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7)
접견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에 가장 곤란한 것은 바로 켄느의 기사들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몬스터의 공격에 켄느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예로부터 기이한 힘으로 켄느를 수호하는 방어막을 믿으며 긴 세월을 살아 왔던 그들이었기에 실전 상황에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최근까지 있었던 신마전쟁에서마저 중립을 선언한 그들이었기에 켄느인에게 있어 몬스터란 소문으로나 전해지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접견실로 안내받아 켄느의 왕과 마주 앉은 아벨디온은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오늘 그들이 없었다면 기사들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은 모두 처참한 몬스터 밥이 되었음 것임을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사들의 선망 어린 눈에도 불구하고 켄느의 왕, 케투아는 눈앞의 사람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르베나 공주, 아니 경. 나는 그대들의 입국을 허락한 적이 없네. 한데 어찌 나의 왕국에 그대들이 들어와 있는 것인가?”
케투아의 말에 기사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우연히 나타났다고는 해도 켄느 백성들의 목숨을 구한 이들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지는 못할망정 입국허가부터 따지는 그들의 왕이 매우 무례하다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사들의 생각은 모르는 듯 케투아는 다시금 르베나를 재촉했다.
“대답을 해 보시오, 르베나 경!”
르베나는 차갑게 식어 버린 찻물을 한 모금 여유롭게 마시고는 달칵,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붉은 눈을 들어 케투아를 직시했다.
“입국허가를 받으려고 검문소에 들렀다가 뜻밖의 일에 먼저 켄느 백성들의 목숨부터 구하고자 했습니다. 한데 켄느의 왕께서는 저희가 몬스터에게 살해당하는 백성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지키던 기사들을 불러 입국절차를 지켰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듯하군요.”
피식.
르베나의 말에 옆에 앉아있던 아를이 차가운 비소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켄느 기사들의 얼굴도 새빨개졌다. 그들은 분명 자국의 왕이 부끄러운 것이었다. 케투아 역시 아주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닌지 조금 민망해하며 말했다.
“물, 물론 그대들의 노고에는 감사를 표하는 바요. 나는 그저 당황스러운 그대들의 출현에 배경을 알고 싶었던 것뿐이요.”
케투아의 말에 르베나가 대답했다.
“저희는 최근 켄느 왕국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살인, 납치 등의 사건들이 저희가 쫓는 조직, ‘보토니에’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허락해 주신다면 그들의 행적을 간단히 확인하고 조용히 돌아가고 싶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케투아가 깊은 심음을 흘렸다.
르베나의 말대로 최근 켄느에서는 이유 모를 살인과 납치가 빈번했다. 그러나 켄느 관리 중 어느 누구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아벨디온의 등장은 심히 반가운 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었던 케투아가 르베나를 보며 작게 말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반드시 우리 켄느의 기사와 동행하여야 하며, 다른 장소의 방문은 허락지 않겠소. 일주일. 딱 그 시간만큼만 켄느에 머무를 것을 허락하오. 그래도 좋다면 머물고 싫다면 바로 돌아가시오.”
생각보다 강경한 켄느 왕의 말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르베나가 말했다.
“좋습니다. 전하의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일주일.
그렇게 아벨디온은 켄느의 입국허가를 한정적으로나마 받게 되었다.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안내받은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르베나가 짧게 대답했다.
“들어와라.”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는 맑은 금안이 비쳤다. 동시에 함께 드러나는 밝은 금발.
“호안… 왕자님?”
르베나의 부름에 방에 들어서던 호안 왕자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쉬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기사들에게 아까의 일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감히 저희 아버님의 무례를 제가 대신 사죄드리고 백성들을 대신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치에 맞는 인사를 하면서도 르베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붉게 물들인 그의 뺨이 호안왕자가 얼마나 수줍음이 많고 순진한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듯했다.
아한과 비슷한 또래의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은 르베나가 호안 왕자에게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기사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감사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경계는 일국의 왕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르베나의 배려 섞인 말에 말갛게 웃은 호안 왕자가 말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이곳에 머무시는 일주일 동안 편안하시길.”
호안 왕자는 예의 바른 모습으로 인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르베나의 방을 나섰다.
그의 태도에서 혹여라도 르베나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모습이 그대로 엿보였다.
달칵.
문이 닫히고 나자 르베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비를 안 닮아 다행이군…….”
* * *
“으… 말도 안 돼……!”
“너무… 끔찍한데?”
“웁……!!”
저마다 눈앞의 시신들을 보면서 한마디씩을 보태었다.
아벨디온은 켄느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얼마 전 발견되었다는 시신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저마다 몸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간 듯한 해괴한 모습.
하지만 그럼에도 고통스럽고 두려운 표정만은 시신의 얼굴에 생생하게 남아 보는 사람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르베나 역시 그들을 보고는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그때 아를이 르베나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가까이 가서 살피는 건 내가 할 테니 넌 아한과 주변의 마력이나 신력을 감지해.”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분명 르베나에게 험한 장면을 더는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그만의 배려라는 것을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르베나 역시 그런 아를의 말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한과 룬을 데리고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르베나와 아한은 각자 눈을 감고 최대한 마법의 흔적을 읽으려 했고 룬은 혹시 모를 공격에 아한을 보호하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르베나가 눈을 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마력이나 신력은… 하지만……!’
