검고 윤기나는 머리칼은 감히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매끄러워 고급스러워 보였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붉은 입술. 소녀는 그녀를 보며 어떻게 저런 얼굴이 있을 수 있지, 하는 부러움을 넘어선 경외감을 느꼈다.

그런 분이 제게 이름을 물으니 소녀의 목소리는 절로 작아졌다.

“아사… 벨… 이라고 했어요.”

“…했어? 누가?”

르베나의 질문에 다시 아사벨이 머뭇거리다가는 말했다.

“유… 유모가요…….”

“유모?”

르베나의 질문에 다시 아사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아사벨의 대답에 르베나의 눈이 저 멀리 담요에 덮여 있는 한 여성의 시신으로 향했다.

“하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왠지 꽤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예감을 받으며 르베나는 아사벨의 앞에 자리를 잡고 말했다.

“아사벨, 네가 두려워 할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린 널 도울 거야. 만일 네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면 더더욱. 우린 널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야.”

무릎을 구부려 아사벨과 눈을 맞춘 르베나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게다가 ‘보토니에’와 관련되어 있다면 네 얘기가 꼭 필요해. 그러니까 두려워 말고, 힘들어하지 말고 네 얘기를… 들려주지 않을래?”

르베나의 목소리는 결코 부드럽지 않았지만 소녀조차 영문을 알 수 없는 믿음과 신뢰가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르베나의 말을 듣던 아사벨의 옅은 금안이 사정없이 떨리더니 이윽고 맑은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눈물로 #작은 얼굴을 적시던 아사벨이 꺼낸 이야기는 르베나의 상상보다 그리고 아를과 룬의 상상보다도 훨씬 더 잔혹하고 가혹한 이야기였다.

어린아이들의 잔혹동화.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을 그들은 찾아내지 못했다.

“…아시겠지만 옛날부터 켄느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존재했어요. 왕국 전체에 펼쳐진 실드 같은 거요. 그래서 언제나 풍족한 왕국이었음에도 켄느에는… 다른 왕국이나 몬스터의 침입이 쉽게 허용되지 않았어요.”

아사벨은 제 떨림을 필사적으로 견뎌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게다가 굉장히 폐쇄적인 왕국의 성격 때문에 타국과의 교류도 원만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왕국은 풍요로웠다고 해요. 자국민은 모두 왕국의 은혜 덕분에 존재하는 힘으로 보호받을 수 있음에 감사했고 왕실 역시 하늘이 보호해주는 힘에 감사하며 남의 것을 탐내거나 욕심부리지 않고 자국민의 보호만을 위해 살아… 왔대요.”

“케투아 왕을 보면 별로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사뭇 냉소적인 아를의 말에 아사벨이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가요…….”

아련해 보이는 아사벨을 본 아를은 제가 한 말이 괜히 미안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아사벨은 그런 아를의 배려가 고마워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니, 이어가려 했다.

“켄느 왕국에는 옛날부터 딸이 무척 귀했다고 해요. 그리고 어… 읍… 흑…….”

하지만 이후의 말은 아사벨의 눈물과 섞여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두는 아사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켄느의 왕가에 옛날부터 딸이 매우 귀했다는 것. 케투아 왕은 현왕으로써의 자질은 부족했으나 욕심이 적고 여성 편력도 없어 지금 존재하는 왕비만을 부인으로 두었다는 것. 그리고 그 왕비가 낳은 첫째가 호안 왕자. 둘째가 바로 아사벨이라는 것까지.

“아니 그럼. 첩, 아니 그러니까 후궁도 아니고 왕비님의 태생이라는 건가… 요?”

룬의 말에 아사벨이 눈물을 닦아 내며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유모는 분명 그리 말했어요. 딸을 낳으면 아사벨이라 이름 짓겠다던 왕비… 어머니께서 태어난 저를 보고 하염없이 우시며 아사벨아… 라고 하셨다고… 그리고 저기… 폐하께서도 제가 미천하지만 그분의 딸이라고… 하셨고요.”

단 한 번 겪어 보지 못했음에도 어린 소녀는 어머니가 그리운 듯 눈가를 붉게 물들였지만, 케투아 왕에 대해 말할 때에는 두려운 것인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낡은 소매로 슥 마저 눈가를 닦은 소녀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왕국에 저 같은 공주는 필요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공주는 왕국이 아니라… 이곳 ‘금지된 숲’에서 필요한 존재였으니까요.”

