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3)
“저, 저러다 결투라도 하는 거 아니야?”
누군가의 작은 속삭임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인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 연회장에는 그 정도의 긴장과 침묵이 팽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루드바하와 아를, 누구하나 깜빡임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떨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오니스의 태, 태양, 제노스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아를과 루드바하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있던 시종의 목소리에 비로소 연회장을 감돌던 긴장감이 깨졌고 루드바하와 아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려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제노스 왕을 바라보았다.
르베나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전보다 더 위엄있고 건강해진 모습의 제노스는 중년 귀부인들의 얼굴을 붉게 만들 만큼 근사했고,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르베나를 찾아 지어 보이는 미소는 멋들어졌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모두의 인사를 받은 제노스 왕이 연회장 한가운데 놓인 상석에 앉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를 위해 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특히 젠에서 자리해주신 유파시드께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제국의 황제인 유파시드는 사실 제노스 왕보다도 높은 서열이다. 하지만 그는 상석에 본인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극구 사양하고 다른 손님들과 함께하기를 청했다.
오로지 이 자리가 제노스 왕과 르베나만을 위한 자리이기를 바라는 그의 배려에 제노스는 그래서 더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 것이다.
제노스의 말에 보기좋은 미소로 화답한 루드바하를 한번 보고는 제노스가 방향을 바꾸어 따뜻한 녹안으로 르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이 자리는 저의 손녀이자 아벨디온 기사단의 단장인 르베나 드 디오니스의 스물한 살 생일이자 데뷔탕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자리임을 여기 계신 모두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노스 왕의 말에 연회장에는 다시 긴장과 설렘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르베나도 시선을 들어 제노스 왕을 바라보았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는 로드의 길에 자리하거라.”
제노스 왕의 명과 동시에 연회장 가운데 붉은 길이 열렸다.
마법진으로 발동되는 ‘로드의 길’은 정식으로 왕위 계승의 절차를 밟을 때에만 생겨나는 길로, 선명한 붉은색의 빛이 왕의 자리까지 직선으로 뻗어 펼쳐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왕가의 마력에 의해서만 발동되게 되어 있었다.
“오오… 로드의 길이라니…….”
“저것이 로드의 길인가…….”
제노스 왕이 베이라라는 사실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드록의 후계자 임명 때에도 로드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당시 마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그가 함부로 힘을 드러낼 수는 없었으리라.
그래서 모두들 신마전쟁이 끝나고, 영원히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로드의 길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흥분과 환희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또각, 소리와 함께 누구보다 그 길에 어울리는 한 사람이 길의 끝에 자리했다.
바르고 곧게 편 어깨와 도도하게 치켜든 고개, 오로지 길의 끝에 선 제노스만을 똑바로 향하는 붉은 눈과 검은 밤하늘처럼 하늘거리는 머릿결.
로드의 길에 선 르베나는 마치 모든 정의를 심판하러 온 고고하고 도도한 여신과 같아 보였다.
르베나가 길에 서자 곧바로 시녀들이 디오니스 왕가의 문양이 크게 금실로 수놓인 흰 털 망토를 르베나의 어깨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아무런 음악도, 박수도 없이 르베나는 걸었다.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노스 왕을 향해서.
이윽고 그의 앞에 다다랐을 때, 제노스 왕이 한껏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르베나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빛나는 관을 르베나의 머리에 얹으며 선포했다.
“나 제노스 드 디오니스는 르베나 드 디오니스를 나의 후계로 정식 임명하는 바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환희가 묻어 있었다.
“이제 르베나 드 디오니스는 디오니스 왕국의 정식 후계자로서 언제나 백성을 지키고 왕국을 번영시키는데 자신의 모든 살과 피를 묻을지어다!!”
정해진 선포문을 말하는 제노스의 음성은 그의 앞에 선 르베나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떨려왔다.
그랬기 때문일까.
르베나가 머리가 왕관을 받아 쓰고 일어났을 때 이어진 제노스의 돌발행동에 모든 귀족들은 숨을 들이마시며 놀랐지만, 르베나만은 놀라지 않은 이유가.
이 신성하고 거룩하며 절제된 의식에서 제노스가 그의 손녀 르베나를 꼬옥 껴안았던 것이다.
“고맙다. 나의 손녀야. 그 모진 시간을, 그 모진 세월을… 이렇게나 멋진 모습으로 살아주어서. 이렇게나 맑은 눈을 가지고, 이렇게나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내 앞에 서 주어서.”
제노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결코 작지도 않았다.
해묵은 오랜 감정이 켜켜이 쌓인 그의 말과 목소리에 예법을 중시하는 귀족들마저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
“르베나 왕녀 전하 만세!!”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연회장에 자리한 모든 이가 붉은 눈시울을 뒤로 하고 소리쳤다.
“르베나 왕녀 전하 만세!”
“르베나 왕녀 전하 만세!”
“르베나 왕녀 전하 만세!”
연회장이 떠나갈 듯 외쳐지는 소리에 르베나가 이윽고 제노스의 품에서 벗어나 그들을 바라보았다.
넓은 연회장 안 가득한 사람들이 그녀와 제노스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어떤 이는 조금 전 일로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어떤 이는 손안에 든 샴페인을 치켜들며, 또 어떤 이는 조금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렇게.
