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외전 : 루드바하 이야기 (4)
처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기사들의 모습. 죽어 간 동료기사를 붙들고도 차마 울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모두들 누군가를 찾는 듯한. 결국엔 무엇인가에 잔뜩 분노하고 서글퍼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루드바하는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또다시 그들에게 반응한 그의 신력이 멋대로 살기를 띠고 날뛰려고 했다.
“하아…….”
하지만 자신의 힘을 겨우 억누르며 깊게 숨을 들이마신 루드바하의 벽안이 깊게 침잠했다.
눈앞의 기사들이 얼마나 애통해하는지 그들이 두고 온 소녀에 대해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루드바하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루드바하와 이 세계를 구한 그의 딸이 지금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래서 평생을 떠올린 그의 마력을 생각하며 루드바하는 텔레포트를 했다.
‘르베나, 르베나……!’
속으로 수없이 그녀를 부르며 그녀의 파장이 느껴지는 곳으로 망설임없이 몸을 옮겼다.
그러기를 몇 번. 루드바하는 드디어 그 소녀가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
순간 루드바하의 벽안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멀리서 보이는 르베나의 뒤로 펼쳐진 광경은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지독했다.
처참하게 죽어있는 수십 구의 몬스터들. 그리고 아마도 꽤나 고통스럽게 죽어 갔을 한 사람의 시체.
“어릴 때부터 모두의 외면 속에 자랐다고 합니다. 아동기 때는 궁인들에게… 하… 육체적, 정신적인 학대를 당했다고도 합니다. 네? 자세히 아셔 봐야 열만 받으실 겁니다.”
“그 뒤로 후벤이라는 기사와 사나라는 시녀가 쭉 돌보았답니다. 베이라 가스트는 비교적 최근 함께하게 된 듯하나 르베나 공주님이 이들을 유난히 아끼신다고 합니다.”
“평판이요? 주변의 이렇다 할 평판은 없습니다. 워낙에 조용한 분이시고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라 합니다. 특이한 점이라고 하면… 누구도 르베나 공주님이 베이라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언젠가 들었던 유안의 보고가 이 순간 루드바하의 머릿속을 스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저벅저벅.
일부러 그녀가 들을 수 있게 발소리를 조금 크게 내며 루드바하가 다가섰다.
아마도 꽤 오래 혼자였을 그녀. 아마도 꽤 오래 아파했을 그녀. 그래서일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를 빼어 닮은 그녀인데도 그가 짓던 환한 미소를 전혀 빼어 닮지 못한 이유는.
저벅저벅.
그래서일까. 풍기는 마력이 이렇게도 따뜻하고 강인한데 그녀의 뒤로 펼쳐진 장면이 이토록 잔혹한 이유는.
저벅저벅.
루드바하가 이윽고 돌아 서있는 르베나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휙……!
루드바하가 자신도 모르는 힘으로 그녀를 꽈악 잡아 돌리자 놀라지도 않은 듯 무표정한 르베나가 그를 마주보았다.
“…어째서?”
그리고 르베나를 마주본 루드바하의 눈이 안타까움과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팔을 잡은 그의 손이 덩달아 떨려왔다.
후둑, 후두둑……!
르베나. 그를 쏘옥 빼어 닮은 소녀는 지금… 울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에도 차마 소리조차 낼 수 없다는 듯, 후두둑, 후두둑 애처롭게 떨어지는 눈물을 차마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아…….”
루드바하가 르베나의 얼굴에, 눈물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온몸이 말 못할 슬픔으로 떨리고 있다는 것을. 차마 표출해내지 못하는 아픔을 겨우내 참으며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르베나가 지금 얼마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처절하게 질러대고 있는지를.
꽈악.
누군가 그의 심장을 세게 잡고 비트는 것처럼 선명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티내지 않으며 살며시 손을 들어 르베나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쌌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을 겁니다. 저 역시… 지금은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아마도 그가 여기 있었다면 이렇게 안아줬겠지. 작고 여린 그의 딸을 분명 그는 이렇게 안아줬겠지. 그러니까 내가 대신…….’
이건 분명 그의 대신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순간 그의 가슴께에 있는 르베나의 머리에 힘이 풀리며 툭, 그에게 기대왔다.
“…싶었는데… 나는… 그… 싶었… 는… 데.”
들리지도 않을 만큼 짜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루드바하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곧 그가 조금 더 세게 르베나를 제 품에 안았다. 그러자 조금씩 그리고 빠르게 그의 가슴께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흐윽… 모두… 지켜줘야 했는데… 내가… 흑… 믿었어야… 했는데… 나는… 너무 어리석어서… 흑… 그래서… 그래서 모두를… 잃어버렸어… 흑…….”
혼자 나지막이 내뱉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는 귀를 기울였다.
“지켜 줘야 했는데. 믿었어야 했는데. 잃어버렸어.”
르베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몇 마디가 루드바하의 머리에, 심장에 날카롭게 박혀갔다.
열일곱 살.
이제 막 데뷔탕트에 데뷔해 치장과 사교계에 들떠 있을 순수한 나이. 그 나이의 그녀이건만.
