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33화 (133/276)

133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5)

“켄느에서 반기지 않을 겁니다.”

조용히 산책을 하던 중 꺼낸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토니에’와 관련된 정황이 있다면 그냥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이번만큼은 정말 그대의 결정을 말리고 싶습니다. 켄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워낙 폐쇄적이라 여전히 의문이 많은 왕국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살짝 고민하던 루드바하는 이내 결심한 듯 한마디 덧붙였다.

“게다가 현재 왕인 케투아는 별로 좋은 인물이 안 됩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조금은 놀란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안 지 오래되었다면 오래되었고 얼마 되지 않았다면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 동안 르베나는 단 한 번도 루드바하가 누군가를 험담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나 르베나에게 선을 지키던 그가 르베나의 결정을 만류하는 것 역시도.

처음 산책을 권했을 때부터 그가 르베나에게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외로 처음 보는 루드바하의 모습들에 르베나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녀를 걱정하는 루드바하의 마음을 알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곧 르베나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켄느의 요청 없이 그곳으로 향하는 게 얼마나 무분별한 짓인지 잘 압니다. 또 왕국 중 가장 폐쇄적인 그곳에 아벨디온 기사단만 데리고 가는 게 경솔한 행동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르베나의 눈동자가 루드바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루드바하. ‘보토니에’는 지금 이 시각에도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그들의 가족과 삶과 희망을 짓밟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베이라나 세츠로 태어난 것이 그들을 반드시 도우라는 누군가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루드바하를 그대로 직시하는 붉은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언제나 그녀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떠한 상처도 어떠한 모욕도 어떠한 미래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르베나는 언제나 굳건했다.

그래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그가, 그런 그녀를 지켜 주고만 싶은 루드바하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르베나의 눈을 가만히 마주 보던 루드바하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하아… 내가 어찌 그대의 고집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언제나 조심하십시오. 그대의 목숨은 하나뿐입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님의 부탁이라지만, 언제나 저를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르베나의 말에 이번에는 루드바하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살며시 불어오는 봄바람이 늦은 저녁 높이 떠 있는 달보다 환하게 빛나는 그의 은빛 머리를 살랑이며 흩뜨려 놓았다.

새카만 밤임에도 또렷하게 빛나는 그의 벽안이 르베나를 곧게 향했다.

이윽고 르베나의 붉은 눈이 그를 향하자 여느 때보다 더 옅게 미소 지은 그가 말했다.

“…누구의 부탁이 아니라 제 마음이 그런 겁니다…….”

솨아아--- 다시 불어오는 바람이 이번에는 르베나의 검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흩뜨려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루드바하의 미소가 어쩐 일인지 르베나의 붉은 눈을 쉬이 놓아 주지 않는 밤이었다.

“모두 준비됐나?”

이름 아침, 연무장에 집합한 이들을 르베나가 돌아보며 말했다.

흰색의 제복에 검붉은 회오리가 그려진 표식을 어깨에 달고 그만큼 검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는 아벨디온 기사단.

그들은 어느새 몸집을 불려 열 명으로 시작한 창단식이 무색하게 벌써 서른 명의 군집을 이루었다.

단장인 르베나를 위시하여 부단장인 아를과 다한이 맡는 기사의 수도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그들 모두가 르베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절대적인 믿음과 충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특별한 손님이 그들 사이에 함께 있었다.

“정말… 괜찮겠느냐?”

조금은 떨리는 듯, 그럼에도 애써 태연하게 묻는 가스트의 물음에 아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르베나 누나한테 폐 끼치지 않을게요.”

아한의 짧은 대답에 가스트의 눈에 수많은 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평소 가스트와 함께 젠의 마법학원에서 지내던 아한은 이번 납치 사건을 계기로 학원을 자퇴했다.

실전에서 자신의 마법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많이 좌절하고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이후 디오니스에 돌아온 아한은 부쩍 르베나와 아벨디온 기사단의 임무에 함께하고 싶어 했다.

“위험하다, 아한. 이 할애비가 하지 말랬지 않느냐!”

