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6)
“모, 몬스터라니?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쾅.
성난 이가 집어던진 값비싼 재떨이가 보고를 올리던 기사의 이마에 맞았다.
하지만 기사는 익숙한 일인 듯 흘러내리는 피도 닦아 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지금 서쪽 검문소에 몬스터가 들이닥쳐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왕궁의 기사들을 파견해 주시기를 간청드린다는 급보입니다.”
기사의 긴박한 보고에도 그, 케투아 왕은 성난 얼굴을 일그러트릴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 분명 내부의 소행이야… 반란이라고… 절대로 밖에서 몬스터가 침입했을 리 없어… 절대…….”
혼자서 계속 중얼대는 케투아 왕을 바라보는 기사는 그의 모습이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그도 모르게 왕을 원망하듯 바라보는 기사의 눈은 곧 분노로 젖어 들었고 두 손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떨려 왔다.
지금 공격을 받고 있는 서문 검문소 안쪽에는 제법 큰 마을이 있다. 몬스터가 침공했다면 그 마을은 지금쯤 쑥대밭이 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왕이란 작자는 빠른 결단보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의미 모를 말을 주억거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마을은 지금 보고를 올리는 기사의 사랑하는 부인과 이제 갓 걷기 시작한 딸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눈앞에 있는 왕의 명령만이 그의 가족을 구할 수 있는데 그는 이 시간에도 죽어 가는 백성들은 보살피지도 않은 채 망령든 사람처럼 의미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고 있으니 기사의 남모를 분노와 초조한 마음은 점점 쌓여만 갔다.
“전하 제발…….”
기사가 다시 한번 켄느의 왕 케투아에게 간청했다.
그러자 무언가 석연찮은 눈빛의 그가 곧 중얼거림을 멈추더니 그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으니 일단 왕궁 제1, 2기사단의 차출을 허락한다. 하지만 반드시 이 일의 배후를 잡아 와야 한다!! 알겠느냐?”
켄느 왕의 명에 기사는 비로소 온몸의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그러고는 그를 향한 경멸의 빛을 감추고 재빨리 대답했다.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 * *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던 르베나 일행의 코에 비릿한 피 냄새가 자욱했다.
또한 그들의 귀에는 몬스터의 괴기한 울음소리와 그에 쫓겨 다니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아수라장이 된 검문소를 보고 잠시간 멍하니 있던 일행은 르베나의 벼락같은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모두 정신 차려라! 룬, 너는 아한을 보호하며 뒤로 빠져라. 그리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 사람들을 보호하고 몬스터를 처치한다. 지체하지 마라!!”
르베나가 뱉은 단 한 번의 일갈에 아벨디온 기사단은 모두 칼같이 움직였다.
방금까지 혼란스러워하던 기색은 깨끗이 지워 버리고 모두가 각자의 눈에 날카로운 빛을 새기고는 날쌔게 몸을 움직인 것이다.
따로 지시를 받은 룬은 재빨리 아한을 왼손으로 들고 뒤쪽으로 달아나며 다가오는 몬스터를 오른손의 검으로 내려쳤다. 빠르게 내달리는 룬의 팔에 힘이 가득 실렸다.
“도티, 도티!”
한 여성이 드디어 발견한 어린 딸을 부여잡고 울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 딸을 잠시 옆 가게 부탁하고 장을 보러 갔다 온 사이 마을은 풍비박산이 났고 딸을 부탁한 가게는 형체도 없이 부서졌다.
혹시나 하고 찾아다닌 끝에 딸 도티를 찾은 여인의 눈에서는 안도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모녀간의 상봉은 잠시였다.
곧 무자비한 그림자가 모녀의 위를 덮쳐 왔기 때문이다.
딸을 찾은 기쁨도 잠시, 떨리는 눈으로 위를 올려다본 여성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뚜욱. 뚝.
진득한 침을 삼키며 한 개의 커다란 눈으로 모녀를 바라보는 트롤이 징그럽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
공포로 가득 찬 여성이 제 품 안의 어린 딸을 꼬옥 안았다.
이 한 몸이 삼켜져도 아이만은 무사하길.
어미의 몸이 갈가리 찢겨도 내 아이만은 다치지 않길.
간절한 여인의 손이 떨림이 되어 아이를 더 꼬옥 안았고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아이의 울음소리가 크게 퍼져나갔다. 그런 아이의 울음소리가 트롤을 더욱 자극한 것인지 괴기한 웃음을 짓던 트롤이 한바탕 크게 울부짖으며 모녀를 향해 제 큰 방망이를 흔들었다.
여성은 아이를 더욱 꼬옥 품에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 수도에서 그들 모녀를 걱정할 남편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푸슉- 쿵!
그 순간, 큰 굉음이 모녀를 후려쳤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여성은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트롤을 봤을 때보다도 더 세차게 흔들리고 말았다.
하나로 높이 묶은 검은 머리는 피비린내 나는 이곳에서도 눈길이 머물 만큼 탐스러웠다.
가녀린 듯 보이지만 날씬한 몸매는 주저앉아 올려다보는 여자를 더욱 하염없이 고개 들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은색 검에 묻은 녹색의 피는 진득했고 그녀의 앞에 두 동강이 난 트롤의 얼굴은 끔찍했다.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보다 어릴 게 분명함에도 선명한 붉은 눈은 똑바로 자신에게 향했고, 어떤 기사보다 정중한 태도로 내미는 손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딸을 꼭 안은 여자는 절대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감, 감사…….”
감사하다는 말조차 아직 가시지 않은 두려움 때문에 선뜻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애초에 그런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던 듯 바로 여성을 부축했다.
그리고 여성의 품 안에서 우는 아이를 보고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곧 그녀, 르베나가 여성에게 말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과 아이를 보호해 줄 겁니다.”
