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38화 (138/276)

138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0)

휘이잉-- 동글 안에서 불어오는 소리가 기분 나쁜 진동을 만들어내고 동굴 안에는 잠시간의 적막이 흘렀다.

켄느 왕의 등장에 잠시 긴장했던 르베나 일행은 다소 여유를 갖게 되었지만, 아한의 옆에 있는 소녀는 그의 등장과 동시에 사시나무 떨 듯했다.

작은 몸으로 오들오들 떠는 소녀의 모습이 안쓰러워 아한은 가만히 소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크지 않은 아한의 손에도 공간이 남아돌 정도로 볼품없이 작고 깡마른 소녀의 손에 아한의 눈시울이 자칫 붉어졌다.

아한은 마르고 작은 소녀만 보면 자신이 보지 못한 르베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더없이 마음이 쓰이고 아팠다. 언젠가 들었던 사나와 후벤의 이야기 속 어린 르베나는 꼭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온 온기에 소녀 역시 놀란 듯 아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조금은 붉어진 듯한 아한의 녹안이 정말로 순수해 보여서 아한을 한 번, 또 아한의 손에 잡힌 제 손을 한 번 바라본 소녀의 옅은 금안이 잘게 떨렸다.

그 잠깐의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르베나였다.

“우린 이 소녀를 데리고 나갈 예정입니다. 비켜 주시죠.”

자연스러움을 넘어 당당하기까지 한 르베나의 말에 케투아 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누구 맘대로 나간단 말이냐? 나는 분명 너희에게 내 허락이 없는 켄느의 어느 땅도 밟아선 안 된다고 명했다! 그러니 너희가 건방지게 ‘금지된 숲’에 들어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들 누가 나를 탓하겠느냐?”

그의 말에 소녀의 떨림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르베나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우리를 죽일… 능력은 있고?”

르베나의 말에 케투아 왕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분노로 새빨개진 얼굴로 르베나에게 소리쳤다.

“이, 이년이!! 감히 누구한테 반말을 하는 것이냐!!”

우렁차게 울리는 케투아 왕의 말에 이번에는 아를이 더없이 싸한 금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감히 누구한테 이따위 막말을 하는 거냐?”

“이… 이……!!”

아를의 말에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목덜미를 잡은 케투아 왕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자 룬이 조용히 한숨을 내어 쉬며 말했다.

“하아… 조용히 나가긴 글렀습니다.”

룬의 말이 동굴 안을 메아리 쳐 울리고 있었다.

동시에 르베나 일행을 보고 한참을 씩씩대던 케투아 왕이 자신의 뒤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모두 저 발칙한 디오니스 것들을 도륙해라! 자비를 베풀지 말고 무조건… 무조건 죽여라!!”

케투아 왕의 명에 그와 함께 따라온 다섯 명의 기사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도 아벨디온 기사단의 명성을 익히 들어 망설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감히 왕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곧 기사들이 다가오자 아를과 룬, 그리고 르베나는 긴장감도 없이 여유롭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타다닥!!

은빛 갑옷까지 갖추어 입은 다섯 명의 기사들이 르베나 일행을 향해 뛰어나간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모두 바닥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케투아 왕은 그저 눈만 끔뻑거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아를은 쓰러진 기사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얼굴로 케투아 왕을 보며 말했다.

“이거밖에 안 돼? 켄느가 약해빠진 거야, 저놈들이 우리를 너무 얕본 거야?”

아를의 말과 바닥에 누워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기사들을 번갈아 보던 케투아 왕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잡고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곧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런 케투아 왕이 이상해 보여 아를이 불쾌한 듯 한쪽 눈썹을 올린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콰과광……!

“아를!”

르베나의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린 것과 동시에 아를이 본능적으로 등을 돌려 자세를 바꿨다. 순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 공격으로 인해 그의 등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쇄도한 일격은 아주 매서웠다. 아를 정도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차가운 동굴 바닥에 붉은 피를 잔뜩 흘리는 누군가는 죽어 가고 있었을 정도로.