…혼자 걸었던 길.
괄시와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을 가진 그들은 스스로의 마력으로 일으킨 로드의 길을 걷는 어린 소녀를 겉으로 축하하며 속으로 증오하였다.
그래서였을까. 스스로 디오니스의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그녀에게 축하와 충의를 말하던 그들은, 오랜 시간의 노력 끝에 그녀와 디오니스를 멸망과 처절함의 끝으로 몰고 갔다.
누구나 그녀를 칭송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녀를 두려워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다.
이 시간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르베나에게 있어 귀족들은 그런 이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힘껏 환호하며 소리친다. 르베나를 향해 눈시울을 붉히며 르베나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응원한다.
물론 그들 모두가 진심일 것이라 믿지는 않지만, 회귀 이전과 너무도 다른 지금의 상황은 언제나 메말라 있던 르베나의 마음조차 찌르르 울리는 힘이 있었다.
아직까지 어깨 위에 놓여 있는 제노스의 따뜻한 손.
귀족들의 자리 바깥쪽에 도열해 누구보다 힘껏 소리치는 아벨디온 기사단.
식장 먼발치서 눈시울을 붉히는 사나와 그녀를 위로하는 후벤과 가스트.
그리고 그 옆에, 어딘지 불만이 가득하면서도 르베나를 위해 몰래 눈물 흘리는 사랑스러운 아한.
과거 그녀가 놓쳤던 모든 것이, 모든 이들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르베나의 심장이 힘껏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 더없는 축복을, 이 더없는 행복을 영원히 제 눈 안에 간직하고 싶었다.
모두를 둘러본 르베나가 곧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는 왕위 계승을 받은 차기의 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인에게 꿇는 무릎이었으며, 계승 의식의 마지막 절차이기도 했다.
드레스를 입은 르베나가 한쪽 무릎을 꿇는 모습이 이상해 보일만도 하건만 여기 있는 누구도 감히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쪽 무릎을 꿇었어도 그녀는 가장 고귀해 보였고, 드레스 차림이었어도 누구보다 강해 보였다.
“나 르베나 드 디오니스는 이 살과 피를 모두 디오니스의 번영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쓰겠다. 나의 살은 방패가 되어 백성들을 지킬 것이고 나의 피는 독이 되어 디오니스를 위협하는 모든 이를 처단할 것이니 이로써 디오니스는 더없는 광영과 안위를 누리게 될 것이다.”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소감이었다.
보통 후계자 계승식의 소감과 다짐을 말하는 이 문장은 큰 틀이 있기는 해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하지만 듣는 이에 따라서는 르베나의 말이 조금은 섬뜩하게 들려왔다. 그럼에도 여기 모인 모두는 그 말의 진의를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10여 년에 걸친 시간 동안 그녀가 그녀의 목숨을 걸고 증명해 낸 것이 바로 그 진실이었기에.
스르륵.
곧 자리에서 일어난 르베나가 시종에게서 검을 받아 들었다.
원래는 없던 순서에 귀족들이 서로 의문의 눈짓을 교환했지만 르베나는 태연하게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오늘의 내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지금부터다.”
곧 르베나의 검에서 검붉은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와아…….”
“저게 공주님의 마력……!”
“아벨디온 기사단의 표식 같아!!”
“보기만 해도 황홀하군.”
“과연 최강의 베이라…….”
모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퍼져나가듯 르베나의 검에 흐르는 마력도 점차 그 힘을 더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직!!
르베나가 검을 순식간에 연회장의 대리석 바닥에 꽂아 넣었다.
모두가 그 모습을 경악으로 지켜보았고 마치 무른 두부에 꽂듯 바닥에 박힌 검에서는 폭발할 듯한 마력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마, 마법인가…….”
모두가 그 압도적인 모습에 스멀스멀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지만 르베나는 태연했다.
그리고 곧 르베나가 작게 외쳤다.
“르베나.”
르베나의 언령을 받은 마력은 곧 팽창하듯 커지기 시작했다.
검붉은 마력은 빠른 속도로 크기를 불려 반원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반원은 연회장을 덮칠 듯 번져나가 곧 모두의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마, 맙소사… 말도 안 돼… 이 정도의 대규모 실드… 라니.”
누군가의 작은 말소리가 믿기지 않는 듯한 어조로 퍼져나갔다.
휘릭. 망토를 젖히며 일어난 르베나가 연회장의 모두에게 말했다.
“나와 디오니스를 위협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한다. 오늘 이후로 디오니스와 디오니스 백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은 내 피와 살점을 모두 가져가지 않고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펑. 퍼펑!!
르베나가 말을 함과 동시에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그녀의 힘을 느꼈다.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힘, 온화하면서도 냉정한 힘, 넓게 퍼져 있으면서도 그들 하나하나를 감싸 안는 힘.
“오, 신이시여… 우리의 왕과 왕녀를 보호하소서…….”
누군가의 작은 떨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제국력 922년.
디오니스는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발적인 왕녀의 생명을 담보로 한 마력 실드를 가진 왕국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르베나가 왕위 계승자로서 내디딘 작지만 큰 파동의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