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제3장. 아벨디온 下, 켄느 편 (1)
‘살려 주세요…….’
‘도와 주세요, 제발…….’
‘누군가 듣는다면 제발…….’
가녀린 목소리가 머리를 온통 지배하듯 윙-윙- 울려온다.
목소리에 실린 절박함과 좌절이 너무도 생생하게 와닿아 듣고 있는 이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구해 주세요, 제발…….’
확!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르베나의 까만 머리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르베나가 방금 꿈에서 들었던 의미 모를 목소리를 되새겼다.
너무도 절망적인 목소리로 살려달라, 도와달라 외치던 가녀린 소녀의 목소리.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그 소리가 왜 이렇게 머릿속에 남는 건지.
“하아… 악몽인가.”
가볍게 숨을 내어 쉰 르베나가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토니에'와의 일전을 치렀던 겨울이 가고 어느새 계절은 생명이 움트는 봄으로 나아갔다.
며칠 더 있어야 한 해가 저물 시기, 새벽에 떠오르는 해조차 맑고 깨끗한 하늘, 그 하늘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붉은 눈이 해보다 붉게 빛났다.
저벅저벅.
그때 르베나의 방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걸음 소리를 들은 르베나의 얼굴에 귀찮음과 반가움이 함께 어렸다 사라졌다.
곧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말간 사나의 얼굴이 비쳤다.
조심히 들어오던 사나는 이미 일어나 침대에 앉아있는 르베나를 보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공주님, 오늘은 푹 주무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찌 일어나 계실까요?”
사뭇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사나를 보며 르베나가 말했다.
“방금 일어났다. 아주 푹 잤고.”
짤막한 르베나의 답을 듣고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사나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등 뒤로 숨겨 놓았던 손을 꺼내 르베나에게 내밀었다.
화악--- 갑작스레 끼쳐오는 향긋한 내음이 르베나의 주위를 가득 채웠다.
녹색의 꽃잎과 가운데를 가득 채운 속이 붉은 수술의 꽃은 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른 봄에만 잠깐 피는 그 꽃을 사나가 조금은 설레는 얼굴로 르베나에게 내밀었다.
“스물한 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공주님.”
“루아나…….”
르베나가 짤막하게 내뱉자 사나가 말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궁 뒤뜰에 루아나가 잔뜩 피었지 뭐예요. 그래서 공주님의 생일선물을 고민, 고민하다 이걸로 정했어요. 받아… 주시겠어요?”
조금은 긴장한 듯 꽃을 내미는 사나를 한 번 보고는 앙증맞게 피어난 꽃을 가만히 바라보던 르베나가 이내 꽃을 받아들며 말했다.
“…고마워.”
이내 루아나 꽃을 가져가 눈을 감고 향을 맡는 르베나의 모습에 사나의 얼굴 가득 미소와 눈물이 함께 어려 버렸다.
루아나.
아주 작은 꽃송이에 보기드문 진하고 맑은 녹색의 꽃잎이 선명한 별 모양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진한 붉은 색의 수술들이 가득 찬 디오니스의 꽃.
진한 녹안이 아름다운 루아나 공주의 이름을 이 꽃에서 따왔을 정도로 루아나 꽃은 제노스 왕이 가장 좋아했던 꽃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몰랐을 것이다.
루아나 꽃을 꼭 빼닮은 그의 딸이, 이른 봄에만 잠깐 피는 이 꽃처럼 그토록 빨리 그의 곁을 떠날 줄은.
그래서였을까.
스물한 살 르베나의 생일.
떨리는 마음으로 루아나 꽃을 르베나에게 가져다준 사나의 마음이 루아나 꽃의 달달한 향과 함께 조용히 전해져왔다.
‘공주님, 공주님의 스물한 살 생일을 루아나 공주님이 직접 보셨으면 참 기뻐하셨을 거예요. 그러니 절대 잊지 말아 주세요. 당신을 참 많이 사랑한… 그녀를.’
아직도 조금은 차가운 바람.
봄에 맞는 르베나의 스물한 살 생일의 시작은 썩 나쁘지 않았다.
“하하. 그거보다는 이게 더 예쁘지 않아?”
“아니야!! 르베나 님의 보석 같은 눈을 닮은 이 색이 더 어울린다고!!”