그리고 뒤를 돌아본 르베나 일행의 눈은 하염없는 충격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 * *

“아버님이 ‘금지된 숲’으로 가셨단 말이냐?”

짙은 벌꿀색의 금안을 놀란 듯 치켜뜬 호안 왕자의 말에 왕의 시종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왕궁의 기사 다섯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시종의 대답에 호안 왕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벨디온 기사단과 저녁 만찬을 하고 싶다 왕에게 청을 드리러 와서 이런 비보를 듣게 될 줄이야.

호안 왕자가 순간 할 말이 있다는 듯 시종을 보았다가는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리고는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시종에게 꽤 무게 있는 어조로 말했다.

“이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치 말라.”

휙 뒤로 돌아 걸음을 옮기는 호안 왕자에게 시종은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에게서 한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왕가의 위엄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어… 떻게?”

경악에 찬 아한의 음성이 동굴 안에 조용히 메아리쳤다.

아를과 룬 심지어 르베나마저 놀란 듯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서 있을 힘조차 없던 작은 소녀가 마치 이지를 잃은 사람처럼 똑바로 서 손 안 가득 공격마법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손에서는 아를의 뜨거운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상처는?”

소녀를 주시하며 물어온 르베나의 말에 아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문제없어. 스친 정도야. 그것보다 르베나…….”

아를의 부름에 르베나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작게 말했다.

“셋이다, 룬. 하나, 둘, 셋!!”

르베나의 말에는 어떠한 설명도 없었지만 세 사람은 오랫동안 합을 맞춘 사람들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셋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룬은 재빨리 뛰어올라 소녀의 옆에 있는 아한을 제 옆구리에 끼고는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이를 방해하려는 소녀를 르베나가 막고 아를은 눈 깜짝할 새 움직여 켄느 왕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헉… !”

생각보다도 훨씬 빠른 이들의 움직임에 켄느의 왕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소녀를 보았지만, 소녀의 두 손은 이미 르베나의 마력에 의해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소녀는 계속 저항하려고 했지만 이미 기력이 떨어진 소녀가 르베나의 마력에 대항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를 본 켄느 왕의 안색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동시에 제 마력으로 소녀를 붙든 르베나의 안색 또한 좋지 않았다.

몸은 계속 르베나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있지만, 소녀의 입은 애절함과 간절함을 가득 안은 채 다른 말을 내뱉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발… 제발…….”

르베나가 마력으로 붙들어놓은 소녀의 입에서 작은 말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칫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지만 평범한 사람이 아닌 르베나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죽이지 않게… 해 주… 싫어… 제발…….”

순간 소녀의 말을 알아들은 르베나의 붉은 눈동자에 뜨거운 분노가 깃들기 시작했다.

이에 르베나가 소녀의 손목을 붙잡은 채로 아를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를이 곧바로 검의 폼멜로 왕의 뒷목을 쳐 그를 기절시켰다.

풀썩.

그가 쓰러지자 동시에 르베나에게 붙잡혀 있던 소녀도 스르르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지를 잃은 것처럼 멍하던 눈에는 점점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고 망설임 없던 작은 몸에는 서서히 떨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없이 옅은 소녀의 금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제 손을 바라보던 소녀의 입에서는 곧 절망적인 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또… 제가 또 누군가를 다치게 했어요… 아니면 죽… 죽였어요… 제발… 제발… 이제 그만, 아버… 지… 흡…….”

흐느낌에 섞여 들려온 말에 르베나가 차가운 눈으로 제 앞에 힘없이 앉아 눈물을 흘리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버… 지?”

아를 역시 소녀의 말을 듣고 되물었지만, 소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 작게 중얼거리며 흐느낄 뿐이었다.

“아버… 지… 제발 그만… 죽이기… 싫어요… 싫어… 제발… 흑… 폐하… 아… 버지… 제발…….”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소녀의 말소리가 모두의 귀를 천둥처럼 세차게 두들겨왔다.

폐하.

가냘픈 소녀의 입에서 나온 무거운 단어가 동굴의 공기를 삽시간에 끌어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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