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2)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르베나는 당시의 기억이 좋지 않았다.
세상에는 충분히 고민하고 신경 써야 할 무수한 일들이 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연회의 파트너를 정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쓰고 고민을 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선택 이후 파트너가 벌인 일들이 디오니스 전역에 소문이 나면서 르베나는 의도치 않게 이런 요상한 눈빛을 곧잘 받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파트너로 선정된 그는 파트너로 선정되고 바로 며칠 후, 디오니스 왕궁으로 세 벌의 드레스를 보냈다.
그가 보낸 세 벌의 드레스는 모두 보기만 해도 황홀할 정도의 디자인을 갖추었으며 심지어 몇 개월 전부터 예약을 해도 맞추기가 힘들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명성 있는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이었다.
보통 미리 상의를 해서 한 벌씩 맞추는 것과는 스케일부터 다르게 그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세 벌을 제작해 보내고 르베나의 선택에 따라 자신이 디자인을 맞추겠다고 연락했다.
획기적이면서도 르베나를 배려한 그의 행동에 모든 사람들은 그가 르베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겠냐며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곧잘 그의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고는 했다.
“하아…….”
짜증스럽게 내뱉는 르베나의 한숨에 시녀들은 금방 웃음을 그쳤지만 왜인지 자꾸만 새어나오는 미소가 그녀들을 자꾸만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를 보던 사나 역시 잔뜩 미소를 담은 얼굴로 르베나에게 말했다.
“오늘 공주님은 그분의 곁에서 누구보다 아름다우실 거예요.”
사삭사삭.
빠른 손놀림에 의해 르베나의 얼굴에 하나씩 색이 덧대어진다.
원래도 흰 피부이기에 피부는 정돈하는 정도로만 손을 보았지만 옷과 통일감을 주기위한 옅은 색조 화장이 르베나에게 입혀졌다.
풍성하고 곱슬거리는 긴 머리는 반묶음으로 정리해 단정한 여성미를 강조했다.
풍성한 머리 사이사이 아주 작은 다이아들을 점점이 수놓은 머리는 마치 짙은 밤하늘에 반짝거리는 별을 옮겨 놓은 듯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펄이 르베나의 눈매를 깨끗하고 여성스럽게 빛나게 했다. 거기에 풍성한 속눈썹과 보석같이 영롱한 붉은 눈은 르베나를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게 했다.
원래도 붉은 입술이기에 살짝 반짝이게 보습제만 바른 입술은 잘 익은 붉은 과실과도 같았다.
딱 맞게 떨어지는 흰색의 시스루 드레스에 중간중간 금색의 실로 놓인 자수는 르베나의 도도하고 고귀한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부각시켜 주었다.
또각.
르베나가 모든 치장을 마치고 일어서자 치장을 도왔던 시녀들마저 말을 잊은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또각.
르베나가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살랑--! 길고 가는 백금의 이어링이 르베나의 걸음에 따라 움직였다.
깜빡.
르베나가 방문 앞에 선 파트너를 바라보자 풍성한 속눈썹이 나부끼듯 움직였다가는 고이 감춰놓았던 붉은 보석을 살며시 보여 주었다.
두근.
이윽고 르베나를 기다리던 그의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 * *
웅성웅성.
웅성거리는 수많은 사람들 속으로는 흥분과 설렘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젠과 자칸, 마를한, 켄느에서 온 전 대륙의 왕가와 귀족들이 지금 단 한사람의 입장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하고 사악한 범죄를 벌이고 있는 ‘보토니에’란 조직을 밝혀내고 그들에게서 자칸의 공주와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의 손자를 구해낸 영웅.
단 한사람의 인명피해도 없이 모두를 구해낸 공주.
마를한의 젊은 왕마저도 소탈한 친구로 만들어 버리고 자칸의 기사들까지도 정중하게 예를 차리게 만드는 여자 기사.
그녀를 수식하는 이 모든 영광속에 오늘 그녀는 또다시 큰 영광을 지니게 될 것이다.
바로 본격적인 사교계 진입과 더불어 디오니스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는 영광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함께할 수 있어 들뜬 모두의 마음이 공기중을 가볍게 부유했다.
그렇게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은 어느 순간.
뿔나팔 소리와 함께 시종의 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공주님과 아를 드 메이슨님의 입장이십니다.”
그의 소리에 번잡했던 무도회장은 순식간에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곧 문이 열리고 르베나와 그녀의 손을 잡은 아를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무도회장은 소리없는 감탄과 경악에 서서히 물들어갔다.
신이 빚어냈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거리게 될 정도로 매혹적인 모습의 르베나.
그녀는 데뷔탕트를 하는 소녀들이 입는 것과 같은 흰색의 드레스를 입었지만 전혀 앳된 소녀같지 않았다.
스무 한살이라는 나이때문이 아니라 똑바로 앞을 직시하는 붉은 눈빛과 당당하고도 도도한 걸음걸이.
그리고 절대 기죽지 않는 그녀만의 카리스마가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면서 귀한, 그러면서도 고혹적인 여성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걸어가면서 언뜻언뜻 비추어지는 가늘고 긴 백금의 이어링과 드레스의 금색 자수는 그녀를 감히 손댈 수 없는 어떤 존재처럼 보이게도 했다.
게다가…
“아… 아를 님…….”
누군가의 앓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아를을 본 사람들의 눈도 이미 넋이 나가있었다.