루아나 공주가 죽고 난 이후 처음으로 활기를 띠는 듯 북적거리는 디오니스의 궁은 오늘 정말갖가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루아나 공주. 그녀의 딸, 르베나는 모두가 외면하던 저주받은 아이에서 어느새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공주이자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그녀의 스물한 살 생일이자 데뷔탕트가 열리는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보통은 열일곱 살에 치러지는 데뷔탕트.
공주임에도 힘든 어린 시절과 기사의 길을 선택한 르베나의 선택 때문에 르베나는 아직도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었다.
하지만 또 다른 후계자 드록 왕자가 죽고 사실상 르베나가 유일한 후계자가 된 상황에서 더는 르베나 역시 사교계로의 진출을 미룰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제노스 왕의 강력한 뜻에 따라 오늘, 르베나는 생일파티를 함과 동시에 데뷔탕트를 치르고 모두의 앞에서 디오니스의 정식 후계자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이에 디오니스는 본궁뿐만 아니라 모든 궁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분주한 곳은 다름 아닌 작은 외궁,
바로 르베나의 궁이었다.
“하아…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거지?”
수많은 시녀들의 손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르베나가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묻자 시녀들을 총괄하던 루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거의 다 됐어요, 공주님!! 조금만 더 하시면 돼요! 얘들아 빨리 움직이렴!!”
2시간 전에도, 5시간 전에도 들었던 소리를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내뱉는 루를 보며 르베나는 왜 그녀가 어린 나이에 사나의 바로 밑에 있을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벌써 8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르베나는 씻기고 마사지 당하고 또 씻기도 또 다른 마사지를 당했다.
훈련을 해도 몇 번을 했을 이 시간 동안 계속 씻고 마사지를 하다니, 르베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귀찮아하는 그녀를 배려해 제노스 왕이 모든 일을 오늘 하루로 몽땅 몰아준 만큼 르베나도 딱 오늘 하루는 참을 생각이었다.
‘이 짓을 보통 일주일 동안 한다니. 영애들을 얕보면 안 되는 거였어.’
르베나의 생각 따위 알 리 없는 시녀들은 하루 종일 르베나를 만지고 꾸밀 수 있는 오늘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나마 평소에 워낙 관리가 잘된 그녀였기에 시녀들은 르베나에게 다른 귀족 여식들과 달리 연회날임에도 평소와 똑같은 식사를 내왔는데 이마저도 없었으면 르베나는 절대 이 시간을 견디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루의 말이 진실이라면 정말 마지막 마사지를 받고 있을 때, 드디어 사나가 들어왔다.
시녀들에 둘러싸여 잔뜩 불만 어린 얼굴로 마사지를 받는 르베나를 보고 웃어 보인 사나가 웃는 얼굴 그대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분께서 보내오신 드레스가 참 예뻐요. 그분은 대체 저런 드레스를 어디서 맞추신 걸까요?”
사나의 말에 시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키득거렸다. 동시에 이유 모를 눈빛들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런 시녀들과 사나를 한번 노려본 르베나는 곧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베개에 묻어 버렸다.
“꺄악 공주님! 안 돼요!”
하지만 이마저도 허락받지 못했다.
* * *
“파트너라니?”
르베나의 붉은 눈이 싸늘할 만큼 빛나자 조금은 난감해하던 루가 말했다.
“모든 영애들은 데뷔탕트에 파트너가 있어야 해요, 공주님. 게다가 이번 연회는 의미가 많이 담긴 만큼 꼭 괜찮은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고요.”
루의 말에 안 그래도 맘에 안 드는 연회가 더 마음에 안 들어진 르베나가 툭 내뱉었다.
“후벤에게 전갈을 보내. 파트너로 설 수 있겠냐고.”
르베나의 말을 들은 루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안 돼요!! 안 된다고요, 공주님!! 데뷔탕트는 반드시 피가 섞이지 않은 이성이어야 해요!!”
루의 말에 인상을 찡그린 르베나가 말했다.
“후벤이 언제 나와 피를 섞었나?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르베나의 말에 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네. 피는 안 섞이셨지요. 하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가족이라고 생각할 만한 분이시잖아요!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공주님. 후벤 경께서 아무리 가족 같다 하더라도 곁에 함께하려는 분이 계세요!”
이번에는 르베나의 얼굴에 예상치 못한 당황이 서렸다.
“만약 후벤 경께서 공주님의 데뷔탕트에 서신다면 그분의 연인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요?”