그리고 여성이 르베나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 여성과 아이의 몸을 검붉은 마력이 감싸기 시작했다. 마력을 처음 보고 느낀 이에게 이것은 분명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여성은 저와 아이를 감싸는 그 힘을 느낀 순간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 빛이, 그 힘이 그들 모녀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게 괜찮다고.
“이, 이대로는 가망이 없겠어… 젠장… 수도에서는 아무도 안 오는 건가!!”
힘겹게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지만 애초에 실전 경험이 전무한 검문소 기사들은 말도 안 되는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략을 바꾸어 몬스터와 맞서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규합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밀려오는 몬스터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그들이 숨을 수 있는 곳엔 한계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목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저 사람들은 뭐지……?”
누군가의 넋 나간 듯한 소리에 한곳에 숨어 있던 모두가 작은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흰색의 제복을 입고 검붉은 망토를 두른 사람들이 방금까지의 상황이 우습게 느껴질 만한 힘으로 몬스터들을 도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두려움도 없었고 망설임도 없었으며 그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그들이 내려치는 검마다 몬스터들의 기괴한 울음소리와 피가 낭자하게 퍼져나갔고 그들의 검붉은 망토가 한번 휘날릴 때마다 어김없이 몬스터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그리고.
“저… 여자하고 저… 남자는 뭐야……?”
사람들의 눈은 그중에서도 두 사람에게 더욱 집중되어 있었다.
거친 살육의 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귀하고도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차없이 몬스터들을 베어 내고 있었다.
그녀의 날쌘 움직임을 따라잡는 몬스터는 없었고 그녀의 강한 검을 막아내는 몬스터도 없었다.
그녀는 모든 공간이 제 것인 것처럼 움직이며 몬스터들을 쓸어 버렸다. 그리고 틈틈이 구해 낸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검붉은 힘으로 그들 역시 삽시간에 없애 버렸다.
그녀 옆의 남성도 그들의 시선을 앗아가기엔 충분했다.
그녀만큼이나 검은 머리칼에 날카로운 금안을 빛내는 그는 무지한 그들이 보기에도 귀한 집의 자제로 보일 만큼 준수하고 멋진 인물의 남자였다.
그는 체격만큼이나 큰 칼을 가볍게 휘두르며 몬스터들을 죽여 나갔고, 그 어떤 존재도 그녀의 곁으로 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무감각하게 칼을 휘둘렀지만 그의 칼끝은 매서웠고, 누가 봐도 단 한 사람만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검문소 기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들이 숨죽여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쿵.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난 후 적막이 흐르는 폐허가 된 마을 가운데 그들이 서 있었다.
르베나가 아벨디온 기사단이 모두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 곳곳을 살피며 말했다.
“이제 몬스터는 없으니 나오셔도 좋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들을 훔쳐보던 생존자들이 흠칫흠칫 떨기 시작했다.
정체도 모를 사람들이 갑자기 흉포한 몬스터들을 상처 하나 없이 도륙했으니 그들의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그중 저 여자는 마을 사람들 역시 모두 없애 버리지 않았나.
모든 생존자들이 같은 생각과 겁먹은 모습으로 나서기를 두려워할 때였다. 한 골목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우리 엄마를 돌려내! 우리 엄마를 어떻게 했어! 아까 저 누나가 우리 엄마를 붉은색으로 뒤덮더니 사라지게 했어! 엉엉… 돌려내! 돌려내라고!!”
아이의 외침에 생존자들은 아이에 대한 연민과 두려움을 함께 느꼈다.
그들도 모두 보았다. 사람들을 구하는 족족 여성은 그들을 사라지게 했다.
저 정도 실력의 여자라면 그들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무슨 목적으로 몬스터들을 죽였는지 모르겠지만, 구해 낸 사람들마저 하나하나 사라지게 만든 여성의 의도는 분명 좋지 못할 터였다.
“아이고, 저걸 어째…….”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 겁 없이 나선 저 아이의 미래도 그리 밝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르베나는 골목에서 나타난 아이를 한참 동안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르베나의 눈은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함을 품고 빛났지만, 그마저도 아이와 마을 사람들에게는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때 아를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르베나에게 말했다.
“르베나, 텔레포트.”
아를의 짧은 말에 르베나가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아… 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팅, 불러내.”
그러자 르베나의 품 안에서 퐁! 하고 나온 팅이 주변을 한번 휘휘 돌아보고는 저장해 두었던 르베나의 마력을 끌어냈다.
곧 검붉은 마력이 충만해지자 숨어 있던 모두가 조용히 공포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윽고 르베나가 공중에 손짓을 하자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르베나에 의해 사라졌던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어, 엄마!!”
“여보! 여보!!”
“타림! 무사했군, 무사했어!”
무사히 나타난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이제껏 두려움에 떨며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생존자들이 서둘러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가족과 이웃들의 모습에 두려움 따위는 잊은 채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안도감에 울기 시작했다.
르베나와 아벨디온 기사단은 그런 그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생사와 무탈함을 확인하던 사람 중 하나가 르베나에게 울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흡… 저희 모두를 구해 주셨으니 여러분은 저희 마을의 은인입니다… 흑… 은인들께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의 질문에 생존한 모든 이들의 얼굴이 르베나와 기사단에게로 향했다.
모두의 눈엔 어느새 두려움과 공포 따위는 사라졌고 선망과 존경의 빛만이 강하게 어려 있었다.
이내 그들을 한 번씩 바라본 르베나가 짧고 무심하게 답했다.
“아벨디온. 모든 살과 피로 디오니스를 수호하는 이. 그것이 우리다.”
그렇게 아벨디온은 처음으로 켄느의 백성들과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