언제나 편한 차림만으로 훈련만 해도 사교계 미혼 여성들의 청혼이 끊이지 않던 그였건만, 백색의 정장차림에 가슴에는 금실로 메이슨 공작가의 문양을 새기고 새까만 머리를 깨끗하게 뒤로 넘긴 그의 모습은 절제되면서도 차마 숨기지 못한 남성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와 깨끗하고 반듯하지만 조금은 오만해보이는 이목구비.
그리고 르베나의 드레스에서 빛나는 금실과 꼭 닮은 금안.
르베나와 아를은 마치 하늘이 이미 한쌍의 커플로 정해놓고 만들어놓은 것처럼 완벽하게 들어맞아 보였다.
모든 혼사와 청혼을 거절하고 검술에만 매달린 아를이 르베나의 드레스 제작을 위해 엄청난 비용과 수고를 들였다는 이야기가 너무도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를과 르베나가 무도회장의 중간까지 걸어오자, 드디어 그날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생일축하와 왕가와 귀족들과의 인사가 정신없이 오고갔다.
큰 연회장을 가득 채우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화려한 샹들리에,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음식들과 달콤하고 쌉쌀한 와인의 빛깔. 그 모든 것이 완벽한 오늘을 그려내고 있었다.
르베나는 이전 생의 기억을 살려 모두가 놀랄정도의 왕궁 예법으로 그들을 대했다.
아를은 메이슨가의 아들답게 안정적이고 절제된 모습으로 르베나를 에스코트했다.
그리고 어느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들의 앞에 낯익은 사람이 다가왔다.
“둘이 정말 안 어울린다.”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에 아를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피식 웃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바흐란 왕자님.”
평소와 달리 격식을 차렸지만 어쩐지 그런 아를의 태도가 더 화가 났다. 곧 바흐란의 눈이 아를의 팔을 향했다.
르베나의 팔이 자연스럽게 끼어져 있는 아를의 팔을 당장이라도 꺾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바흐란은 이 상황에 불만을 느끼며 아를을 노려보았다.
“피식…….”
그리고 그때 들려온 아를의 웃음소리에 바흐란은 마지막 이성마저 놓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르베나의 파트너 얘기를 듣자마자 서신을 보냈거만 돌아온 것은 ‘무도회장에서 보지, 청은 고맙다.’
라는 짧고 굵직한 르베나다운 답변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도대체 누가 그녀의 옆에 설까 조마조마해 했건만 그렇게도 싫었던 아를이라니.
차라리 루드바하였으면 덜 억울하겠다는 생각마저 든 바흐란이었다.
게다가 바흐란을 보고 승자의 미소를 짓는 아를을 보니 바흐란의 그간의 정이고 뭐고 속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때, 또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고 그의 움직임에 사람들은 마치 말을 맞춘 것처럼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바흐란을 보고 무관심하던 르베나마저 다가온 그를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황제, 유파시드를 뵙습니다…….”
르베나의 인사에 옅은 미소를 지은 그의 벽안이 아주 잠시 르베나와 아를이 낀 팔장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고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르베나에게 말했다.
“아쉽군요. 일이 이렇게 빨리 해결될 줄 알았다면 서신을 물리지 않는건데.”
루드바하의 말에 가득 담긴 아쉬움이 짙게 느껴졌다.
“세상에, 젠의 황제야!!”
“유파시드가 저분이야? 맙소사 저 외모에 유파시드라니!”
“하아… 엘프의 피가 섞인 걸까?”
여기저기서 루드바하의 외모를 찬양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동시에 황금색의 실로 월계관과 엑스자를 그리는 성기사들의 검을 수놓은 흰색의 제복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분명 방금까지 아를과 르베나의 모습은 하늘이 정해 놓은 짝이 분명했다. 하지만 루드바하가 르베나의 곁에 서자 모두의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하늘이 그녀의 완벽한 짝을 또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아를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미소와 얼굴은 천상의 것이었지만 그보다 서늘하게 얼어붙은 벽안은 그가 제국의 황제이자 세츠들의 왕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런 그가 르베나의 옆에 서자 둘의 모습은 마치 온 대륙을 발밑에 평정할 고귀하고 높은 황제 부부 같아 보였다.
누가 황제인지 약간 헷갈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 루드바하는 젠에서의 일정으로 오늘 연회참석이 불분명해지자 르베나의 파트너 요청을 정중히 철회했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일로 르베나를 파트너 없이 입장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그의 배려였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철회과정에는 아무런 잡음이 없었다.
헌데 그런 그가 아쉬움을 가득 담아 말을 건넸다. 동시에 꺼졌던 불씨에 바람이 불 듯 모두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르베나가 그에게 대답을 하기도 전, 말은 옆에서 먼저 들려왔다.
“서신을 철회하지 않으셨어도 그곳에서 인사를 나누셨을 테니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대적으로 빛나는 금안.
아를의 싸늘한 말이 미소를 머금은 입을 타고 흐르자 루드바하의 서늘한 벽안이 그를 향했다.
곧 루드바하가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보군요.
그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선뜻 나오는 루드바하의 사과에 아를이 잠깐 멈칫했다.
아를이 아는 루드바하는 언제나 옅은 미소를 짓고 예의가 바르지만 르베나에 대한 일에는 은근한 가시와 견제가 많이 느껴지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를을 보며 미소짓던 루드바하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어쩐지 서신을 철회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곳에 서 있을 사람이 아를 그대였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루드바하의 말에 연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적막이 맴돌기 시작했다.
아를의 금안과 루드바하의 벽안이 더없이 시리고 강렬하게 서로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