어째서 르베나는 울어야 할까. 어째서 르베나는 이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모두를 지키고 버텨내야만 할까.
‘그러고 나서도 왜… 그녀는 울어야 할까.’
꾸욱.
‘그리고 나는 왜. 이 울음소리에 이렇게도 아플까.’
점차 더 젖어가는 가슴께의 온기를 느끼며 루드바하의 벽안이 풍랑을 만난 것처럼 떨려왔다.
그녀를 안고 있는 손이 달구어진 쇳덩이를 만진 것처럼 뜨거우면서도 세상 가장 여린 존재를 안은 것처럼 두려워졌다.
온기. 따뜻함. 두려움 그리고 소중함.
‘…아.’
순간 루드바하가 나직이 속으로 숨을 내어쉬었다. 그러고는 벽안에 몰아치던 풍랑을 거두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약속을 지키고 싶었는데. 언젠가 당신을 만나면 그때의 당신처럼 멋지게 웃으며 약속을 지켰노라,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다시 떠진 루드바하의 벽안에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파란 불꽃이 일렁였다.
‘다른 의미로 약속을 지키게 될 것 같아. 당신의 딸을 지킬께… 약속처럼… 누구도 이 사람을 울리지 않게. 누구도 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게 할게. 하지만 ……내 품에서 그렇게 할게.’
점자 줄어드는 르베나의 울음소리 앞에서 루드바하는 결코 꺼지지 않을 불꽃 하나를 제 심장에 새겼다.
절대로 잊지 않을. 절대로 잃지 않을. 그래서 절대로 꺼지지 않을 뜨거운 불꽃을.
* * *
“그래서 지금은 어떤 상태지?”
무표정한, 조금은 싸늘한 루드바하의 물음에 마법구 저편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궁으로 돌아와 모두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르베나 공주님께서도 방금 취침하신 것 같습니다”
상대의 보고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루드바하가 말했다.
“고생했군. 오늘밤은 모두 쉬도록”
루드바하가 나직이 말하며 신력을 끊었다. 그러자 끊어진 마법구를 슬쩍 본 유안이 조용히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르베나 공주님께선 아실까요? 스토커같은 제국의 황제가 젠에서도 손에 꼽는 살수들을 보디가드로 자신에게 붙여놓은 걸. 제가 그분이라면 당장 폐하를 없애고 싶을 만큼 무서울 겁니다.”
사삭 사삭.
태연하게 말을 뱉고도 서류를 바라보는 유안을 한번 서늘하게 바라본 루드바하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방을 나섰다.
콰앙!
제법 세게 닫힌 방문 소리를 들은 유안의 목소리가 다시 작게 들려왔다.
“저 성질머리 하고는… 하아…….”
사각사각.
그리고 나서도 새벽까지 유안의 서류 업무는 끝날 줄 몰랐다.
휘잉---.
바람이 부는 조금은 서늘한 방 안.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르베나의 얼굴이 스무 살 여느 소녀처럼 풀어져 있었다.
‘아니, 그새 해가 바뀌었으니 이제 스물하나인가.’
피식. 혼자 작게 웃고는 르베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한 남자, 루드바하가 소리 없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루드, 슬립.”
사락--!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이 르베나의 검은 머리를 살며시 매만졌다. 이미 잠든 그녀이지만 조금 더 깊고 편안한 잠을 자는 마법을 걸어두었다. 지난 밤의 피로가 모두 사라져버릴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깊게 잠든 르베나의 숨결을 확인한 그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무얼…해도 좋습니다. 분명 알려 달라 했는데… 하아… 제게 말씀 없이 어디론가 가셔도 좋고 언젠가 처럼 눈물을 흘리셔도 좋습니다. 또 상당히 마음에는 안 들지만 아를이건 바흐란왕자건 다른 분들과 잘 지내시는 것도… 흠……좋습니다. 하지만…….”
사락-
루드바하의 긴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르베나의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벽안이 깊이를 모르고 일렁거렸다.
“절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다치지 마십시오. 그게 제가 유파시드로써 참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입니다.”
다시 한번 깊게 잠든 르베나에게 루드바하가 조금 더 다가갔다. 그러고는 르베나의 머리칼을 만졌던 그의 손을 가져와선 제 검지 손가락을 그의 붉은 입술에 살며시 대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조심스럽게, 정말이지 여린 꽃잎을 대하는 것처럼 살며시 그 손가락을 르베나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르베나. 이 벌은 달게 받을게요.”
그의 조용한 말이 한 겨울날의 눈송이처럼 스르르 지워져 나갔다.
휘잉--
곧 창문이 닫히며 마지막 바람이 들어섰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텅 빈 자리를 조용히 한번 맴돌면서. 순간 잠시 움찔한 르베나의 손가락을 스친 바람은 한동안 르베나의 방을 부드럽게 유영했다.
제국력 922년의 새해가 밝아온 어느 깊은 밤이었다.
<검을 든 왕녀, 르베나> 제2장 아벨디온 上 외전 完