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36화 (136/276)

136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8)

룬이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르베나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켄느의 왕이 다른 곳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 엄명을 내렸는데… 괜찮을까요?”

울창하게 우거진 숲을 한참 바라보던 르베나는 룬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아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한이 룬의 눈치를 보며 급하게 말했다.

“미, 믿지 않아도 돼, 누나. 내가 말한게 무조건 맞다는 보장도 없고 괜히 내 말만 믿고 들어갔다가 문제가 생기면 누나가 곤란해지니까… 그건… 싫어.”

“아를, 잠깐만.”

작은 녹안에 깃든 망설임을 보던 르베나가 곧 아를을 불렀다. 그러자 시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다른 기사들과 말을 나누던 아를이 지체없이 르베나에게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아한이 말하기로는 ‘보토니에’의 힘이 저 숲속에서 느껴진다는데…….”

르베나의 말에 이번엔 아를의 금안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채 뻐끔거리는 아한에게로 향했다.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아벨디온 기사단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 아니야?’

순간 드는 생각에 아한은 조금 전까지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내던 제 모습이 민망하기도 하고 창피해지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아를이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아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르베나에게 물었다.

“저놈들한테 켄느의 기사들을 좀 붙잡아 두라고 할게. 숲으로 향하는 건 너와 나, 그리고 룬과 아한 정도면 될까?”

거침없는 아를의 말에 정처 없이 떠돌던 아한의 녹안이 크게 떠졌다. 자신의 한 마디만 믿고 켄느 왕의 명을 어기는 일을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말하는 아를의 모습에 심히 당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베나는 한술 더 떴다.

“응. 기절시켜도 상관없어.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니까. 우리가 숲에 들어간 것만 모르게 해.”

르베나와 아를이 아무렇지 않게 숲에 들어갈 계획을 짜는 소리를 듣고 아한이 조금은 망설이는 태도로 말을 덧붙였다.

“그,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누나가 곤란해지잖아… 내 말이 틀릴 수도 있고…….”

하지만 어렵게 꺼낸 아한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를과 르베나는 동시에 아주 간단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동시에 나온 같은 답변을 들으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사람은 오직 룬뿐이었다.

* * *

저벅저벅.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숲은 정말 누구의 기척도 닿아 있지 않는 곳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무성한 나뭇가지와 거칠고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이루어 내는 조용한 그림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갖가지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그들이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식물들. 이곳은 오직 그들만의 세계 같았다.

하지만 숲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자칫 무서울 만도 하건만 네 사람은 모두 태연하게 길을 헤쳐나갔다.

룬이 맨 앞에서 나뭇가지들을 쳐내며 길을 만들면 그 뒤를 르베나와 아한이 따르고 마지막엔 아를이 뒤를 지키며 걸어가는 모양새였다.

세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아한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직진했다.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곳이라 숲속은 유독 어두웠기 때문에 어느새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깊은 밤이 되고서야 일행은 겨우 걸음을 멈추고 야행을 결정할 수 있었다.

“먹을 것을 좀 구해 오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룬은 금세 사라졌다. 하루 종일 계획 없이 들어와 아무 말도 안 하고 걷기만 했으니 네 사람 모두 지칠 만하건만 누구 하나 힘들다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길을 안내하는 아한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저리도 무뚝뚝한 르베나와 아를이 아한을 배려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간지러우면서도 웃음이 나서 룬은 얼른 자청해 음식을 구하러 갔다.

그사이 르베나와 아를은 주변에 널려있는 사람 머리 크기의 부드러운 나뭇잎을 부지런히 모으기 시작했다. 야행에 익숙한 르베나와 아를이 주변의 것들을 이용해 잠자리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얼추 네 사람이 좁게 누워도 될 만큼의 나뭇잎이 쌓일 때쯤, 룬이 죽은 멧돼지 한 마리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멧돼지의 목에는 작은 단검 하나만 박혀 있어 룬이 얼마나 노련한 솜씨로 사냥을 했는지 엿볼 수 있었다.

네 사람은 서둘러 불을 지피고 멧돼지를 먹음직스럽게 구워 저녁을 해결했다.

타닥, 타닥 불티가 피어오르는 소리 사이로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얼추 배를 채운 아한이 세 사람에게 강한 확신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믿어 줘서 고마워요, 모두. 아무래도 여기에 그들이 있는게 확실한 것 같아요!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힘이 느껴져요.”

확신에 가득 찬 아한의 소리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이곳으로 다가올수록 알 수 없는 기이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

기이하지만 결코 불길하지는 않는 미지의 힘.

‘보토니에’라면 분명 기분 나쁜 힘이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 르베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그녀는 아한을 믿었다.