켄느 왕국을 보호하는 실드를 본 어느 마법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군가의 피와 살, 그리고 생명을 다 바치지 않는다면 절대 유지될 수 없는 종류의 마법이군…….”

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대대손손 켄느를 보호해 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왕실의 피를 짙게 물려받아 많은 양의 신력을 타고난 공주들의 희생이었고, 이 숲이 바로 그들의 조용한 무덤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왕자들은 대를 이어야 하니… 공주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공주의 희생만이 이 실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대대손손 그래왔다고… 유독 켄느 왕국에서 공주가 태어나면 어릴 때 죽었던 이유가 모두 이 실드 때문이었다고…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걸로… 모두에게 알려지고 유모와 이곳으로 보내졌어요… 아니, 그렇다고 해요…….”

아사벨의 말을 조용히 듣고있던 아한이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주며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도대체… 왜?”

그러자 아사벨이 아한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신력을 타고난 공주의 숙명… 때문이에요. 저는 죽은 자가 되어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컸고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이 실드를 유지했어요. 그냥 알 수 있었어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어느 날 동굴 안의 실드에 제 손을 대었을 때 모든 것이 느껴졌거든요.”

어린 공주의 눈은 누구도 볼 수 없는 크고 비밀스러운 것을 보고 있는 듯했다.

“숲속을 뛰노는 크고 작은 생명들, 군집을 이루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 그 모든 이들의 생명이 제 손안에… 있음을요.”

그것은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그때부터 아사벨의 일생은 정해졌다.

유모와 근근이 먹고 살 정도로만 삶을 유지하며 하루종일 모든 신력을 쏟아부어 켄느의 실드를 유지하는 것.

자신의 손 안에서 느껴지는 모든 이들이 안전하도록 모든 것을 쏟아부어 지켜내는 일.

그게 아사벨이 평생 이곳에서 해야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다 괜찮았어요… 나이가 들수록 저는 느낄 수 있는 게 많아졌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왕궁도 느낄 수 있었거든요… 거기서 움직이는 어떤 이가 어머니일 수 있다고… 또 어떤 이가 오라버니… 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제 신력이 쉴 새 없이 빠져나가는 것쯤은 무섭지 않았어요.”

아직 신력을 담기에는 어린 몸으로 왕국을 보호할 정도의 실드를 유지하는 아사벨에게 남은 것은 하나였을 것이다.

매일 무섭도록 줄어드는 생명력과 하얗게 새어 버린 머리와 눈.

그리고 아사벨은 이전의 수많은 공주들처럼 이곳에서 머지않아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네가 죽어버리면 실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사벨의 얘기에도 무감각하게 질문하는 아를이 정 없다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건 사실 모두가 궁금해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아사벨은 분명 아픈 이야기일 텐데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생을 다할 때 외우는 주문이 있어요. 그러면 저는 죽어서도 영혼을 거둘 수 없는 존재가 되지만, 제 힘은 그대로 남아 다음 공주가 올 때까지 버텨 준다고 해요…….”

“흑마법이군.”

짤막한 르베나의 말에 아사벨은 그게 무엇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금 그걸 설명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사벨의 이야기를 끝으로 르베나 일행은 저마다 조용히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켄느는 축복받은 땅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켄느의 신은 절대적이라고.

또 누군가는 말했다.

켄느의 왕실은 타고난 복이 넘치는 사람들이라고.

르베나는 문득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수없이 많았을 어린 공주들, 엄마의 품을 그리워하고 가족들이 보고픈 그 어린아이들의 희생 위에 지어진 이 왕국이 정말 그렇게 축복받은 나라냐고.

어른들의 강요와 폭력 속에서 저항 한 번 하지 못할 말갛게 웃는 이 어린아이에게 너희들이 희생을 강요할 자격이 있느냐고.

영혼조차 지키지 못하는 처절한 어린 삶을 유린할 권리가 도대체 누구한테서 나오는 것이냐고.

분노와 절망 그리고 슬픔이 회오리치는 동굴 안은 점점 지는 해로 인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르베나의 검붉은 눈은 더없는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켄느 왕국. 그 네 글자의 존재를 르베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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