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4)
르베나의 왕위 후계자 계승식 이후 디오니스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둘 이상이 모이면 그들이 하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왕성이 그 뭐냐, 마법의 보호를 받는다며?”
“르베나 공주님의 마력이라네.”
“거기 있는 귀족들이 모두 르베나 공주님의 힘을 느꼈다는군.”
“디오니스의 축복이야, 르베나 공주님은.”
백성들이건 귀족들이건 너 나 할 것 없이 그들은 모이면 르베나를 칭송하고 마력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신마전쟁이 끝나고 ‘마력’이란 단어가 왕국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던 디오니스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디오니스의 외궁.
봄이 되어 꽃이 만발한 작은 정원에는 꽤 많은 인원이 둘러앉아 때아닌 티 타임을 갖고 있었다.
르베나와 루드바하, 그리고 아를. 가스트와 후벤, 다한, 바흐란까지.
그들은 큰 야외 테이블에 모두 함께 앉아 사나와 루가 내오는 차와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 모두 르베나의 연회를 축하해 주러 온 김에 그녀와의 독대를 원했는데, 르베나가 시간을 쉽게 뺄 수 없어 어렵게 하루 더 머물며 함께할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때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귀한 분들을 기다리게 하다니, 정말 송구합니다.”
그들이 일찍 모인 것뿐이지만 예의상의 인사를 건네는 그, 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밝아 보였다. 그리고 칸을 본 르베나가 옅은 미소로 답했다.
“아직 여유 있는 시간입니다. 개의치 말고 자리하시지요.”
평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대를 하는 르베나이지만, 유난히 칸에게는 말을 높였다.
언젠가 이를 이상하게 여긴 아를이 이유를 물으니 르베나는 그냥, 이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칸 역시도 몇 번이나 르베나에게 하대할 것을 요구했지만 언젠가부터는 그냥 포기한 듯 보였다.
이윽고 가깝게 다가온 칸이 구김살 없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앉자 바흐란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그동안 서신으로만 연락해야 해서 좀 보고 싶던 차였는데.”
호기롭게 웃으며 말하는 바흐란을 보며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자칸과의 무역이 잘 성사되어 왕자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칸의 말에 바흐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가 믿을 만하니 추진한 일인 걸. 또한 우리 자국에도 큰 도움이 된다 판단된 일이기도 해. 그대의 상단이 자질이 없었으면 추진되지 않았을 일이니 내게 고마워할 것 없어.”
바흐란과 칸의 대화를 듣던 일행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져나갔다.
일전에 아한과 스릴 공주의 납치사건 당시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던 탓인지 바흐란은 칸과 루안에게 부쩍 신경을 많이 썼고 이후 관계도 #상당히 친밀해졌다.
그리고 이는 그날의 사건 이후 서로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하며 의견을 나누는 이들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다.
칸과 바흐란의 대화가 끝나자 이번에는 르베나가 칸에게 인사를 전했다.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선물이 지나친 것 같아 조금 부담스럽긴 하더군요.”
르베나의 말에 칸이 보기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약소한 것이니 부담 갖지 마시지요. 제 나름대로 준비한 것인데 마음에 드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르베나는 그가 보낸 작은 선물을 떠올려 보았다.
루아나 꽃.
그가 보낸 선물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루아나 꽃이었다.
녹색의 꽃잎은 짙은 색의 그린 다이아가 겹겹이 쌓여 푸릇한 생생함을 자아냈고 가운데 부분의 짙고 붉은 수술은 새빨간 루비를 세심하게 세공해 금방이라도 바람에 살랑일 것 같은 생동감을 표현해 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정말 실제 루아나 꽃의 크기만큼 세공한 꽃이 귀걸이와 목걸이, 그리고 브로치가 되어 고급스럽고 작은 붉은 벨벳의 상자 안에 놓여 있었다.
[Anevel 상회]라는 짧은 글귀의 카드와 함께.