보통 누군가의 데뷔탕트 파트너는 당사자와 연인 관계이거나 다른 정인이 없는 사람만이 가능했다. 그래서 르베나는 당연히 그런 일 따윈 추호도 없을 후벤을 생각한 것이었는데 들려온 루의 말에 조금은 충격을 받았다.
“후벤이… 연인이 있어?”
르베나 답지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 묻는 모습에 루는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하지만 후벤 경 나이와 인기에 아무렴 없으시겠어요? 그런 분을 데뷔탕트 파트너로 하시는 건 그분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연인에게 큰 실례를 하시는 거라고요!!”
루의 말에 순간 자신이 얼마나 후벤과 그의 연인(?)에게 무례했는지를 깨달은 르베나가 심각하게 말했다.
“그렇군… 알았다. 파트너는 내가 따로 알아보마.”
그리고 루는 그런 르베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상을 맞추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이번 주 중으로 꼭 알려 주셔야 해요?”
루의 말에 뭔가 멍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르베나를 보고는 루가 방을 나섰다.
그리고 르베나의 방을 나서자마자 루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쿵닥쿵닥 뛰는 심장은 멀쩡했다.
“하아…….”
안도의 숨을 내쉰 루가 순간 조금 전 놀라 되묻던 르베나의 얼굴을 갑작스레 떠올리면서 풋 웃었다.
“풋… 귀여운 공주님… 하아… 근데 순진한 공주님 속이려니 마음이 쓰이네… 아냐, 아니야! 미래의 공주님 남편을 추리는 일인 걸! 나는 아주 잘했어! 후회가 없다고!”
제 자신을 칭찬한 루는 당당하게 르베나의 방문 앞을 유유히 떠났다.
계속해서 ‘후벤의 연인…….’을 되뇌는 르베나는 꿈에도 모른 채.
그리고 이틀 후 저녁.
르베나는 또다시 직면한 새로운 문제 앞에서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르베나를 두고 옆에 앉아있던 이들의 표정도 사뭇 심각했다.
“하아…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죠?”
후벤의 말에 사나가 말했다.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어요. 오로지 공주님의 선택만이 중요할 뿐…….”
그러자 가스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하게 말했다.
“이건 공주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큰일이네. 그만큼 공주님의 선택을 믿어야 하지 않겠나.”
모두가 모여 심각하게 르베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때, 아한은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입을 꾹 다물고 르베나의 앞에 놓인 것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르베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제 앞에 놓인 세 장의 서신을 보며 끊임없이 한숨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분명 르베나는 스스로 파트너를 구하겠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르베나 공주가 파트너를 구한다는 소문이 전 대륙을 빠르게 돌더니 디오니스에 엄청난 양의 서신이 쏟아져 온 것이다.
최강의 베이라.
아벨디온의 기사.
디오니스의 유일한 후계자.
'보토니에'라는 끔찍한 조직과 맞서 마를한을 구한 공주.
르베나를 칭송하는 수많은 이름 속에 모든 대륙의 날고 기는 미혼의 자제들은 모두 르베나의 파트너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추려진 단 세 장의 서신이 지금 르베나의 눈앞에 있었다.
수천 장의 서신 중 이 세 장이 추려지기까지 제노스 왕과 가스트, 후벤과 사나가 며칠간 얼마나 고심을 하고 다투었는지 르베나는 물론 모른다.
그저 르베나의 붉은 눈은 의문과 난감함을 담고 제 앞에 놓은 서신을 노려볼 뿐이었다.
[자칸의 왕위 계승자, 바흐란이 르베나 공주님의 파트너가 되기를 성심껏 청하는 바입니다.]
[메이슨 공작가의 차남, 아를이 르베나 공주님의 파트너가 되기를 모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청하는 바입니다.]
[젠 제국의 황제, 루드바하가 그대의 파트너가 되기를 오랜 시간동안 무척이나 바라고 있습니다.]
도대체 아를이, 바흐란 왕자가, 루드바하가.
아니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보는 그들이 왜 이런 서신을 보냈는지 르베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어느 한 명을 고르는 것은 르베나에게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차라리 몸으로 싸우는 게 훨씬 쉬운 일이라 생각하며, 르베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서신을 두고 몇 시간 동안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고 밤이 늦게 여물어 갈 무렵. 드디어 르베나의 손이 망설임 끝에 하나의 서신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