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9)
위이잉--- 검붉은 빛이 어두운 동굴 안을 비추며 주변을 밝혀왔다.
그 빛의 가운데 누워 있는 소녀의 안색은 창백함을 넘어 파리하기까지 했다.
한 손에 잡아도 남을 만큼 얇은 팔다리와 색이 다 빠져버린 푸석푸석한 금발.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인지 바짝 마르고 연약한 몸은 르베나의 마력을 빨아들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허겁지겁 검붉은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꼬옥 감은 소녀의 눈에서 연신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은 동굴 안 공기보다 무거웠다.
“도대체 누가…….”
소녀의 모습에 모두 말문을 잇지 못했지만 나이가 어린 아한은 더욱 참담한 소녀의 모습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열 살쯤 되었을까.
너무나 작고 어린 소녀는 아마 오랜 시간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듯했다.
너무도 마른 몸, 푸석한 머리, 여기저기 멍이 든 팔다리, 천이 맞나 싶을 정도로 헤진 옷.
왠지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르베나의 눈도 어둡게 침전되었다.
그렇게 르베나가 무거운 마음으로 계속 소녀에게 치유마법을 쓰고, 아한과 아를 또한 가라앉은 얼굴로 그들의 곁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동굴 안을 탐색하러 갔던 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단장님, 부단장님 좀…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언뜻 떨려오는 룬의 목소리에 르베나는 잠시 팅에게 소녀에 대한 마력 유지를 맡겨 놓고 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동굴 안으로 얼마간 들어가자 작은 횃불에 일렁이는 룬의 뒷모습이 보였다.
룬은 일행이 다가왔음에도 뒤로 돌지 않고 굳어진 듯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룬을 탓하지 못했다.
그 앞에 펼쳐진 광경에 네 사람 모두 말을 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 *
“뭐… 라고 하였느냐.”
약간 떨린다고 느껴질 만큼 차가운 분노로 휩싸인 케투아 왕의 말에 엉망이 된 모습의 켄느 기사가 고했다.
“그… 르베나 님과 아벨디온 기사단 일행 몇이 금지된 숲으로… 들어간 것… 크흡!!”
기사는 말하는 도중 케투아 왕이 던진 물건에 맞고 차마 말을 끝맺지도 못하였다.
조용히 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를 소매로 닦을 뿐.
쾅!!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케투아 왕의 분노가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금지된 숲.
켄느 왕국에서 대대로 모두의 출입을 금한 유일한 곳이 바로 ‘금지된 숲’이었다.
그곳에 들어간 모든 이는 살아서 나오지 못했고 그곳에 누군가가 들어가면 나라에는 항상 크고 작은 재앙이 닥쳤다.
특히 그곳에 들어간 사람의 마을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초토화되거나 나라에 몬스터가 쳐들어온다거나 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대의 켄느 왕들은 모두 ‘금지된 숲’으로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하였고 그것은 케투아 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타국의 기사들이 자국의 기사들을 무력으로 잡아 놓고 ‘금지된 숲’에 들어갔다니.
하물며 켄느 기사들이 아벨디온을 제압하고 온 것도 아니었다. 해가 졌으니 한 놈쯤은 보고하게 보내주자는 아벨디온 기사들의 배려 아닌 배려에 겨우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켄느 기사의 모습에 케투아 왕의 분노는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내가 가겠다.”
형형한 분노로 타오르는 눈을 한 채 케투아 왕이 지시하자 시종이 황망하게 몸을 숙이며 고했다.
“하오나 전하. 그 숲에 들어선 이는…….”
시종이 차마 왕에게 올려서는 안 될 뒷말을 잇지 못하자 케투아 왕이 비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왕은… 괜찮다. 그러니 정예 기사 다섯만 추려서 내게 붙여라. 바로 출발할 것이다!!”
자칫 엄하게 명을 내린 케투아 왕의 손이 알 수 없는 감정의 편린들로 자잘하게 떨리는 것을 그 방에 있는 누구도 보지 못하였다.
* * *
“이게… 뭐지?”
웬만한 일에는 감정의 동요조차 없는 아를마저 조금은 당황스럽다는 듯한 어조로 질문을 던져왔다. 하지만 그의 말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동굴 안, 어둡고 습한 그곳에는 사람이 꽤 오랫동안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느새 꺼져버린 작은 횃불에 불을 붙이자 광경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얼마 전까지도 쓴 듯한, 어지럽혀져 있는 담요 몇 개,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과일과 풀뿌리들, 그 가운데 놓여 있는 큰 냄비 하나.
그리고 닳고 닳아 이제는 형체조차 알아보지 못할 토끼 인형 하나.
인형은… 고이 누워 잠들어 있는 한 중년 여성의 품속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죽었습니다… 시일이 얼마 되지 않은 걸로 봐선 소녀의 상태와 관계있는 것 같습니다…….”
룬의 보고에 르베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또 알려주지 않아도 르베나의 머릿속에는 떠올리기 싫을 만큼 아픈 이들의 일상이 그려졌다.
누군가를 피해 온 작은 동굴 안에서 여성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소녀를 보살폈으리라.
언젠가는 고왔을 여성의 손은 험한 기사의 길을 걷는 르베나의 손보다 험했고 잔뜩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는 평탄하지 못하고 고됐을 그들의 삶을 연상케 하였다.
그럼에도 여성은 사랑과 정성으로 소녀를 보살피며 미소 지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따 온 과일과 풀뿌리로 연명하여 그토록 말랐어도 해진 토끼 인형을 쥐여 주며 사랑한다 속삭였으리라.