설령 아한이 안내하는 길 끝에 아무것이 없다 할지라도 르베나는 아한에 대한 믿음이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각자 알 수 없는 힘에 대해 막연히 생각하며 눈앞의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살며시 불어오는 숲속의 바람은 자칫 시원하기도 조금 쌀쌀맞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네 사람 모두 자기만의 생각에 빠진 듯 누구 하나 잡담을 늘어놓거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아를이 아한과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해. 나랑 룬이 보초를 설 테니까 둘은 좀 자두도록 해.”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를의 말이 더 빨랐다.

“내일 ‘보토니에’를 맞닥트리면 르베나 너와 아한의 힘이 우리보다 더 필요해. 그러니까 이건 내일을 위한 전략이야. 군말 없이 자.”

무뚝뚝하게 명령하듯 말했지만 누구나 아를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분명 르베나를 위해서라고 하면 고집을 부릴 그녀를 위해 제법 이치에 맞는 말을 생각해 꺼낸 그의 마음을.

르베나 역시 그런 아를의 마음을 알기에 이번 만은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한과 자리에 누웠다.

새벽이슬이 올라오는지 어느새 촉촉해져 싸한 한기를 불러오는 나뭇잎 위에 누우니 잠시 잠이 달아날 것 같았지만, 옆에서 타오르는 모닥불 덕분에 르베나와 아한은 금방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타닥. 타닥.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점점 멀게 들려왔다.

* * *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도와… 주세요…….’

가녀린 목소리는 간절함을 타고 전해졌다.

그 절실함에 목이 꽉 메이고 가슴이 사정없이 조여와 숨을 쉬기 힘들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끊임없이 애절하게 애원하고 매달렸다.

‘제발… 도와… 주세요… 제발… 제… 발…….’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게.

목소리는 이 세상의 애원을 모두 그러모은 것처럼 처절하리만치 외쳤다.

‘제발 도와주세요…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제발… 당신만이 도와줄 수 있어요… 제발… 제발…….’

“……!!”

벌떡 일어난 르베나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잠에서 깬 그녀는 답답한 듯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붉은 눈동자가 담긴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런 르베나를 본 아를이 재빨리 다가와 르베나의 어깨를 한팔로 안아 제게 기대게 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금안 가득 일렁이는 염려와 걱정이 보였지만 르베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꿈속의 여파 때문인지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 왔기 때문이다.

아를은 그런 르베나를 보며 수려한 얼굴을 잠시 찌푸리고는 말없이 르베나의 등을 살며시 쓸어주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르베나의 호흡이 안정되었을 때쯤, 르베나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이어지는 르베나의 돌발행동에 아를이 긴장감으로 몸을 굳히며 르베나를 따라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르베나를 바라보는 아를의 금안이 긴장으로 설핏 굳어 보였다.

그리고 보초를 서던 룬과 르베나 때문에 일어난 아한 역시 긴장한 눈으로 르베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순간 르베나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분명 붉은 눈은 언제나처럼 맑고 깨끗했음에도 르베나는 평소답지 않게 맹목적인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이 모습에 아를이 룬을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룬이 아한의 곁에 서서 검을 꺼내 들고 르베나의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가는지도, 무엇을 향하는지도 모른 채.

르베나는 저를 따라오는 세 사람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동물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와도, 사나운 나뭇가지가 르베나의 얼굴을 할퀴어도 르베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고 아주 멀리서 서서히 동이 틀 때쯤, 겨우내 르베나의 걸음이 멈추었다.

앞에서 멈춘 르베나를 보고는 아를이 룬과 아한에게 손짓으로 기다리라고 한 뒤 르베나에게 다가갔다.

“르베나… 도대체 무슨 일이야? 걱정 그만 시키고 말 좀……!!!”

르베나는 절대로 이유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강한 믿음이 있기에 아를은 군말 없이 르베나를 호위하며 같이 걸어 왔다. 하지만 평상시와 다른 르베나의 행동에 많이 당황스럽고 걱정스러운 마음 역시 걷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로소 걸음을 멈춘 르베나에게 아를은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차마 끝맺지 못했다.

르베나의 앞, 한 후미진 동굴 앞에 하얗고 가느다란 무엇인가가 그의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르베나……!”

아를이 놀란 것처럼 나직하게 르베나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갓 열 살이나 되었을까.

아주 어리고 어린 소녀 한 명이 잔뜩 헝클어진 모습으로 그곳에 누워 있었다.

감은 눈에서 끊임없는 눈물을 쏟아내며, 꼬옥 쥔 두 손을 하염없이 부르르 떨며, 아이는 마치 누군가를 부르듯, 애원하듯 그들의 앞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부름에 르베나가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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