순간 르베나의 붉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분명히 기분 좋지 않은 껄끄러운 기운이 어딘가에 희미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단지 르베나는 이것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갔는지까지 예민하게 추적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전문은 공격과 보호였지 추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추적도 웬만한 마법사보다는 뛰어났지만, 바로 옆에서 눈을 감으며 집중하는 아한보다는 못했다.
단순히 생각 했을 때, 유파시드도 마력 추적에 한해서는 아한에게 밀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아한이 번쩍 눈을 뜨면서 르베나에게 말했다.
“누나, 이 기운은 ‘보토니에’의 기운이 맞아요.”
아한이 말을 하며 슬며시 제 몸을 떨었다.
‘보토니에’의 기운… 아한은 결코 이 기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아한이 한 번 추적했던 그들의 기운. 그 기운을 쫓다가 납치당했고, 그곳에서 아한은 괴한과 맞서 싸웠다.
작은 몸으로 성인 베이라를 상대하며 수없는 상처를 새겼지만 아한은 포기하지 않았다.
르베나가 구하러 올 것을 믿었고, 그랬기에 아한은 가능한 최대한의 저항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아한은 정신을 잃을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르베나가 그를 구하러 와서 큰 싸움이 벌어질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을 정도로.
분명 아한은 용기를 냈고 그 덕에 모두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용기를 내었고 결과가 좋았음에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한은 오한이 저려 왔다.
무섭고, 두렵고, 수치스러웠다.
일방적으로 당하던 그때의 기억이, 누군가를 보호해야만 했던 큰 책임감이, 이대로 모든 게 끝날 것만 같던 그 순간의 절망이 이따금 아한에게 다가와 그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특히, 그들의 기운이 지척에 있는 이런 순간에.
아한은 순간 그때의 감정들에 영혼을 사로잡혀 두려움이란 이름에 자신의 마음을 모두 내어줘 버리고 말았다.
스륵.
그때. 혼자 몸을 부르르 떠는 아한의 손에 온기가 다가왔다.
고개를 든 아한의 녹안 가득 따뜻한 붉은 색이 차올랐다.
“누, 누나… 난… 나는…….”
아한은 떨리는 목소리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리고 르베나는 그런 아한을 마주 보며 조금 무릎을 굽혔다.
아한의 눈을 바라본 르베나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한의 눈에 비치는 두려움, 고통, 수치. 그 모든 것이 뒤엉켜 지금 아한의 녹안에 휘몰아치고 있다는 사실을.
“무서운 건 당연한 거야. 두려운 것도 당연해. 누구라도 그런 경험을 했으면 무섭고 두려울 거야. 아한, 그래서 네가 더 대단한 거야.”
르베나의 말에 아한의 물기 어린 녹안이 그녀를 향했다.
르베나가 그런 그에게 다정하게 웃어 주며 말했다.
“힘들 것을 알면서도 넌 그에게 대항했고 그 상황에서조차 너보다 약자인 스릴을 보호했어. 그리고 이겨 내기 힘든 상황을 겪었음에도 넌 쓰러지지 않고 ‘보토니에’를 추적하기 위해 나를 따라다녔지.”
르베나의 다정한 말이 아한의 전신을 천천히 감싸안았다.
“아한, 고통은 누구에게도 주어져. 하지만 그 고통을 넘어서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은 오로지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야.”
르베나를 바라보는 아한의 눈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난 아직도 이렇게 두려운걸… 더 멋지게… 더 용감하게 잘하고 싶은데… 무서워… 두려워… 이런 내가… 싫어…….”
다시 푹 고개를 숙이는 아한을 보며 르베나가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슬며시 잡은 손을 통해 르베나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따뜻하고 강인한 느낌. 어떠한 위험에도 절대로 굽히지 않은 힘이 아한의 손끝에서 느껴졌다.
“아한, 잊지 마. 얼마든지 두려워하고 무서워해도 돼. 고통을 넘어서고 나아가는 사람은 그럴 자격이 충분해.”
르베나의 말에 아한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맑고 순수한 녹안이 준수한 소년의 얼굴에 꼭 들어맞아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르베나와 눈을 맞추던 아한이 곧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아한의 몸 곳곳을 돌아다니는 르베나의 마력이 그를 서서히 깨웠기 때문이다.
그 강인하고 따뜻한 기운은 아한의 몸에 도사리는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물리쳐냈다.
그리고 한없이 편안한 기분만을 선사해 주었다.
벌써 몇 개월.
아한이 ‘보토니에’에 대한 기억으로 흔들릴 때마다 르베나는 단 한 번도 귀찮다는 내색 없이 이렇게 그를 바로 세워 주었다.
양쪽 눈 끝에 눈물이 맺힌 채로 웃는 아한의 얼굴이 마치 천사와 같이 아름답고 맑았다.
“응. 나는 그럴 자격이 있지. 나아갈 거니까. 넘어설 거니까. 그렇게 누나의 옆을 지킬 거니까……!”
다시 맑게 빛나는 아한의 눈을 보며 르베나가 아한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런 르베나의 손길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아쉽게 바라보던 아한이 곧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기운은 저 숲 너머에서 와서 저곳으로 다시 사라졌어. 이 기운을 추적하려면 저 숲속으로 들어가야 해.”
아한의 말에 르베나와 룬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울창한 숲을 향했다.
누가 보기에도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들어서 보지 않았을 것 같은 깊은 숲.
푸드득푸드득 새가 날아올라도, 검고 우거진 나무들만이 가득한 숲은 그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보였다.
그리고 아한의 손가락은 정확히 그곳을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