수십 번을 꿰매 놓은 작은 인형과 그보다 더한 바느질에 혹사당한 작은 담요들이 그녀의 사랑과 정성을 고스란히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녀를 두고 죽어야 했던 여성은 분명 죽는 순간까지도 끝내눈을 감지 못한 것이리라
저벅저벅.
곧 여성의 시신에게 다가간 르베나가 조심스럽게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여성의 눈가로 가져다대었다.
무엇이 그리 힘들고 아팠는지 죽는 순간 그녀의 표정에는 두려움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슬픔과 통탄스러움만이 고스란히 남은 그녀의 차디찬 얼굴에 르베나의 뜨거운 손이 닿았다.
스르륵- 르베나가 그녀의 눈을 조심스레 쓸자 비로소 여성의 눈이 조용히 감기었다.
뚝. 뚝.
조금씩 떨어지는 동굴 안 물방울 소리가 더없이 크게 들려오는 순간이었다.
* * *
“으음… 음…….”
작게 뒤척이는 신음 소리에 일행은 너 나 할 것 없이 벌떡 일어나 그들의 중간에 누워있는 소녀를 향했다.
중년 여성의 시신을 담요로 덮어 구석에 고이 모셔 놓고 일행은 불을 땔 수 있는 곳으로 소녀를 옮겼다.
어느새 냄비를 치우고 불을 붙인 채 잠시 고단한 몸을 뉘인 순간, 소녀의 기척이 들려온 것이다.
소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항상 사람들에게 까탈스럽게 굴던 팅도 제 부드러운 털을 비벼 대며 소녀의 기척에 반응했다.
그러기를 얼마쯤. 하얗게 바래졌다고 생각될 만큼 옅은 금안이 힘겹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점점 그 눈에 초점이 잡히고 소녀를 바라보는 르베나 일행에게 아이의 멀건 눈이 향했다.
벌떡.
여리고 마른 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일어선 소녀가 경계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는 황급히 몸 안의 힘을 쏟아낸 것은 순식간이었다.
소녀가 너무도 빨리 구현해내는 마법에 르베나와 아한 모두 놀란 얼굴로 소녀를 보았지만, 소녀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재빨리 방어막을 제 몸에 두르며 소리쳤다.
“절대로 너희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이곳은 내가 지킬 것이다!! 만약 나의 몸을 얻으려면 너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신력이 빠져나간 내 시체뿐일 것이다!!”
작고 여린 소녀의 입에서 나오리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당돌하고 날카로운 외침에 일행은 잠시 침묵하였다.
그리고 그런 소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르베나가 소녀에게 말했다.
“‘보토니에’가 너의 신력을 노린 것인가?”
르베나의 목소리를 들은 소녀가 흠칫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하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악한 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보토니에’를… 아십니까?”
소녀의 말에 아한이 얼른 대답했다.
“응! 우리는 일단 아벨디온 기사단이라는 디오니스의 사람들이야. 우리는 계속 ‘보토니에’라는 단체를 추적 중이었고, 그러다 우연히 이곳에서 그들의 힘을 느껴 들어오게 된 거야. 그러다… 너를 발견했고.”
아한의 맑은 녹안을 한 번 보고 흔들리는 제 시선을 소녀가 르베나에게로 돌렸다.
확인을 바라면서도 절대 믿을 수 없다는 혼란이 소녀의 눈 가득 차올랐다.
“아한의 말이 맞다. 나는 아벨디온의 기사단장 르베나, 그리고 이쪽은 부단장 아를, 너의 왼쪽에 있는 자가 기사 룬. 우리는 ‘보토니에’의 악행을 막기 위해 그들을 찾고 있었고 그러다 여기에 다다랐다.”
르베나의 말에 조금씩 떨려오는 몸을 굳게 다잡은 소녀가 말했다.
“이곳은… 이곳은 ‘금지된 숲’이에요. 이곳은 그 누구도…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다고요.”
금지된 숲을 말하며 알 수 없는 감정에 떨려오는 소녀의 목소리에 르베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여기에서 발견된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그리고 뭐 몰래 들어온 거니 상관도 없는 것 같고.”
무심한 르베나의 말에 옆에 있던 룬이 덧붙였다.
“솔직히 지금쯤이면 케투아 왕도 알았을 테니 몰래는 아니죠.”
룬의 말에 르베나가 흥미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자 이번에는 아를이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알면 어때. 금지된 숲이니 지들도 막 들어오진 못하겠지.”
“음. 맞는 생각이다, 아를.”
태연하게 금지된 숲에 대해 대화를 하는 일행을 보며 소녀가 당황한 듯 물었다.
“정말… 켄느의 왕 몰래 들어온 거예요? 맙소사……!!”
소녀가 갑자기 풀썩 주저앉은 것과 동시에 소녀를 둘러싼 방어 마법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소녀가 그들을 보며 급하게 소리쳤다.
“아,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도망가요! 어서요! 그가 알면… 그분이 아시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서… 빨리 도망가요 제발!!”
안심하듯 표정이 풀어지기 무섭게 애원하며 소리치는 소녀의 모습에 일행 모두 영문을 몰라 서로를 바라볼 때였다.
갑자기 아를과 르베나 그리고 룬이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나 아한과 소녀를 그들의 뒤에 두고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의 검에서는 어느새 제각기 색으로 물든 검기가 흘러 동굴을 좀 더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소녀와 아한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렸지만 르베나와 일행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동굴을 가득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도망가기엔 이미 늦은 것 같구나, 르베나 공주.”
다섯 명의 기사들을 거느리고 느긋하게 들어선 자의 모습이 르베나의 신경을 자극적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케투아 왕.
그가 이제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비열하고도 초조한 미소를 띠며 그들의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