보석에 관심이 많지 않은 르베나조차도 엄청난 장인이 굉장히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칸의 선물에는 큰 정성과 그에 못지않은 호화스러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언제나 르베나에게 많은 것을 주는 칸.
하지만 이상하게도 르베나는 이런 칸의 태도가 말처럼 부담스럽거나 싫지는 않았다.
언제나 과도한 타인의 호의를 거절부터 하는 르베나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런 르베나의 낌새를 눈치챈 아를이 가볍게 물었다.
“무슨 선물을 해 줬길래?”
그리고 마침 차를 따르고 있던 루가 얼른 아를의 물음에 대신 답했다.
답을 하는 루는 생각만으로도 황홀한지 짓는 표정만으로 선물의 가치를 짐작하게 했다.
“루아나 꽃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주얼리 세트였어요! 그 많은 다이아와 루비, 또 그 세공을 보면… 하아… 어떤 여인이라도 가슴이 떨려 남아나지 않을 거예요!”
흥분한 루의 입술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게다가 루아나 꽃이라니… 저희는 그 선물을 한 분이 참 따뜻한 분이라고 느꼈어요. 그런데 얼굴도 참… 따뜻하게 잘 생기셨네요. 저희 공주님과 나이 차이가 조금 있어 보이시긴 하지만… 흠…….”
30대는 충분히 되었을 법한 칸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루를 보고 르베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루의 쓸데없는 뒷말이 걸리긴 했지만 조금만 괜찮은 남자를 보면 르베나와의 나이부터 계산하고 보는 루에게 어느새 익숙해진 르베나는 더 이상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의 몇몇 사람은 루의 뒷말이 굉장히 불편한 듯 칸을 바라보고 있었다.
번뜩이며 빛나는 금안과 맹수처럼 빛나는 녹안 그리고 고요한 듯 차갑게 이글거리는 벽안까지.
세 남자의 뜨겁고도 차가운 눈길을 받은 칸이 굉장히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레턴 전하는 번번이 참석을 못 하시는군요.”
칸이 도움을 요청하듯 말하자 분위기를 읽은 가스트가 얼른 말을 받아주었다.
언제나 보지 않으려 해도 뚜렷하게 보이는 세 남자의 질투에 가스트는 마음 한쪽이 뿌듯하면서도 왜인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요즘 ‘보토니에’가 마를한 쪽에 자꾸 흔적을 남긴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바쁜 모양입니다.”
가스트의 대답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둘과의 싸움 이후 ‘보토니에’는 더 이상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는데, 현재까지 가장 빈번하게 문제가 일어나는 곳이 마를한이었다.
마치 레턴의 배신을 보복이라도 하듯 ‘보토니에’의 마법사들은 마를한의 변방에 있는 작은 마을들을 하룻밤 새에 모두 없애 버렸다.
“레턴 전하는 처음부터 한편도 아니었는데 배신자 취급당했다고 억울해하시더니. 그런 것치고는 매우 분주하시네요.”
바흐란의 말처럼 레턴은 장난스럽게 곧잘 억울함을 표현하고는 했지만 한 나라의 왕답게 백성들이 화를 당하자 엄청난 분노를 느꼈고, 곧장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소탕하러 다니기 바빴다.
“하지만 ‘보토니에’놈들도 진짜 정상은 아니야.”
곧 아를이 바흐란의 말을 받았다.
“르베나에게 끊임없이 살수들을 보내지 않나, 여기저기 여전히 부녀자 납치가 일어나질 않나. 진짜 이 정도면 죽고 싶다고 발악을 하는 거지.”
서늘한 아를의 말을 들은 모두의 얼굴에 다시금 서늘한 분노가 어렸다. 흔적만 조금씩 남길 뿐인지라 아직 ‘보토니에’의 소행이란 것은 아직 확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국가든 대대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행동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었다.
디오니스와 자칸, 그리고 젠에서 왕족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다른 왕국들과의 관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고, 백성들의 불안을 부추기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을 때 듣기만 해도 편안해지는 루드바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직이라면 분명 뿌리가 있을 테고, 이렇게 모두가 모여 해결책을 논의하고 뜻을 나누니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희망적인 루드바하의 말에 바흐란도 동의를 표했다.