가스트는 하나 남은 손자의 안위가 염려되어 항상 이를 만류했지만, 오히려 르베나는 그런 아한을 나무라지 않고 많은 곳에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결국 아한 또한 켄느로의 일정에 합류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가스트에게 아한은 언제나 작고 어린 손자일 뿐.

심지어 가스트의 말은 르베나에게 폐를 끼칠 것에 대한 염려가 아닌 아한의 안위에 대한 염려이건만 아직 어린 손자는 이런 할아버지의 마음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가스트는 곧 자신의 눈치를 보는 아한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말했다.

“아한, 너는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는 아이지, 폐를 끼치는 아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려무나. 이 할애비는 오직 너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란다.”

가스트의 말에 아한이 잠시 얼굴을 붉혔다가는 다시 가스트의 품에 꼭 안기며 말했다.

“절대로 다치거나 아프지 않을게요. 이 모습 그대로 할아버지한테 돌아올게요. 걱정 마세요. 저한테는 르베나 누나도 있고 기사단 형들도 있잖아요.”

아한의 말에 룬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가스트 님, 걱정 마십시오! ‘보토니에’ 힘을 추적하는데 아한만 한 베이라가 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소중한 재원이니 저희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겠습니다!!”

“당연하죠!”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누굽니까.”

룬의 말에 여기저기서 한마디씩을 보태어 가스트를 안심시켰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참 고마워 가스트가 비로소 조금이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옅은 미소를 띤 가스트의 얼굴이 이내 르베나에게로 향하자 르베나 역시 그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무 걱정도 마라. 아한은 무사할 거다. 내가 그리할 것이다.

그 한 번의 작은 고갯짓에 가스트는 품 안의 손자를 비로소 놓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이라면 가스트는 그 무엇도 의심치 않았다. 그게 그녀가 보여 준 그녀의 삶이고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도 르베나나 가스트조차 놀랄 만큼 아한의 추적 실력은 정말 훌륭했다.

특히 아한은 평범한 마력이나 신력이 아닌 힘까지 기가 막히게 잡아내 ‘보토니에’를 추적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켄느로의 일정이 자칫 위험할 수 있음에도 아한이 가겠다고 자원을 하고 르베나 역시 이를 말리지 않은 것은 모두 이 이유에서였다.

아한이 이들에게 꼭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과 더불어 아한의 안위를 약속하는 르베나의 모습이 비로소 가스트의 돌덩이 같던 마음을 조금 가볍게 해 주었다. 그렇게 가스트와 아한의 인사가 끝나자 아한과 아벨디온 기사단은 서서히 르베나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다한 경도 걱정스러운 듯 르베나와 다른 기사들에게 말했다.

“모두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러자 아를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 모두 남은 아벨디온의 기사들과 웃는 얼굴로 짤막한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 일정은 ‘보토니에’가 맞는지 확인만 하는 거라 함께 가지 못하는 거잖아, 바보야!

우리가 죽으러 가냐!”

다한의 옆에서 훌쩍이는 랄프를 보며 룬이 한마디 하자 모두가 함께 큰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모두를 확인한 르베나의 어깨에서 곧 팅이 나와 저장해 놓았던 마력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빵빵해진 팅의 꼬리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일행을 충만하게 감싸 안았다.

곧 르베나가 ‘르베나’하고 속삭이자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주변을 휩쓸었다.

르베나와 일행의 모습이 점점 옅어지는 사이 가스트와 다한을 바라보던 르베나가 조용히 그들에게 말했다.

“디오니스를 잘 부탁하네.”

그 말을 끝으로 일행은 모두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빈공간을 보며 조용히 가스트가 읊조렸다.

“부디 신의 가호가 그들과 함께하길.”

* * *

“꺄아악-! 살려줘!! 아악!!”

“으윽… 살려… 아아!!”

“도티야! 도티, 어디있… 꺄아악!”

르베나 일행은 켄느 왕국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서는 왕국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검문소가 있는 곳으로 텔레포트를 해 정식으로 입국심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그들을 검문하는 기사도, 평화롭게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도 없었다.

사람을 한입에 꿀꺽 집어삼키는 몬스터와 그런 몬스터를 피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또 그들을 보호하며 몬스터와 싸우는 처절한 모습의 기사들.

르베나 일행을 맞이한 것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된 켄느의 한 검문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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