“그래, 그래봐야 아직 작은 조직일 뿐이고 이미 네 왕국이 힘을 합쳤잖아. 우리한테 실체 없는 조직일 뿐인 ‘보토니에’ 소탕이 뭐가 어렵겠어.”
조금은 밝게 들리는 바흐란의 목소리에는 기분 좋은 긍정이 느껴졌다. 덕분에 모두가 분위기를 전환하며 조금 가벼운 기분으로 다시 차로 입을 축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루드바하는 제게로 향하는 누군가의 곧은 시선을 느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갈색 머리와 갈색 눈.
그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맑고 정직했지만, 약간의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또 굉장히 생소한 그 눈빛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었다.
그러자 그, 칸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젠 제국의 황제이자 빛의 정점이신 유파시드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작은 상단을 운영 중인 칸이라 합니다.”
칸.
르베나와 다른 이들에게 몇 번이나 들어서 익숙한 이름이었다.
이들에게 ‘보토니에’의 정보를 가져다주고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상단의 주인.
하지만 그가 루드바하와 정식으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루드바하는 곧 옅은 미소로 답하며 말했다.
“저도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주신 도움에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루드바하의 답변에 칸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1초, 2초, 3초.
가만히 루드바하를 바라보던 칸이 돌연 활짝 웃으며 답했다.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약소하지요.”
* * *
“켄느 왕국 말입니까?”
한창 근황을 묻고 최근의 정보들을 교류하던 중 던져오는 아를의 물음에 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켄느 왕국도 저희 상단과 활발하게 거래를 하는 왕국 중 하나입니다. 한데 요즘 심상치 않은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일이라면 어떤…….”
가스트의 물음에 칸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켄느 왕국은 예부터 알 수 없는 힘으로 보호를 받는 왕국입니다. 알지 못하는 선조 대부터 내려온 결계는 켄느 왕국을 부강하고 안전한 나라로 만들었지만, 또 그만큼 폐쇄적인 나라로 만들기도 했지요.”
그의 말에 동의하듯 아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희 상단도 계약을 할 때 가장 많이 애를 먹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한데 몇 주 전부터 돌연 켄느 왕국에서 일방적으로 모든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뿐만 아니라 자국민 역시 왕국 외부로 일절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칸은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소문에 의하면 켄느 왕국 내에서 이유를 알 수 없이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칸의 말에 바흐란이 의문을 표하며 말했다.
“그럼 왜 켄느는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거지?”
바흐란의 말에 아를이 말했다.
“옛날부터 켄느 왕국은 자립심이 강했어. 자국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대신 도움을 받지도 않아. 아마 지금도 그런 성향이 짙겠지.”
아를의 말을 듣고 다한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그러면 칸 님께서는 켄느 왕국 내부의 일이 ‘보토니에’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다한의 물음에 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상단이 강제로 그곳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직원 중 하나가 죽은 백성의 시신을 보았다고 하더군요. 그의 말에 따르면 마치 누군가가 그의 모든 것을 빨아 마신 듯한 백골의 모습이었다고…….”
칸의 말에 일순 일행의 분위기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모든 것을 빼앗긴 듯한 백골의 시신.
그건 그들이 마를한의 외곽 마을에서 보았던 시신의 형태였고, 후에 레턴이 설명해 준 ‘보토니에’만의 살해 방법이었던 것이다.
사람의 생명력에 존재하는 마력과 신력을 빼내어 제3의 힘을 만들어내는 ‘보토니에’.
그들의 음모는 점점 빠르고도 음침하게 퍼져가고 있었다.
시작점이 되었던 마를한에서 디오니스로, 또 젠과 켄느까지도.
작은 정원에 둘러앉은 모두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꽃향기가 물씬 풍기기 시작하는 봄의 어느 날, 새롭게 불어오는 위기의 향이 정원에 자리 잡은 일행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